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떤 사람을 논할 때 가장 처음 말하는 건 보통 첫인상이다. 그에 뒷받침하는 객관적 사실들은 그 다음이다. 그 사람이 언제 어디서 상을 받았고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를 미리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라고 명확하게 지칭할 때부터 이미 '그 사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감독이 <희생>을 만들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감독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다. 하지만 우리가 <희생>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이고 칸에서 여러 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타르코프스키라는 이름이 없다면 그 영화와 감독의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약 타르코프스키라는 첫인상이 없다면 그 영화에 대한 맹신 또한 없을 것이다. 우리가 타르코프스키를 어떤 느낌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의 영화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맹신이 생긴다. 그리고 그 길은 웬만해서는 변형되지 않는다. 
 
 영화 <희생>의 한 장면

영화 <희생>의 한 장면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왜곡된 길이라 해서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다

물론 감독을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았다고 해서, 감독을 떠올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분명 영화와 감독은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것이기에, 그 영화는 감독의 의도대로 이미 변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양쪽의 관계는 더욱 명확하다. 부모와 자식이 닮았지만 독립된 존재로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분명 영화는 감독의 것이지만 감독에게만 귀속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양쪽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 확실하고, 그중에서도 감독의 영향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나는 타르코프스키라는 사람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의 영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타르코프스키는 과연 어떤 자식을 만들어 냈을까? 그는 어떻게 자식(영화)을 교육했을까? 

타르코프스키의 순례길

타르코프스키를 말하려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온 것은 그의 영화가 첫인상에 깊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치는 오마쥬이기도 하다. 타르코프스키는 <스토커>의 처음 한 시간을 일부러 의미 없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스토커> 영화의 본편이 시작되기 전에, 약 한 시간 동안의 허우적댐이 스크린 위에 나타난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 기찻길을 따라 스토커로 접근하는데, 영화 전개상으로 굳이 없어도 될 시간이다. 말하자면 타르코프스키는 그 죽은 시간을 일부러 삽입했다. 그리고 그는 그에 대해 "이 지루함을 버티지 못하는 사람은 내 영화를 볼 자격이 없다"라고 말했다. 
 
 영화 <향수>의 한 장면 ⓒ 타르코프스키

영화 <향수>의 한 장면 ⓒ 타르코프스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타르코프스키의 이와 같은 발언은 그가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마도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영화를 아무나 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듯하다. <스토커>와 비슷한 일화가 <솔라리스>에도 있는데, 영화의 중간에 주인공이 자동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은 영화상에서 필요하지만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길다. 카메라는 자동차 안의 주인공을 롱테이크로 잡는데, 사실상 시작과 도착 부분만을 보여주면 될 일이다.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긴 시퀀스이고, 타르코프스키는 그 이유를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느낌을 받기엔, 그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이다. 

시간. 롱테이크로 대변되는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시간은 단순히 길기만 한 게 아니다. 자신의 일기장에 순교라는 이름을 붙인 그답게, 그의 롱테이크는 카메라의 순교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그런 생각으로 줄곧 힘겹게 나아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게 타르코프스키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무언가를 연상한다는 쪽의 생각은 아니다.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는 순교의 시간이란, 현실과 동화되어 그저 하염없이 나아가기만 하는 실재로서의 시간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한 명의 순례자로서 타르코프스키가 인도하는 성지를 향해 조용히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우리는 걷는다. 걷는 것도 힘든데 무언가 생각할 여지는 없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것은 고난의 행군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타르코프스키의 롱 테이크를 한 폭의 그림이라고 말하곤 한다.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 무척 아름답기 때문이다. 멈춰 있는 듯한 시간이 그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게 좋은 경험은 아닌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의 영화는 몹시 지루하다. 우리는 분명 그의 영화 도입부에서 무언가 간단히 흘러가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말하자면 첫인상이 좋지 않다. 그래서 나는 만약 누군가가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진정으로 좋아한다면 그가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 누가 고된 순례길을 좋아하겠는가? 신앙 깊은 신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영화 <스토커>의 한 장면

영화 <스토커>의 한 장면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그러나 우리는 신자가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타르코프스키의 신자가 된다. 우리가 그에게서 받은 그다지 좋지 않은 첫인상은 금세 잊힌다. 무엇으로 잊히는가 하면, 영화의 첫인상이 감독의 첫인상으로 잊힌다. 이 영화에서도 우리는 감독이 영화에 우선한다는 공식을 확인한다. 만약 타르코프스키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지루하기만 했을 이 영화들이, 타르코프스키라는 이름을 부여받아 새롭게 발견되는 모습을 본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영화가 감독의 이름에 의존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감독의 첫인상이 영화의 첫인상을 실시간으로 변화시키는 모습을 목격하는 중이다. 

그 마법 같은 순간이 바로 우리가 타르코프스키의 신자가 되는 이유다. 타르코프스키가 아니었을 때 그저 시간의 봉인에만 불과했을 영상들이다. 하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순교는 그 봉인된 시간을 가슴 속에 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영화가 시간의 봉인이라고 말했지만, 감독이 영화보다 우선하기에 그는 봉인된 시간을 가슴에 품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품은 시간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들푸른 고향의 평원. 그곳에서 뛰놀던 자신의 유년기와 시를 쓰던 아버지의 뒷모습.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영화의 이미지를 곧이 곧대로만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스크린 위의 첫 인상이 사실은 감독이 품은 첫 인상의 '변형'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말 그대로, 그것이 첫 인상의 변형이기에 우리가 본래의 인상을 추측하는 것은 간단하다. 감독이 친절하게 말해주었듯이, 타르코프스키 영화는 이미지의 나열이다. 그는 아버지를 뒤를 이어 시인을 자청했으며, 그가 영화감독이었기에 영상 시인이 되었다. 시는 추상적인 이미지의 나열이라는 점에서 두서가 없지만, 그 아름다움은 세상 어느 것에도 비견할 만하다. 그리고 또한, 시는 시인이 세상을 바라본 첫인상이라는 점에서 영화와 감독과의 관계에도 대응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를 영상 시인으로 자청한 것은 단지 계승의 목적만은 아닌 것 같다.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시인은 시를 쓴다. 시인은 세계에 대한 첫 인상을 문자로 기록한다. 그래서 시는 시인이 있어야만 쓰여진다. 그 반대의 경우, 시의 첫 인상이 시인을 기록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시는 마치 일회용 기록 매체와도 같아서, 한번 기록되면 다시 쓰이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각인이다. 하지만 어느 화면, 어느 스크린을 통해 나타나는지에 따라 우리가 받는 느낌이 다르다.

말하자면 같은 시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시는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읽는 이가 시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시인의 세계도 달리 보이기에, 시에 대한 느낌이 달라진다. 말하자면 시는 시인의 세계, 그 자체이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공표된 시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시인의 이름이 시에 각인되고, 그 첫 인상은 영원한 것으로 남는다. 결국 시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남는 영원함이다. 바로, 세계와 사람에 대한 영원함이다. 

영상 시인의 영화는 바로 그렇게 보아야 한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아달라며 신신당부했다. 하기사, 그렇게 길고 지루한 영화는 모니터나 스마트폰에서는 온전히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의도대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스크린 위에서만 보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영상 시인이 최초로 사용한 종이를 우리가 되새기는 방법이다.

어쩌면 문자에서 영상으로의 시대 변화를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이 변화는, 반대로 그가 말하는 이미지가 문자로 변형됨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가 바라보는 그대로 문자로 번역된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전반에 걸쳐 느껴지는 안개 같은 색감은 뿌옇게 보이지 않음을 뜻하고, 길고 긴 롱테이크는 현실의 시간을 관객과 물화시키려는 시도다. 말하자면 이 롱테이크는 그가 종이 위에 글자를 적어 내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 <거울>의 한 장면

영화 <거울>의 한 장면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타르코프스키가 시를 써내려 간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첫 인상이 한 편의 시가 된다. 그 시가 영화라는 매체로 변환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타르코프스키는 유년기의 행복한 풍경을 평생토록 간직했다. 그 행복은 타르코프스키가 세상을 마주한 첫 번째였고, 이후로도 줄곧 그의 삶을 견인하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 고향에 대한 향수. 넓고 푸른 들판으로의 회귀. 강을 끼고 언덕을 마주한 작은 나무집. <희생>은 그런 영화다. 죽음을 선고받은 타르코프스키는 드디어 순례길의 마지막을 걷게 된다. 지금까지의 고난이 소련 치하 모스 영화사가 부여한 십계였다면, 이제는 벗어나 제 고향으로의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름답기만 한 무언가도 아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아주 정직했다. 만약 당신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면 가슴 속 어딘가에서 깊은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타르코프스키가 영화를 마주하는 첫 인상이다. 바꾸어 말해, 그 슬픔은 타르코프스키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어쩌면 인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영상 시인, 순교자라는 그에게 붙은 칭호만을 보고 영화에 첫인상을 갖지만, 사실 그는 순교자라는 말이 붙기에는 생각보다 더 거칠었다. 

당신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가 일반적인 순교자처럼 순하게 있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순교자가 순하게 있을 것이라는 말에 오류가 있긴 하다. 어찌 됐든 벼랑 위에 올라서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릴 것만 같이 보이던 그의 첫 인상은 뒷 배경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깨어진다. 타르코프스키는 늘 자신의 영화를 3류 취급하는 소련 영화 당국에 불만이 많았다. 그의 영화는 개봉 예정일보다 한참 일찍 지방의 작은 영화관에 단관 개봉했고, 제대로 된 포스터 하나 없었다. 거기에 제작비도 아주 짜게, 죽어도 내주지 않을 태도로 일관했다. 거기에, 심의는 몇 달이 걸리기 일쑤였고 그마저도 많은 검열을 요구했다. 덧붙여서, 각종 영화제에 출품하기를 꺼려했고 우여곡절 끝에 출품된 그의 작품은 당국이 내세운 작품보다 훨씬 많은 상을 타왔다. 그리고 당국이 내건 작품은 수상하지 못했다.
 
 영화 <안드레이 르블료프>의 한 장면

영화 <안드레이 르블료프>의 한 장면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오로지 <희생>만이 진가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전까지의 영화가 소련하에 만들어진 것이었다면, <희생>은 서방으로 망명한 타르코프스키가 모든 걸 내놓은 영화다. 암을 판정받은 그가 할 수 있었던 순례길의 마지막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많은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지만 당국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단 7편의 작품밖에 만들 수 없었다. 그는 같은 세월 동안 수 배 많은 영화를 만든 다른 감독들을 몹시도 부러워했다. 어쩌면 그런 상황이 그로 하여금 삶에 대한 첫 인상, 유년기의 그 추억을 자꾸만 반복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단 한번이라도 올바르게 해소되었다면 그의 첫 번째 시는 영화 학교 시절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계에 대한 첫 인상을 무덤까지 가져간다. 그의 영화에는 한결같이 알 수 없는 그리움의 정서가 깃들어 있다. 어쩌면 세계에 대한 거대한 비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련 영화 당국을 재수 없는 놈들이라 불렀던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순교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그를 본다. 그는 한 번의 이혼을 겪었고 한 명의 아이를 떠나보냈지만, 그럼에도 새로 얻은 아들에게는 무척 잘해주었다. 이것은 그의 개인사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그저 객관적인 사실일 뿐이다.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일기를 보며 내가 알던 첫 인상과는 너무 달라 놀랐지만, 이내 타르코프스키는 타르코프스키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순교자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순교자였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항상 무언가를 그립게 했고, 나는 여전히 울 수밖에 없었다. 

과연 무엇이 그의 영화를 몹시 그립고 슬프게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에게는 몇몇 장면만이 강하게 남아있다. <희생>의 오프닝에서 멀찌감치 아이와 부모를 바라보는 카메라. 이윽고 활활 타오르는 그들의 집. <솔라리스>에서 주인공이 문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옛 아내와 마주할 때. 그리고 그곳까지 향하던 동경의 택시 안.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이반이 낡은 깡통 안을 가만히 들여 보던 카메라의 구도.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가 그림을 아주 천천히 흩어보는 듯한 시선. 그리고 이 장면들에는 결말을 향해 달려오던 이들이 자신의 소망을 내비친다. 그 소망이 무엇이었을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감정이다. 타르코프스키가 처음 품었었고, 이제는 우리가 품게 되는 첫 인상이다. 
 
영화 타르코프스키 희생 솔라리스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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