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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신기철
 저자 신기철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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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기사] "국가기관이 재판 없이 민간인들을 총살했다"

- 온갖 테러, 암살, 학살을 마다하지 않고 이승만 정권을 유지시켜온 핵심 권력기구였던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1950년 9.28 서울수복 후 부역자 처리과정에서 우익인사들까지 학살당한다는 제보를 받고 금정굴 사건에 개입했다. 뒷전에서 부역자 처리를 총괄했던 조직이 수많은 국민들이 죽어 나간 뒤에야 비로소 부역자 처리과정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이승만 정권은 모든 부역자를 법적으로 재판을 통해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수도권에서 검찰에 의해 조사를 받았다는 기록을 보면 그 시기는 예외 없이 10월 말부터로 나타난다. 금정굴 등 고양경찰서의 학살이 10월 6일부터 25일까지로 나타나고, 합동수사본부가 금정굴 사건에 개입한 시기는 10월 22일이다. 마치 불법학살의 시기가 10월 25일을 기점으로 합법처형의 시기로 변화되는 것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이승만 정권 스스로 법 절차 이전의 학살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등 제2차 세계대전의 수복사례와 비교해 보더라도 수복지역의 치안확보 후 학살의 기간을 보면 암묵적인 인정이라고 하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 길다. 혼란기가 일주일을 넘기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20일을 넘기는 이승만 정권의 부역자처리는 고의나 정책이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권위가 약했던 수복초기 혼란시기에 학살사례가 오히려 드물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한국전쟁의 본질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공산당이었다면 부모형제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하라'

- 이승만 정권은 수복 후 인공치하에서 '부역'한 사람들은 물론 그 가족까지도 학살했다. 아무 죄도 없는 '부역자'의 가족까지 학살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이승만은 수복을 앞둔 1950년 9월 23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공산당이었다면 부모형제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하라'고 발표한다. 대통령의 이런 태도가 군과 경찰의 말단까지 전파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처단의 의미가 곧 살해를 의미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당시 폭력적 상황은 이를 허용하는 신호로 작동했을 것이다.

군과 경찰에게는 부역혐의의 경중을 가려 세 등급으로 구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런데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잡아 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부역혐의를 차등 적용했을까? 당시 법체계로 보더라도 이를 적용할 수 없다. 재판을 받은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나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처벌된 경우는 한 건도 발견하지 못했다.

현실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가혹했다. 끌려온 사람이 당사자가 아니라 그 가족인 경우, 풀어주지 못할 바에는 오히려 재판으로 가기 전에 학살하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이 학살당했는데 정작 부역혐의 당사자는 재판받고 살아남는 경우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제 국가가 그 책임을 지어야 할 때다

- 더욱이 이승만 정권은 학살된 당사자 소유는 물론 가족의 재산, 심지어 옷과 이불까지 몰수했다. 이런 학살 희생자와 그 가족, 친인척의 가산몰수는 불법적인 권력의 약탈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는 재산수탈과 관련된 사례를 르완다 학살에서 봤다. 죽은 자의 재산을 죽인 자에게 분배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별다른 살해명령 없이도 거리낌 없이 학살을 저지르더라는 보고였다. 재산수탈의 기회를 얻는 것이 집단살해에 동참하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는 건데, 우리의 경우도 학살 후 토지분배의 사례를 보면 이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학살의 경우, 구체적 사례를 보면 유대인학살 후 재산탈취와 비슷해 보인다. 국가의 적이었으므로 그들의 재산을 국유화하겠다는 시도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군과 경찰의 활동을 지원한다며 각 시군구마다 시국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이들이 희생자들의 재산을 탈취, 처분하여 그 돈으로 국가 활동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희생자의 친인척이나 가문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인지 일부 가재도구를 돌려주기도 했지만 토지의 경우는 달랐다. 국가가 경작 등 토지이용을 관리하면서 그 농산물을 세금으로 걷었다. 극히 드물지만 1960년대에 희생자의 유족들이 이 토지를 돌려받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온건 점유 20년'을 주장하는 시효취득 경작자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문제는 이들 경작자나 점유자들 대부분이 학살에 가담했거나 방조한 사람들이라는 주장이 있다. 지역사회가 서로 짜고 토지소유권을 수탈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토지를 되찾으려던 유족들의 소송시도는 번번이 패소했으며 '목숨 건진 것만이라도 고맙게 여겨야지'라는 협박을 당했다. 희생자 유족들이 토지를 빼앗기게 된 원인은 국가의 위협 또는 방조였으므로 이제 국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수복 후 어떤 부역자들은 인민공화국 시대에 있어서의 자기의 부역행위를 잘 아는 죄 없는 사람들을 거꾸로 '부역자'로 몰아서 일부러 잡아다가 학살한 사실도 있을 것 같은데?
"앞에서 질문했던 태극단을 보면 그 성원들이 민주청년연맹이나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들과 함께 치안활동에 가담한 의용경찰대를 보면 모순된 성격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데, 이들 중에는 인민군점령기 자위대장, 민청위원장까지도 있었다. 그래서 목격자들은 '진짜 빨갱이들이 수복 후 학살을 저질렀다'라고도 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나는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반 청년들에게 목숨을 내걸 확고한 신념을 요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수복한 이승만 정권은 진짜 부역자들을 통해 부역자 명부를 작성하게 하고 총살에 동원했다. 자신들은 피난했으므로 누가 부역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학살가담은 '자기 죄를 아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다. '살해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는 고양경찰서, 즉 국가의 협박에 굴복한 것이다."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고 은폐한 당사자가 검찰이었다

- 수복 후 금정굴에서 민간인들이 불법 학살당한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검사들은 당시 무슨 일을 했나? 즉 학살목격자의 진술과 학살가해자의 자백에 이어 학살현장에서 희생자들의 시신 등 명백한 증거를 확인한 검사들은 그 후 학살가해자들을 단죄했나? 단죄를 제대로 안했다면 그 이유는?
"좌익사건실록에 기록된 금정굴사건의 이름은 '민청 경기도 고양군 중면 일산리 양민학살 사건'이다. 고양경찰서가 지휘한 민간인학살사건이 검찰의 조사를 통해 민청이라는 좌익조직이 양민을 학살한 사건으로 변질되었다. 학살주체인 경찰이 빠졌고 경찰의 지휘를 받던 약간의 민간치안조직원들이 부역조직인 '민청'원이 되어 처벌받았다. 이렇게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고 은폐한 당사자가 검찰이었다. 검사는 은폐의 과정을 담당한 국가범죄의 공범자들이었던 것이다."

- 그동안 방관하던 고양시가 금정굴 현장보전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금정굴은 어떻게 보전되어야 할 것으로 보는가?
"금정굴의 위령사업을 반대한 세력은 곧 이명박, 박근혜와 운명을 같이 해온 세력들이다. 오랫동안 이들과 싸워 온 유족들로서는 '촛불혁명'에 함께 해왔고 그 결과 조례제정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금정굴은 원형으로 보전돼야 하며, 발굴된 유골은 영구안치, 유품은 시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의 교훈으로 남겨져야 한다. 나는 유품을 중심으로 평화박물관이 건립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한국당 세력들은 유골의 현장부근안치를 두고 주민들에게 악선전을 하고 있다. 납골당이 들어온다는 거짓뉴스를 배포하는 것이다. 박물관 지하에 추모관 형태의 수장고를 둘 수 있겠지만 유골안치는 전적으로 유족들께서 결정하실 문제라고 생각한다."

- 금정굴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음이 지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 드러났다. 각 사건 지역유족들의 소송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고 조례가 제정되면서 미흡하나마 위령사업도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상황에 대한 평가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의 완성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는가?
"국가차원에서 2010년 이래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뿐 아니라 과거청산 시도가 중단됐지만 민간차원에서는 꾸준히 활동을 계속해왔다. 광역지자체 14곳과 기초지자체 54곳에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권고한 후속조치를 수행하고 있다. 비록 위령제와 위령탑 건립에 그치고 있지만 점차 학문적 영역으로 확대될 것으로 판단한다.

진행속도가 더딘 것은 지난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성과가 전국 단위에서 집대성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 원인이야 조사자체가 전국적 관점에서 진행되지 못한 것에 있지만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사건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에도 원인이 있다고 본다. 축적되었던 지난 자료들도 국가기록원에 묻힌 채 쉽게 꺼내볼 수 없다는 처지도 여기에 한 몫 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가장 빠른 방법이 국가차원에서 중단된 과거청산 활동의 재개, 즉 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후속조치를 담당할 과거사기구의 설립, 국제적 인권평화 네트워크의 구축까지 이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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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