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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어느 날 졸업생 연우가 학교로 찾아와 나보고 모델이 되어 달란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친 지가 30년이 지나가지만 아직 마이크를 잡으면 긴장하고, 사진을 찍을 때면 얼굴이 굳어진다. 이런 나에게 모델이라니.

하지만 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답을 했다. 그리고 어떤 모델인지 물었다. 대학 졸업 작품 전시회 때 선글라스를 만들어 출품할 것인데, 그 선글라스 모델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모델을 하겠다고 한 이유는 학교 다닐 때 연우에게 진 빚 때문이다.

내게 모델이 되어달라고 찾아온 제자
 
사진과 달리 내가 깎은 연필은 예쁘지 않아 내심 걱정이었다.
 사진과 달리 내가 깎은 연필은 예쁘지 않아 내심 걱정이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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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를 만난 것은 고3 수업을 하면서다. 나는 옆 반 담임이었기에 수업 시간뿐만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연우와 마주할 때가 많았다. 틈틈이 연우의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성실하고 모범적인 아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나와 복도를 쓰는 모습, 홀로 있는 급우들에게 말없이 다가서는 모습, 그 친구와 밥을 같이 먹는 모습, 수업에 열중한 모습을 보면서 참 예쁜 학생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연우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연우가 미술 대학으로 진로를 결정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내 생각이 매우 잘못된 것이지만 연우는 미술 공부하는 아이 같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용의복장이 단정하고, 학업 성적도 우수했고, 학교생활 또한 모범적이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연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은근히 기대하였다. 흔히 말하는 최고의 대학에 합격하여 학교 명예도 높여 주기를.

그러던 어느 날 연우가 나에게 아주 정중하게 부탁을 한다. 대학 입시에 작품을 출품해야 하는데 스케치용 연필 몇 자루를 주면서 깎아 달라는 것이다. 그 연필로 스케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쁜 학생이 나에게 부탁을 하니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아직 과일 깎을 줄도 모른다. 하지만 정성을 다하여 조심스럽게 연필을 깎았다. 하지만 내가 봐도 깎은 연필이 예쁘지 않아 내심 걱정이었다. 그 연필을 받고 연우는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그리고 수시 발표 날, 나는 연우의 발표를 보기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켰다. 진심을 다해 그동안 노력을 격려하고 축하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연우의 이름은 합격자의 명단에 없었다. 그때 나는 연우의 눈물을 보았다.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내가 어떻게 위로해 주어야 할지 몰랐다. 내가 깎은 연필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

다음 날부터 연우는 마음을 다잡고 정시 준비를 한다면서 실기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미술에서는 최고로 알려진 대학에 합격하였다. 틈틈이 학교로 찾아와 대학 생활도,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대학에 가서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전공에 대한 열정도 자신이 다니고 있는 대학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면서 참 잘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디자인을 위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전공 살리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아픈 현실
  
연우가 만든 선글라스를 끼고 나를 모델로 하여 까페 정원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 연우가 만든 선글라스를 끼고 까페 정원에서 연우가 만든 선글라스를 끼고 나를 모델로 하여 까페 정원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 정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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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에 연우가 자신이 만든 선글라스를 가져 와 나를 모델로 하여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나는 연우의 진로에 대해 물었다. 자신의 전공을 살리지 않고 공무원 공부를 하겠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슬펐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전공을 살리기가 너무 어렵다고 한다.

전공을 인정받기 전까지 흔히 말하는 열정 페이에 시달려야 한다고 한다. 전공 관련 아르바이트를 하다 쓰러진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을 참고 견뎌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아니다. 성공한 자가 모든 것을 다 가져가는 로또가 아니라 성실과 잠재력을 인정받으면서 자신의 꿈을 키워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길 기대한다.

오늘 우리 젊은이들은 열정이 사라지고, 모험적이고 창의적인 것에 도전하기를 꺼려한다는 질타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미래가 어둡다고도 한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 모험적이고 창의적인 것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가지고 일할 수 있나? 그 일을 하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나? 자신의 일에 보람을 가지고 살 수 있나?

그래도 연우는 공무원에 합격하면 자신의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도시 재정비나 설계 같은 부서로 배정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꼭 그렇게 되길 빈다. 연우의 졸업 작품전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연우가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자리를 잡길 바란다. 그리고 직장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려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꾸며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태그:#교육, #정연우, #열정 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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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행복에서 물러나 시골 살이하면서 자연에서 느끼고 배우며 그리고 깨닫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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