꿈에 대해 말하는 영화는 많다. 그러나 영화 자체를 꿈으로 가정하는 감독은 몹시 드물다. 왜냐하면 꿈이란 보통 그것을 꾸는 대상 즉 주체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누구의' 꿈인지를 알아야 관객이 영화를 따라올 수 있기에 보통은 이를 친절히 설명해준다. 이를테면 김지운의 영화 <달콤한 인생>이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은 '꿈을 꾸었다'는 소재가 인물의 입을 빌려 설명된다. 그런데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곤 사토시는 누구의 꿈인지를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작품의 형식에 꿈을 결합한다. 

이는 곤 사토시가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만약 영화가 관객에게 '미메시스(Mimesis)'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애니메이션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영상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곤 사토시는 애니메이션이면서도 영화처럼 작품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곤 사토시의 작품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그 사이이자, 현실과 상상의 중간에 자리 잡는다. 

물론 여타 애니메이션 감독들도 그런 식의 구성 꿈과 현실의 경계를 고민했다. 대표적으로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은 어느 영화의 쇼트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곤 사토시가 그런 감독과 차별화되었던 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런 상상을 작품의 형식과 결부시켰기 때문이다.
 
 영화 <천년여우>의 한 장면

영화 <천년여우>의 한 장면 ⓒ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만약 당신이 천 년을 산다면 

곤 사토시의 <천년여우>는 "만약 당신이 천 년을 산다면"이라는 상상으로 만든 작품이다. 곤 사토시는 그녀를 죽음 직전에 데려다 놓은 후 그녀를 추억하는 어느 누군가의 방문을 가정한다. 이때 그녀를 방문한 이는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열렬히 사모하는 팬보이이며, 그는 눈앞에서 평소 자신이 사모해왔던 '우상'을 범접했기에 황홀함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애초에 그런 팬심으로부터 시작하고 무슨 일을 벌이든 간에 꿈과 현실을 구분 짓지 않는다. 꿈인지 현실인지는 별반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영화 또한 누군가의 꿈일 수 있다고 말하는 재치를 발휘한다.

저 멀리 지구가 보인다. 발사를 앞둔 우주선 앞에 어느 여인이 터벅터벅 걸어오고는 이내 우주선이 발사된다. 카메라 렌즈가 열리듯 출구가 열리고 검은 우주가 펼쳐지게 되면, 웅장한 발사음과 함께 대지와 가슴 한편이 떨려온다. 이때 카메라는 시점을 변경해 이 '장면'을 보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것이 영화의 한 장면이었을 말해준다. 영상 편집기기로 이 '장면'을 보는 남자의 이름은 타치바나 겐야로, 이제 곧 그녀를 찾아가 다큐멘터리를 만들 예정인 '감독'이다. 이때 우리는 우주선 출구가 열리는 모습이 카메라 셔터를 조이는 아이리스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우주선을 탄 여배우가 향하는 곳이 카메라 속일 수도 있다고 가정해본다. 카메라 렌즈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보면 아마도 영화 속으로 그러니까 자신의 '필모그래피' 속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라고, 혹은 카메라 렌즈를 타고 '어두운' 영화관 속으로 우리를 향해 뛰쳐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두 가지 가정으로 시작한 이 영화에 우리가 빠져드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 작품을 촬영한 카메라가 작품 속 혹은 작품 밖으로 구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다. 만약 이 카메라가 작품 속을 향한다면 바로 '그녀'가 천 년을 살 것이다. 반대로 이 카메라가 작품 밖을 향한다면 그녀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천 년을 살 것이다. 사람이 죽을 때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라는 어느 만화의 대사처럼 둘 중 무엇이든 간에 그녀는 '기억'될 것이므로 천 년을 살기는 할 테다. 다만, 이 카메라가 영화 밖으로 향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녀를 천 년 동안 기리게 될 것이다. 
 
 영화 <천년여우>의 한 장면

영화 <천년여우>의 한 장면 ⓒ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영화 밖을 향하는 카메라

그녀의 이름은 후지와라 치요코. 영화상의 설정으로는 젊은 시절 유명한 배우였다가 홀연히 은퇴해버려 전설로 남았다. 영화 속에서 그런 '전설'을 숭배하는 것이 바로 중년의 다큐멘터리 감독 타치바나 겐야다. 어찌나 그녀의 영화를 돌려 보았는지 이제는 대사 하나하나를 읊을 정도가 된 그에게 그녀를 취재하라는 명령은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카메라 하나 조수 하나와 함께 외딴 시골의 굽잇길을 넘어간다. 

전설을 알현하려면 이런 고난쯤은 겪어야 한다는 겐야의 푸념은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치요코가 젊을 때 은퇴한 만큼 현시점에서 그녀의 영화는 고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겐야는 고전 영화를 찾아다니는 우리가 감정을 이입할 제 1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영화 속의 영화, 자신의 필모그래피 속 몇몇 장면을 뛰어다니는 치요코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도 그동안 보았던 몇몇 영화를 떠올려 보게 된다. 이 영화의 설정이 '일본 영화'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아는 사람에게는 아는 만큼 무언가를 찾게 되는, 이른바 겐야의 시점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된다. 

영화가 시작하고 겐야가 치요코를 찾아가는 장면에서는 오프닝 신에서 발사된 우주선과 겐아가 탑승한 자동차가 나란히 병치된다. 치요코가 출연한 영화가 겐야의 자동차와 번갈아가며 등장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필모그래피를 '관통'한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영화의 후반에 치요코가 자신의 사랑을 찾아 필모그래피 속을 차례대로 달리는 시퀀스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도입부에 겐야가 낡은 영화 세트를 허무는 곳 앞에 서있는 장면이 있으므로 이 시퀀스는 외부적(역사적)으로도 해석된다. 
 
 영화 <천년여우>의 한 장면

영화 <천년여우>의 한 장면 ⓒ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허물어진 역사

영화 세트가 다 허물어졌는데 영화사의 간판만큼은 남겨진다. 이 간판은 아마도 세트의 철거 후에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시대의 막을 내린다는 뜻으로 허물어질 것이다. 겐야가 오래전에 은퇴한 치요코를 찾아가게 된 이유도 영화사의 창립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이 세트는 지난 70년의 세월과 함께 무너져버린다. 다시 말해 이 세트와 함께 했던 치요코는 그녀의 황금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렇다면 그 역사가를 사라지기 전에 카메라로 보존해 두는 것이 겐야의 의무일 테다. 

영화가 개봉한 2003년으로부터 7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1933년이라는 숫자에 도달하게 되는데, 작품 속에서도 이 시기를 다룬다. 아직 어린 치요코가 운명처럼 찾아온 어느 인물을 생각하며 도달한 곳은 한창 영화 붐이 일던 만주이다. 당시의 만주는 동아시아 삼국의 영화 인프라가 모인 요충지로서, 일제의 검열이 심했던 한국이나 영화 자원이 부족한 중국에서 넘어온 이들이 모여 영화제작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는 만주국이 세워진 1932년을 대략 기점으로 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한 37년까지 있었던 짧은 부흥이었고, 치요코는 이 시기에 만주를 방문해 영화를 찍고 전쟁으로 인해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다. 
 
 영화 <천년여우>의 한 장면

영화 <천년여우>의 한 장면 ⓒ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아마도 역사가

치요코를 배우로 데뷔시키려는 부모와 영화사 직원의 대화를 보면, 영화사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청소년 치요코가 만주에 간 것이 대략 30년대이니 이때는 아마 20년대 후반일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영화사에서 대부분의 영화사도 대략 이 시기쯤 설립되었다. 쇼치쿠, 도호, 닛카쓰 등이다. 1920년에 설립된 일본 영화의 부흥을 거쳐 탄탄대로를 걷는 치요코는 사실 어린 시절 우연히 마주친 남자를 짝사랑하기에, 그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고 찾아와줄 것을 기대해서 배우 일을 했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치요코가 배우 일을 하게 된 것은 누군가를 향한 강렬한 사랑 때문이었고 본의치 않게 일본 영화사에 한 획을 긋게 되었다. 

영화 속에 영화로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쇼치쿠와 도호와 닛카스의 어느 영화 장면을 간간이 떠올리곤 하는데, 그렇다면 지난 삶을 회상하며 영화 속을 내달리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사(映畵史)를 달리는 영화사(映畵社)인 셈이다. 이러한 모습이 사실은 '영화배우'인 그녀가 <천년여우>라는 영화 속에서 자신이 출연한 '영화' 속을 관통하는 형식, 즉 '액자 속의 액자'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말하자면 그녀가 이 영화라는 프레임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 단지 영화 속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쩌면 일본의 영화와 그것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뒤죽박죽 섞여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상상해본다. 곤 사토시가 영화의 형식을 통해서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었다는 말은 바로 이런 부분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치요코가 우연히 만난 어느 남자와 짝사랑에 빠졌고 그에게서 받은 열쇠를 오래도록 간직한다는 모티브가 무척 단순하기는 하지만, 그녀가 끝내 도달한 것이 남자가 그리던 자신의 초상화라는 점이 포인트다. 그녀의 삶은 마치 그녀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그녀의 초상화는 어느 한순간에 고정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녀가 여배우라는 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움직이는 모습은 영화 속에 있지만 정작 가장 추억하고 싶은 '순간'은 잡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겐야가 치요코의 모습을 간직하려는 시도, 다큐멘터리는 그녀를 기록할 수는 있어도 정작 순간은 포착하지 못한다고 곤 사토시는 말하는 것 같다. 
 
 영화 <천년여우>의 한 장면

영화 <천년여우>의 한 장면 ⓒ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곤 사토시가 말하는 순간 

곤 사토시는 꿈과 환상을 다루는 마술사이기에 늘 출렁이는 모습만을 보여줄 것만 느낌이 있다. 꿈의 그 일렁이는 환영을 우리는 떠올린다. 그러나 사실 곤 사토시가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파편화된 꿈속에서 우리가 선택하고 겪는, 순간의 마법이었다. 이를테면 <동경대부>에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운명을 떠올려 보자. 단언컨대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갓난아기를 구하는 것은 그들의 의협심 때문이 아니라 운명처럼 찾아온 바람이 성모 마리아의 재림을 만들어 낸 '순간'일 테다. 이런 꿈의 선택은 사실상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흘러가야 한다는 자기구제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즉 기적 같은 순간은 곧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라는 기회주의자의 모습이 곤 사토시에게 있었다. 

그런데 <천년여우>에서 치요코는 자신이 선택한 기회가 늘 저만치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그녀는 언제나 가슴 속에 열쇠를 품었으나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꿈의 일부로 편입된다. 즉 그 남자는 세월 아래에서 여배우로서의 성공이라는 꿈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도 못하게 된다. 어느 순간 열쇠를 잃어버리게 된 치요코가 울음을 터트린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하고 보존하던 꿈의 일부가 끝내 여배우라는 개인의 욕망 속으로 흩어져버렸다는 사실을 깨우치면서, 여배우로서의 삶이 순식간에 부정되어 버린다. 배우란 누군가를 연기하는 존재인데 그녀를 이루던 주축이 사라지고 나니 치요코는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배우'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천년여우>의 한 장면

영화 <천년여우>의 한 장면 ⓒ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삶은 드라마

영화의 언어로 말하자면 그녀는 이제 영혼 없는 카메라 즉 내러티브 없는 필름 조각에 불과하게 되었다.  껍데기에 불과한 치요코의 영화는 단지 영화라는 탈을 뒤집어쓴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래서 치요코는 사랑의 좌절과 예술의 좌절 두 가지 모두를 경험하게 되었고, 그녀가 은퇴를 '선택'한 것 필연적이었다. 재미있게도 작중에서 그녀가 은퇴한 1960년대 이후로 일본 영화계가 점차 쇠퇴해버렸다는 것도 현실과 꿈이 결합되는 단서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를 거부하던 오래도록 은둔하던 치요코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겐야의 촬영요구를 승낙한 것은 지금에야 비로소 그녀에게 '이야기'가 생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사랑하던 이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은 그녀가 자신의 삶 전체와 연기를 부정했던 것이었다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사랑조차 삶의 선택 중 하나였음을 비로소 깨달았기에, 세상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는 장르인 '다큐멘터리'를 통해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영화 초반으로 돌아가 영화를 돌려본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여배우인 그녀가 영화 속에서 치요코가 아니라 배역의 이름을 불린다는 점에서, 겐야가 돌려보는 그 영화들은 치요코가 아닌 영화의 이름으로 호명된다. 말하자면 그녀는 이름이 없는 존재 다시 말해 영화라는 매체가 배우 개인의 이름을 모습을 대변할 수 없다는 아주 명료한 사실을 우리는 깨닫는다. 그리고 이는 영화 속에서 영화의 역사 그리고 실제 '역사'가 스쳐 지나간다는 점에서 역사 속에 남겨진 개인의 이야기는 시간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간 속에 남겨진 순간이 있다면, 시간이 흐르면 그 순간은 뒤처지기 마련이다. 사실 삶의 대부분은 그렇게 흘러가는데 우리는 그런 순간을 뒤늦게 떠올리고, 선택하고, 붙잡아 보려 한다. 그런 덧없음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소속된 삶을 대변하는 것이기에 작은 틀에서는 의미가 없고, 훗날의 치요코처럼 '치요코인 자신'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이 될 때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즉 곤 사토시는 꿈과 환상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꿈만 같은 순간을 모아 한 장의 움직임을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삶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화란 초당 24프레임의 영화라는 게 혹은 애니메이션이라면 8프레임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삶은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어쩌면 그가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을 택한 게 영화보다는 더 꿈꾸기 쉽다는 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곤 사토시 천년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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