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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뉴스보다 훨씬 더 나라를 좀먹는 것은 '가짜 독립유공자'들이다. 이들의 존재는 민족을 모독하고 민족의 영혼을 더럽힌다. 안 그래도 이래저래 왜곡된 우리 역사를 더욱 더 요지경 속으로 몰아넣는다.

3대에 걸쳐 5명이 남의 독립운동 공적을 가로채 유공자 서훈을 받고 연금 및 현충원 안장 등의 특혜를 챙겨온 고 김정수 일가의 거짓 행각이 독립유공자 김진성의 아들인 김세걸씨의 20여 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세상에 드러났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8월 15일 이들 중 4명의 서훈을 취소했다. 이전에 취소된 1명의 서훈과 더불어 다섯 명 전원의 서훈이 이로써 취소됐다. 뒤늦은 일이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일이 이번으로 끝이 아니라 시작이 돼야 한다. 현충원에 잘못 누워 있는 가짜들과, 수십 년간 연금과 혜택을 챙겨온 유족들에 대해서도 응분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인도 비웃은 한국의 '가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유공자 중에 가짜가 많다는 지적은 1990년대부터 제기됐다. 중국 국민당 군대의 일원으로 한국 광복군에 대한 지원 업무를 총괄했던 왕지셴(王繼賢) 전 상교(上校, 대령)의 입에서도 증언이 나왔다. 그는 한국 독립군의 실태와 인원을 점검하는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독립투사 개개인의 이름은 잘 몰라도 그들이 어떤 단체에 소속돼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1994년 8월호 월간 <말>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일본군에 있던 한국인 91명이 중국에서 비호대란 단체를 결성한 뒤 중국군 9전구 사령관의 요청을 받고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이냐?'는 요지의 질문에 대해 "비호대란 단체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는 자기 같은 정보장교도 9전구 사령관을 만나기 힘들었으며 한국 광복군 중에도 만난 이가 거의 없다면서, 그런 주장은 "거의 상상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검증되지 않은 단체명을 들이대며 독립유공자 행세를 해온 이들이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대만성 행정장관공서(行政長官公署)가 발행한 한국 독립군 명단인 <한국임시정부 및 광복군 관할 각부 인수(人數)표>를 근거로 박주대가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사실과 관련해서도 그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라며 "대만성 정부나 대만성 행정장관공서는 광복군 관련 자료를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명료하게 말했다.

대만성 행정장관공서가 있었던 시기는 국민당 군대가 대만으로 쫓겨나지 않고 대륙에 있었을 때이므로, 그 시기에 대만(타이완)섬 행정관청이 광복군 자료를 발행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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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실관계를 확인해주는 것에 더해, 그는 한국에서 가짜 독립투사들이 대거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언급했다. 일제 패망 직후에 일본군 출신 한국인들이 광복군에 들어가 '신분 세탁'을 하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일본군 투항 후에 광복군에 편입된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들로부터 문제가 비롯됐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을 광복군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광복군을 상대했던 중국인의 몇 마디 말로도 가짜 유공자가 손쉽게 판별된다는 것은, 그동안 보훈처가 기본적 사실관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서훈을 추진한 사례가 적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친일파가 친일파를 심사하는 아이러니

이게 다가 아니다. 가짜 유공자가 양산된 것은 단순한 행정 착오의 문제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구조적 문제다. 친일파가 독립군으로 둔갑될 만한 구조가 존재했던 것이다.

지금의 독립유공자 포상제도는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정부 기능을 수행할 때인 1962년부터 제도화됐다. 그런데 이때부터 유공자 선정 과정에 항상 개입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친일파들이다. 친일문제 전문가인 정운현이 중앙일보 기자 시절 1990년 12월호 월간 <말>에 기고한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들'이란 글에 그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첫 정부 포상이 실시된 1962년의 문교부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위원회 위원 7명(위원장 포함) 중에는 신석호·이병도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이병도.
 이병도.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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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방 뒤까지 활동한 친일 역사학자다. 일제 때는 한국사 왜곡을 담당하는 조선사편수회(총독부 직속)에 참여했고, 해방 뒤에는 식민사관을 그대로 지켜내는 데에 큰 '공로'를 세웠다. 신석호 역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한 역사학자다.

독립유공자 심사 과정에서는 아무래도 역사학자의 발언권이 높을 수밖에 없다.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거물급 역사학자들이 포진했으니, 심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렀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1962년에만 이랬던 게 아니다. 친일파들의 활약은 계속 이어진다. 정운현 기자의 글에 나오는 또 다른 대목들이다.
 
"1963년에는 내각사무처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를 맡았다. 그런데 심사위원 22명 중 이때도 고재욱, 신석호, 유광렬, 이갑성 등 4명의 친일 인사가 끼었다."

"1968년에는 총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를 맡았는데, 역시 위원 21명 중 고재욱, 백낙준, 신석호, 유광렬, 이병도, 이선근, 홍종인 등 7명의 친일 인사가 들어 있다."

"1977년도에는 원호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가 심사를 맡았는데, 심사위원 11명 중 친일파 출신으로는 다시 유광렬·이은상 등 2명이 들어 있다."
 
친일파들이 독립유공자 후보를 심사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민족에 대한 기본 애정도 없는 그들이 성의 있고 진지하게 심사를 할 수 있었을까? 적당한 선에서 얼른 마무리하려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까? 친일청산 분위기가 고조되면 인생이 망가질 수밖에 없는 그들이, 대중적 스타가 될 만한 독립유공자를 세상에 드러내려 했을까? 친일청산 분위기에 불을 붙일 만한 독립운동가를 심사할 때는, 훨씬 까다롭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서 웬만하면 심사 탈락을 유도하지 않았을까?

이런 가능성들에 더해 또 다른 문제점이 있었다. 친일파 출신 심사위원이 심사 대상자가 친일파인 줄 뻔히 알면서도 독립유공자로 선정해주는 사례가 실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서춘(1894~1944년)의 사례가 그러하다. 서춘은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주필과 경성배영동지회(영국 배척 친일단체) 평의원 및 조선임전보국단(전쟁 지원 친일단체) 평의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침략전쟁을 열심히 응원한 인물이다. 이를 위해 전국 순회강연을 하기도 했던 열혈 친일파다.

그가 서훈을 받은 1963년에는 네 명의 친일파인 고재욱·신석호·유광렬·이갑성이 심사위원회에 들어갔다. 이중에서 고재욱과 유광렬은 서춘의 친일 행적을 모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정운현 기자의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전체 위원 22명 중에서 4명의 친일파(고재욱·신석호·유광렬·이갑성)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중 특히 고재욱과 유광렬이 서춘의 친일행위를 몰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고재욱은 서춘이 평의원으로 참가한 경성배영동지회에서 상무이사를 지냈으며, 또 유광렬은 서춘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평의원을 지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서춘의 친일 행적을 덮어주었던 것이다."
 
친일파가 동료 친일파의 자손들을 챙겨줄 목적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제도를 악용한 사례였다고 볼 수 있다.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을 위한 제도가 이처럼 친일파 상호간의 '의리'를 위한 제도로 악용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들을 심사했으니, 진짜가 탈락하고 가짜가 선정되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친일파 4명뿐 아니라 나머지 18명도 문제가 있다. 이들은 다들 교양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불과 20년 전에 친일 언론활동을 맹렬히 했던 서춘을 몰랐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서춘이 총독부 기관지 주필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전국을 돌며 친일 순회강연까지 했는데도, 그 18명 중 단 1명도 서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친일파 심사위원뿐 아니라 '멀쩡한' 심사위원들도 엉터리 심사를 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정희는 왜 '독립유공자 서훈'을 시작했을까
 
 5·16 쿠데타 당시의 박정희 소장.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사진 왼쪽은 다른 사진.
 5·16 쿠데타 당시의 박정희 소장.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사진 왼쪽은 다른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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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가 독립운동가들을 심사한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이 1962년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친일파 출신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지내던 시절이었다. 독립군 잡으러 다니던 친일파가 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독립유공자 서훈을 시작했으니, 처음부터 이 일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다른 아닌 박정희였다.

박정희가 정말로 독립투사들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벌인 일이 아니라는 점은, 정말로 친일청산을 위해 벌인 일이 아니라는 점은 그의 이후 행적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국민적 반대를 무릅쓰고 1965년 한일협정을 졸속으로 추진하면서, 일본의 침략범죄에 면죄부를 주려 했다. 또 그의 정권에서는 일본과의 불화 가능성을 막기 위해 독도를 폭파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가, 역사청산보다는 한일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 그가, 친일청산 분위기가 확산되면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가, 정말로 진심을 갖고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진했을 리는 없다. 쿠데타로 인한 정통성 부족을 감추고자, 마음에도 없는 민족애를 겉으로라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친일파 정권이 진심 없이 벌인 일인데다가 심사위원회 안에까지 친일파들이 들어갔으니, 유공자 심사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가짜 유공자도 당연히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이 문제는 친일 보수정권, 친일파 출신 심사위원, 친일파 출신 신청자의 삼위일체적 협력 속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랬으니 지난 수십 년간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독립유공자 행세를 하면서 온갖 특혜를 누리고 현충원 묘역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그동안 선정된 유공자 전체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이뤄지는 게 당연하다. 다행히 16일 오늘 국감에서 피우진 보훈처장이 가짜 독립유공자를 가려내기 위해 '유공자 공적 전수조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늦었지만 수십 년간 잘못 지급된 연금도 회수하고 가짜들이 누리던 온갖 영예도 걷어내야 한다. 우리 민족이 더 이상 모욕을 받지 않고 우리 역사가 더 이상 왜곡되지 않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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