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영화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 스틸컷

영화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1.
보통 중독된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을 많이 갖고 있지만, 사실 중독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대상에 중독되느냐에 따라 이로울 수도 있고 해로울 수도 있다는 뜻이다.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동일한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느냐, 활용할 수 있는 의지나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 대상의 상태나 심리가 어떤 방향을 지향하는가 등에 따라 그 결과는 언제든지 변할 가능성이 있다.

중독이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이 제 아무리 긍정적인 중독에 빠져있다고 하더라도, 언제 그 중독적 상황의 방향이 바뀔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무언가에 빠져있는 동안은 그 변화의 크기와 무관하게 스스로 빠져나올 결심을 하기가 매우 힘들다. 심지어는 빠져 나왔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마음을 내어주고 마는 일들이 허다하다.

프랑스 출생의 마리 몽쥬 감독이 연출한 첫 번째 작품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는 두 남녀가 보여주는 어둡고 진한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우리가 중독되는 것들에 대해 그려나간다. 사랑, 사람, 도박, 그리고 돈과 같이 실제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중독되기 쉬운 것들 말이다.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처절한 이야기와 한때 파리에서 성행했던 사설 불법 도박장을 서성이는 이들의 모습을 함께 녹여내고자 한 것이 이 작품의 첫 걸음이라고 감독은 말한다.

02.
아버지를 도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엘라는 성실한 삶을 이어나가는 인물이다. 식사 시간마다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손님들을 상대하는 것이 버거워 다른 생활은 꿈꾸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 그녀의 삶에 아벨이 나타난다. 새 직원을 구하던 레스토랑에 갑자기 찾아온 그 남자. 즉흥적이고 열정적인 그의 모습에 엘라는 조금씩 빠져들게 되고, 아벨을 따라 이전 삶에 없었던 경험들에 중독되어 가기 시작한다.

이 작품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인물이다. 연인의 사랑을 그리는 작품이기에 엘라와 아벨 두 사람의 성격과 행동이 극의 흐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다. 사랑을 이용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지만 그 사랑에 다시 목이 메고 마는 남자와 믿었던 사랑에 몇 번이나 배신을 당하면서도 끝내 그 사랑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이 작품에서 일정 부분 누아르 장르에서의 남녀 관계가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다만 두 사람의 역할이 바뀌어 주어져 있다는 것이 포인트. 기존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남성 캐릭터가 매력적이지만 나쁜 목적을 갖고 있는 역할을 부여 받고, 그를 구원하기 위한 존재로 여성 캐릭터가 존재하게 된다.
 
영화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 스틸컷 영화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 스틸컷

▲ 영화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 스틸컷 영화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3.
아벨은 엘라를 만나기 전부터 돈을 쉽게 보는 것에 중독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도박과 내기. 그를 도박에 빠진 인물이라고 한정해 표현하지 않는 까닭은 처음 엘라에게 접근했던 방식이 – 아르바이트 첫날 그는 가게의 돈을 훔쳐 달아난다. – 결코 처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능숙함은 물론 후반부에서 '너는 이제껏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라고 고백하는 내용을 통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를 따라 도박을 시작하게 되고, 이제껏 한번도 쓰지 않았던 방향으로 돈을 쓰게 되는 엘라 역시 도박에 빠진 인물이라고 표현하기는 힘들다. 처음에 돈을 따기 시작하면서 도박의 맛에 눈을 뜨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녀에게 중요한 건 도박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보다는 아벨과 함께 시간을 나누는 것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엘라는 평생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깊고 농밀한 사랑을 아벨을 통해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04.
물론 아벨 역시 그런 엘라를 속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사랑했고 좋아했다. 그래서 청혼했고, 도박 출입 금지를 스스로 요청한다. 이것은 전에 없었던, 그녀와 진짜 사랑을 나눠보고자 하는 그의 의지다. 그런 그의 앞에 등장하는 사채업자. 현재 그의 모습과 의지가 어떠한 지와는 무관하게 그가 과거에 저지른 행동들의 결과가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까지 아벨을 놓을 수 없는 엘라는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면서까지 그를 도우려고 하지만, 아벨은 다시 한번 그녀를 버리고 혼자 도망쳐 버린다. 처음에 그녀 앞에 나타났던 날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돈을 모두 훔치고서. 그렇게 아벨의 모든 빚은 엘라에게 남겨지고, 아벨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엘라의 삶 또한 자신의 과거 행적에 묶이게 된다.
 
영화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 스틸컷 영화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 스틸컷

▲ 영화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 스틸컷 영화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5.
하지만 유혹은 다시 한번 시작된다. 아벨이 그녀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 것. 그가 남긴 것들에 고통 받던 엘라의 곁으로. 엘라는 커다란 분노를 안고 그를 만나러 가지만, 그의 진심 앞에 다시 한번 무너지고 만다. 중독이다. 이미 두 사람은 서로에게 중독되어버린 것이다. 어떤 대상이 아니라, 사람, 감정과 같은 더 깊고 어두운 것들에.

유혹하는 자와 유혹당하는 자. 그 유혹에서 먼저 깨어나는 자와 끝까지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 유혹의 결과물을 지고 가려는 자와 그러지 못하는 자. 누가 먼저고 누가 나중임을 헤아리고 증명하는 일이 무엇이 중요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무엇이 남아있는가 하는 것이다. 뜻하지 않은 남자의 고백에 엘라의 마음이 다시 한번 무너지는 까닭 역시 바로 그 때문이다. 사랑. 아직 발이 모두 채 꺼내어지기 전에 잡혀버리고 말았다.

06.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 불의 뜨겁고 위험하지만 따뜻한 속성이 이 타이틀 속에 모두 담겨 있다. 영화 속 두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기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은 표현이다. 온난하고 포근하지만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어느 순간 자신이 다칠 수밖에 없는 것. 허나,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진 후에야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오승욱 감독의 <무뢰한>(2015)이 떠올랐다. 어떤 지점이 정확히 닮았다고 비교하기는 모호한 구석이 있지만, 두 작품이 보여주는 분위기나 인물의 관계가 꼭 닮아 있는 느낌이었다. 어느 한 쪽이 모든 것을 지고 파멸하지 않으면 그 어느 쪽도 살아남을 수 없는 지독한 사랑이야기라는 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문제작 가운데 하나인 <님포매니악>에서 주인공 조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스테이시 마틴의 매혹적인 연기를 만나볼 수 있는 것도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다. 사랑에 빠진 그녀의 모습과 아벨의 나쁜 사랑에 중독되어 가는 그녀의 모습의 극단적인 차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랑에 함께 빠져들게 되는 것만 같다.

우리는 종종 행복한 순간이 아니라 비극적인 장면 속에서 큰 사랑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이 작품 <트리트 미 라이크 파이어>처럼 말이다.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트리트미라이크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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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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