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웰컴, 삼바> 포스터.

영화 <웰컴, 삼바> 포스터. ⓒ (주)이수 C&E


<웰컴, 삼바>는 앎에 대한 영화다. 난민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들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알고자 하는가에 질문을 한다. 그들도 우리 같이 희로애락을 가진 '인간'일 뿐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난민 문제를 접한 아들이 답답해 한다. 이 문제에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과연, '그들'의 존재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라고 말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그렇듯, 난민 문제 역시 난민에 대한 앎 이전에, 이데올로기가 앞서가버린 사안이 됐다. 그래서 '이해'의 실마리조차 놓쳐버린 상황이다. 영화 <웰컴, 삼바>는 그 '이해'의 실타래를 풀기 위한 적절한 도움이 될 듯하다. 

호모 사피엔스, 그 본연의 '난민성' 

인간의 시작이라 일컬어지는 '호모 사피엔스'도 '난민'이다. 시작은 아프리카였지만, 그 발길은 '지구'라는 땅덩이를 헤집고 다녔다. 가는 곳곳에서 동류의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등의 같은 영장목은 물론, 아메리카의 버팔로, 모리셔스의 도도새 등을 멸종으로 이끌며 지구별의 주인으로 거듭났다. 호모 사피엔스의 거칠 것 없는 역마살이 없었더라면 지금 인류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누 같은 나무배에 의지하여 인도양을 넘는 호모 사피엔스의 도전 정신은 그 시절에는 신대륙 정복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대서양의 '보트 피플', 난민으로 이어진다.

같은 행위, 다른 결과, 거기엔 '근대의 산물'인 이른바 '국민 국가'가 존재한다. 오늘날 우리가 신봉하는 이 국가라는 경계 역시 사실은 역사의 산물일 뿐이다. 천 년의 역사를 가졌던 로마가 남하하는 게르만 족에게 역사의 자리를 내어주듯이 오늘날 우리가 신봉하는 국가, 국가의 경계라는 것이 결코 고정불변의 가치나 영역이 아니라는 전제를 통해 우리는 '난민 호모 사피엔스'의 종적 개념에 한 발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난민 삼바 
 
 영화 <웰컴, 삼바> 스틸 컷.

영화 <웰컴, 삼바> 스틸 컷. ⓒ (주)이수 C&E

 
'난민'의 시작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종교적, 혹은 지역 분쟁, 오랜 가뭄 등의 자연 재해가 있다. 하지만 위에 말한 것처럼 인류의 역사는 곧 '유동'의 역사이다. 그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늘 자신이 보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난다.

<웰컴, 삼바>도 그랬다. 삼바(오마르 사이 분)의 꿈은 자신의 나라 세네갈 호숫가에 집을 지어 평안하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평안'을 위해 그는 지금 이국 프랑스에서 '난민'의 신세로 단속을 피해 10년의 세월을 살아왔다. 아직 집을 짓기엔 이르다. 여전히 고향에는 그에게 돈을 보내라는 독촉 전화를 하는 가족이 있다. 우리가 사는 여느 삶과 다르지 않다. 세네갈에서 프랑스로 옮겨져 왔을 뿐이다. 

하지만 미처 집을 지을 돈을 마련하기도 전에, 아니 프랑스 영주권을 받기도 전에 아뿔사 그만 '단속'에 걸렸다. 10년이나 프랑스에 있었고, 셰프로 일했던 경력이 무색하게 그는 '추방' 위기에 놓인다. 더구나 10년이나 있었지만 삼촌 외에는 일가를 이루지 않았다는 것이 그에게 불리한 조건이 되었다. 억울하지만 이방인인 그에겐 항변의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내려진 결정뿐. 다니던 직장도 잃고, 프랑스인인 척 하지만 그래서 더 주목을 받는, 다시 '리셋'된 그의 일상. 

어렵사리 난민 수용소를 나온 삼바는 각종 프랑스의 이방인들이 몰리는 일자리로 나선다. 건설 용역, 유리창 닦이, 쓰레기 분리, 백화점 야간 경비 등 그가 전전하는 일자리, 즉 삼바와 같은 이방의 난민들로 채운 일자리는 프랑스 산업의 가장 취약하고 열악한 부분. 삼바의 일자리 전전을 통해 뜻밖에도 우리는 선진 국가 프랑스를 지탱하고 있는 인적 자원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오늘날 서울 변두리와 경기도 지역의 영세 산업 단지를 채우고 있는 인력들이 누군인가와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과연 그들이 없는 프랑스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제대로 굴러갈까? 

어색한 정장과 손에 쥐어든 잡지, 그리고 불안한 눈빛, 하지만 그 불안정한 삶에서 그럼에도 일관된 건 삼바라는 사람의 진정성이다. 난민 수용소 동료의 연인에게 잠시 흔들린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북아프리카 출신의 국적을 브라질이라 속이는 동료에게 이질감을 느끼며, 고지식하게 일자리를 찾고 쫓기며 여전히 고향의 어머니에게 걱정마시라 하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 앨리스(샤를로뜨 갱스부르 분)를 따스하게 위로하는 삼바는 '난민'이라는 이름표를 떼어내고 나면 우리 이웃의 괜찮은 남자이다.  
 
 영화 <웰컴, 삼바> 스틸 컷.

영화 <웰컴, 삼바> 스틸 컷. ⓒ (주)이수 C&E

 
<웰컴, 삼바>의 백미는 '난민'과, 그들을 상담하는 난민 수용소의 상담원들이 함께 파티를 벌이며 어우러지는 장면이다. 이방인, 타자와,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자라는 격도 잠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추고 웃고 떠들며 점차 한 무리의 사람으로 어우러진다. 거기엔 세네갈인도, 프랑스인도 없다. 그저 밥 말리를 좋아하고, 춤을 사랑하고 그 순간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이방인과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겠다던 앨리스의 동료 상담자 마누도, 삼바에 대한 호감을 가졌지만 '난민'이라는 선에 혼돈스러워 했던 앨리스도 '사랑'의 이해 앞에 스스로 선을 거뜬히 넘어선다. 

결국 평생을 프랑스인이 되고자 조심했던 삼바의 삼촌은 세네갈로 돌아간다. 그가 원하던 호숫가의 집을 지을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삼바는 앨리스의 도움(?)으로 프랑스에서 살 길을 얻는다. 결론은 쉬이 낼 수 없다. 교착 상태에 빠진 우리의 난민 문제처럼. 살고자 하는 곳을 향한 인간의 엑소더스를 과연 근대의 국민 국가라는 틀이 제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인간 본연의 DNA를 말이다. 하지만, 국가라는 금이 그어진 세상은 소란스럽다. 같은 DNA를 가진 인간에게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편견'의 색안경을 씌우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웰컴, 삼바>는 좋은 길잡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웰컴 삼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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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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