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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클스토리의 이름으로 발간된 첫 자서전. 파독근로자 3인의 삶을 조명한 ‘독일로 간 청춘’
 뭉클스토리의 이름으로 발간된 첫 자서전. 파독근로자 3인의 삶을 조명한 ‘독일로 간 청춘’
ⓒ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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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교사로 30여 년을 봉직했습니다. 그 시절 학부모님들께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빼곡히 적은 편지를 보내드리곤 했죠. 하지만 답장은커녕 알림장조차 열어보지 않은 부모님들이 많았습니다. 서명이라도 받아오라며 아이들을 다그치기도 했고 무관심한 부모님을 내심 많이 원망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일했던 고예곤씨는 정년퇴임 후 성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양원 초등학교에 부임했습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산골 오지 마을도 섬마을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 아직도 많은 성인이 글을 모른다는 걸 말이죠. 

"제 늦깎이 제자들은 자주 웁니다. '못난 엄마였다고 자식들에게 미안하다면서...' 하지만 전 압니다. 미안하고 무지했던 건 그분들이 아니라 저 자신이었음을요. 그때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성심껏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한국교직원공제회가 퇴직 교원들을 위해 마련한 자서전 출판 기념회장. 목이 멘 소리로 고씨가 낭독하자 객석에 있던 청년들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제 어머니를 향한 사과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이민섭 뭉클스토리 대표는 학창시절 선생님이 학부모 면담을 요청할 때마다 초등학교 졸업자라는 이유로 당당히 나서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이제 어머니께 당당히 말합니다. 어머니의 굴곡진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이었던가 말이죠. 그의 소원은 어머니의 자서전을 펴내는 일입니다.
  
부모님의 역사는 가족사이자 시대의 역사
 
정대영(좌)·이민섭(우) 뭉클스토리 공동대표
 정대영(좌)·이민섭(우) 뭉클스토리 공동대표
ⓒ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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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천구 목동 해누리타운에 둥지를 튼 뭉클스토리는 부모님의 생애를 기록해 자손들에게 남기는 일을 하는 예비사회적기업입니다. 2016년 법인 설립 이래 총 60여 분의 자서전을 제작했습니다. 

파독근로자나 독립유공자처럼 한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뿐 아니라 부모의 이혼이나 가난으로 상처받았지만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들을 꺼내면서 화해를 하게 되는 소소한 개인사들도 많습니다. 
  
한 독립유공자를 인터뷰했던 정대영 공동대표는 "독립유공자분이 63분 살아계시다"며 "이분의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역사였다"고 전했습니다.

"매년 저희들은 왜 자서전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해답을 얻고 있습니다. 세대 간 소통 문제는 앞선 세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고 자서전이 이를 엮어주는 좋은 장치가 된다는 점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써 내려가는 자서전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고 자서전이 이를 엮어주는 좋은 장치가 된다는 점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고 자서전이 이를 엮어주는 좋은 장치가 된다는 점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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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클스토리의 자서전은 자녀들이 제작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전에 이메일과 전화로 자녀와 인터뷰를 합니다. 제작진도 2030세대로 자녀 세대가 집필합니다.

뭉클스토리에는 현재 7명의 작가가 활동합니다. 이메일이나 유선전화 홈페이지를 통해 제작을 의뢰할 수 있고 부모님과 약 3~5회 정도의 만남을 통해 본격 인터뷰가 진행됩니다. 
    
작가들은 이 정보들을 취합해 초고를 작성하고 사실 확인 절차를 거쳐 최종본을 완성합니다. 150쪽 분량 기준으로 평균 3개월이 걸리며 비용은 200여만 원입니다. 

뭉클스토리는 전문작가가 모든 것을 담당하는 기존의 제작 방식에서 탈피해 분업화와 전문화를 통해 제작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습니다. 제작진들은 인터뷰 전문가와 에디터 전문·출판 전문 세 분야로 역할을 나누었습니다.

"저희는 최소한의 비용만을 받고 출간을 도와드리지만 그마저도 버거워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보다 많은 분들이 자서전을 쓸 수 있도록 내년 출시를 목표로 온라인 시스템을 개발 중입니다." 

특별한 날을 위한 특별한 기념품
 
양천구 목동 해누리타운 8층에 자리잡은 뭉클스토리 사무실
 양천구 목동 해누리타운 8층에 자리잡은 뭉클스토리 사무실
ⓒ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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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은 환갑이나 고희처럼 부모님의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선물로 자서전을 많이 의뢰합니다. 신청자의 약 40%가 자녀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몰랐던 부모님의 모습을 마주하곤 때론 애틋함으로 때론 미안함으로 뒤엉킨 감정에 휩싸입니다. 
 
"엄마의 자서전을 읽고 밤새 펑펑 울었습니다. 엄마가 내색하지 않아 그렇게 힘든 줄 몰랐거든요." 
- 20살을 기념해 엄마의 자서전을 펴낸 딸

한편 자서전을 받아든 부모님들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속이 후련하다고 하셔요. 자기 삶을 진지하게 들어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면서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다며 고마워하십니다."

정 대표는 "자서전 출간을 직접 요청하시는 분들은 최소 20-30년 동안 육필 원고를 쓰고 언젠가는 책으로 펴내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한 경우가 많다"고 설명합니다. 

"깨알 같은 글씨로 A4 용지에 꾹꾹 눌러쓴 원고가 수백 장에 이르는 70-80대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신문 스크랩, 사진들이 한가득인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시죠. 자녀들에게 알리고 싶고 꼭 알려야 한다고 믿는데 그 방법을 몰랐던 겁니다."

장애인에 특화된 글쓰기 수업 인기
 
한 독립운동가였던 어르신이 보관하고 있었던 일제강점기 시대 사진
 한 독립운동가였던 어르신이 보관하고 있었던 일제강점기 시대 사진
ⓒ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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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클스토리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김유리씨는 지적장애 3급입니다. 그는 동대문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자서전 쓰기 수업을 수강했다가 뭉클스토리와 함께하게 됐습니다. 

"첫 수업 때 김 작가가 쓴 시를 보고 풍부한 감수성에 깜짝 놀랐습니다. 말할 때 상대가 약간 어눌하게 느낄 수 있어서 인터뷰를 직접 하지는 않고 있지만 녹음된 파일을 정리해 초안을 작성하고 일련의 모든 과정에 참여합니다."

정 대표는 "장애인분들은 자기표현 욕구가 강하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는 곳이 없다"며" 장애인들의 소통 창구인 '장판'에서 소문이 나면서 강의 요청이 꽤 들어온다"고 덧붙였습니다.
  
뭉클스토리는 장애인들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그림카드, 큐브 놀이처럼 다양한 교구를 개발 중입니다.
  
재능기부 소모임에서 출발 사회적기업으로 성장
 
장애인에게 특화된 글쓰기 교실을 진행 중인 정대영 대표. 그는 국어과 교사 출신이기도 하다.
 장애인에게 특화된 글쓰기 교실을 진행 중인 정대영 대표. 그는 국어과 교사 출신이기도 하다.
ⓒ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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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클스토리의 시작은 정 대표가 2012년 '부모님의 자서전을 써드리자'라는 재능기부 형태의 소모임에서 출발했습니다. '뭉클'이란 이름 아래 4년간 25명의 회원이 활동했지만 재능기부의 형태로는 한계에 부딪혀 휴지기를 가졌지요.

1년여 후 이민섭 대표가 동참 의사를 밝히면서 사업화를 추진했고, 2017년 사회적기업 육성사업에 선정되면서 예비사회적기업이 됐습니다.

"자서전이란 것이 극히 개인사일 수 있지만 그분들을 품어줄 수 있었던 사회가 있었기에 가능한 '공적'인 영역이 있습니다. 이를 잘 구현하기 위해서는 수익성을 쫓기보다 많은 사람에게 '우리 모두의 아버지·어머니'라는 공감대가 필요했고 그런 면에서 사회적기업이 저희와 잘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시시한 인생이란 없다
 
지난 연말 할아버지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어린이가 자서전을 어루만지고 있다.
 지난 연말 할아버지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어린이가 자서전을 어루만지고 있다.
ⓒ 뭉클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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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클스토리의 취지는 단순합니다. 자서전을 통해 부모님을 좀 더 이해하고 그분들의 경험들이 한 세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 세대로까지 계속 이어지도록 하는 겁니다. 

"모든 사람에겐 배울 점이 있습니다. 타산지석, 반면교사로 삼을 수도 있고요. 이 일을 할수록 평범한 분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대외적으로 명성을 가진 분들 보다 더 많은 울림을 가져오는 걸 체험합니다. 평범한 부모님들이 용기 내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님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에 충격받아 '뭉클'을 시작했다는 정 대표는 가정마다 책장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을 기록한 자서전이 한 권씩 꽂혀 있으면 좋겠다는 그림을 그려봅니다.

"자서전 하면 많은 일을 일궈낸 사람들이 쓰는 이야기란 인식이 아직도 강합니다. 시시한 인생이란 없습니다. 그거 아세요? 자녀들이 힘들거나 방황할 때 부모님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말이죠."

뭉클스토리: http://moonclestory.com

글. 백선기(이로운넷 책임에디터)
사진. 이우기(사진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가 격주로 발행하는 온라인 뉴스레터 '세모편지'에도 실립니다.


태그:#사회적경제, #뭉클스토리, #부모님, #자서전, #세대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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