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11 08:35최종 업데이트 18.10.11 08:35
진명여자고보 미술교사 효자동 이한복

한국 근대 동양화단을 대표하는 10대가 중의 한 명인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 1897-1944)은 보통 '진명여고보 이한복'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는 화가가 안정된 직장을 갖기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이한복은 고종의 후궁인 엄비(嚴妃)가 세운 경복궁 옆 창성동에 있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아래 진명여고보)의 미술 선생으로 재직하고 있어 그의 별명처럼 불린 것이다.
 

진명여고보 창성동 교사 ⓒ 황정수

 
당시 경성에 있는 학교의 미술 교사는 대부분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일본인들이 맡아 하였다. 이한복 또한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 출신이라 한국인임에도 진명여고보에 재직할 수 있었다. 그는 직장에서 멀지 않은 칠궁(七宮) 앞에 살았다. 실제 주소는 궁정동 40번지였으나, 사람들은 보통 '효자동 이한복'으로도 불렀다. 당시 그의 서화에 대한 명성이 높아 서촌 지역의 상징적인 인물 대접을 받았다.

보통 일제강점기에 서촌을 대표하는 동양화가로 누하동에 살던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을 꼽았다. 그는 동아일보에 근무하며 조선미술전람회(아래 조선미전)의 심사참여를 하던 거물이었다. 또한 '청전화숙(靑田畵塾)'이라는 조직을 가지고 있어 많은 화가 지망생들이 그를 따랐다. 그런데 이한복과 이상범은 안중식(安仲植, 1855-1921)이 이끌던 서화미술원 동문으로 1년 선후배 사이였으나 동갑이라 친구처럼 편하게 지냈다. 더욱이 효자동과 누하동은 지척이라 서로 오가며 가까이 했다.


안중식과 조석진(趙錫晉, 1853-1920)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화단은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와 이상범으로 양분하는 분위기였다. 많은 화가 지망생들이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이한복은 이들과는 다른 방식의 미술활동을 하였다. 그는 교직 활동을 하며 주로 서화골동 수집과 고미술을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의 서화 감식안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는데, 특히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작품에 대한 품평은 당대 최고 권위자 중의 한 명이었다.

일본 유학한 한국 최초의 동양화가
 

서촌 지역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이한복 ⓒ 황정수

 
이한복은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매우 특별한 지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1912년 동양화 전공자로는 처음으로 도쿄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난 한국인이다. 서양화가로서는 그에 앞서 1909년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 처음으로 도쿄미술학교로 떠났지만 동양화가로서는 이한복이 처음이었다. 당시 동양화가들은 조선조에서 내려오는 전통이 있는데다 안중식과 조석진이라는 걸물이 있어 굳이 유학 갈 생각을 하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이한복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서화협회에서 배운 학습에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미술 세계를 체험할 필요성을 느낀다. 한국의 구태의연한 도제식 미술 교육을 벗어나 근대식 미술교육을 배우고 싶어 한 것이다.

이한복은 도쿄미술학교에서 가와이 교쿠도(川合玉堂, 1873-1957)와 유키 소메이(結城素明, 1875-1957) 등 일본화가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특히 그들이 일본 미술과 서구 미술을 혼성하여 만들어낸 '신남화(新南畵)'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신남화는 남종화의 전통에 원근법과 같은 과학적 미술 기법과 수채화와 같은 맑은 색채 감각을 발휘한 그림이다.
 

이한복 ‘엉컹퀴’ ⓒ 이한복

 
이한복은 귀국하여 서화협회 전람회에 지속적으로 참가하고, 1922년에 창설된 조선미전에서는 제1회부터 8회까지 계속 출품한다. 특히 제3회 조선미전에서는 동양화 부분의 '엉컹퀴'와 서예 부분의 '전서 대련'이 모두 2등상을 받는 기염을 토한다.
 

‘전서 대련’ ⓒ 이한복

 
1920년대 청년작가 시기의 이한복 작품은 근대적인 일본화풍과 서양화법에 자극을 받은 현실적인 시각의 기법과 사실적이며 정감 있는 채색 표현을 주로 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작품은 일본화풍이 농후해 국내 화단에서 친일적 요소로 비판받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한복 ‘금강산도’ ⓒ 간송미술관

 
그러나 1930년 무렵부터는 전통적 한국화 취향으로 돌아와 수묵담채의 산수화와 화조화를 온건한 필치로 그렸다. 이때 많이 그린 대표적인 소재가 금강산인데, 이들 작품은 매우 감각적인 필치를 보인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표현 감각을 가진 화가로 평가할 만하다.

1940년 오봉빈(吳鳳彬, 1893-?)이 운영한 조선미술관에서는 당시 저명한 10명의 동양화가를 선정하여 '10명가산수풍경화전'을 개최한다. 이때 이한복도 함께 선정되어, 지금까지도 '근대 10대 동양화가'로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영예도 잠시 1944년, 48세의 일기로 홀연히 세상을 떠난다. 그동안의 미술자료에 이한복이 세상을 떠난 해가 1940년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은데, 이는 미술사의 오류이니 수정해야 한다.

이한복의 추사 김정희에 대한 애정

이한복은 동양화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일가를 이룬다. 그는 일본 유학 중에 일본의 저명한 서예가로 청나라 오창석의 제자인 다구치 베이호(田口米舫, 1861-1930)에게 서예를 배운다. 다구치 베이호는 조선미전 심사를 위해 네 번이나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어, 이미 이한복과는 안면이 있는 서예가였다. 이러한 사제관계의 인연으로 이한복의 글씨는 오창석의 필체에 기반을 두게 되고, 주로 전서에 전념하게 된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 매료되어 '추사체'를 연구하고 자신의 서예 작업에 참고하기도 한다. 여러 잡지에 김정희의 글씨에 대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의식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당시 추사 연구에 일가를 이루던 경성제국대학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 1879-1948)와도 교분이 깊었는데, 그가 이룬 연구 성과 중 상당 부분은 이한복의 도움에 따른 것이었다.
 

김정희 ‘무호당’ ⓒ 케이옥션

 
이한복 주변의 이야기 중 가장 흥미 있는 부분 중의 하나가 그의 '호(號)'에 관한 것이다. 그의 젊은 시절 호는 '수재(壽齋)'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호가 없다'는 뜻의 '무호(無號)'로 바꾸어 쓰기 시작한다. 그의 호가 만들어진 연유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시 항간에 현판과 글씨로 전하는 김정희의 작품 '무호당(無號堂)'을 참고하여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한복 ‘계산무진’ ⓒ 황정수

 
이한복의 김정희에 대한 관심은 '추사광(秋史狂)'이라 불릴 정도로 심하였다. 김정희의 미술세계에 대하여 늘 연구하고 때때로 글씨를 임모하기를 즐겨 하였다. 현재 전하는 그의 글씨 중에는 김정희의 글씨를 임모한 것이 여럿 전한다.

그 중에서도 간송미술관에 전하는 '계산무진(雞山無盡)'을 임모한 것은 김정희의 글씨를 방불케 한다. 이런 정도로 추사체를 구현하려면 김정희의 예술 세계를 깊이 있게 이해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한복의 효자동 집 대악루(對岳樓)
 

이한복 '칠언절구' ⓒ 황정수

 
이한복의 집은 인왕산과 백악산 사이에 있었다. 그 집의 이름을 '대악루(對岳樓)'라 하였는데, '백악산을 마주하고 있는 집'이란 뜻이다. 후지츠카 치카시가 자신의 집 이름을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집'이란 뜻의 '망한려(望漢廬)'라 지은 것과 매우 닮았다. 어느 날 이한복은 대악루에 앉아 한 편의 시를 지어 예서로 쓴다.
 
"멀리 젖어 있는 푸르고 깨끗한 숲들
그려내지 못하는 산속 집은 몇 골짜기나 깊고
한 줄기 휜 구름은 겹친 벼랑에 와서 걸려 있네.
누구와 마주하여 이 가을 정서를 말해볼까?"

遙靑濕翠澹重林 不寫山居幾曲深
一段橫雲來層岸 有人相對話秋心

가을 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집에서 쓴 시이니 백악산 아래에서 인왕산을 바라본 모습일 것이다. 마치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 청운동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구상한 것과 유사한 느낌이 든다.

남종화의 시조인 왕유(王維, 699-759)의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말이 이와 다름이 아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김정희가 통의동에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정선과 김정희와 이한복이 서촌 지역에서 이루어낸 한국미술사의 장면들을 보는 듯하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이한복 작품이 파손된 사건

1925년 제4회 조선미전에서는 출품작이 파손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이 중의 한 점이 이한복의 글씨였다. 관객들이 보고 간 뒤에 점검해보니 글씨에 구멍을 뚫어져 수선해 놓은 것이 발견된 것이다. 이 사건이 문제가 되어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다. 마침 며칠 전에 조각가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의 작품 중 '나체습작(裸體習作)'이 전람회 개회 전에 파손이 되어 문제가 되었는데 연속적으로 또 일어나 큰 문제가 된 것이다.
 

김복진 ‘나체습작(裸體習作)’ ⓒ 황정수

 

이한복 ‘난정서(蘭亭序)’ ⓒ 황정수

 
김복진의 조각은 소녀의 나체를 소재로 작업한 것이었는데, 어느 괴한이 고의로 한 쪽 팔을 부러뜨렸다. 작가가 다시 수리하여 전시하는 것으로 합의가 되어 무마되었다. 그런데 며칠 후 또 다시 이한복이 출품한 '난정서(蘭亭序)' 제 십칠 행의 다섯 번째 글자가 무참히 뚫어진 것을 몰래 다시 때워 놓은 것이 발견된 것이다. 비록 실수라 할지라도 전람회에서 거듭 이 같은 실수를 하게 된 책임을 주최 측이 지어야 한다는 의견이 비등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사자인 이한복은 매우 분개하여 "김복진의 일이 있자 뒤를 이어 또 이 같은 일이 생기니, 비록 고의로 하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같은 실수를 거듭하는 조선미전 당국자의 무책임은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피어나는 조선의 미술계와 겨우 자리가 잡히려 하는 조선미전의 전도를 위하여서라도 당국자의 반성을 촉구할 필요가 있다"며 주최 측을 나무랐다.

이한복에 대한 재평가

이한복은 혼란한 일제강점기에 한일 미술인의 교류를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일본에서 오는 조선미전 심사위원들과도 소통을 하였으며,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화가들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일본인들과 가깝고 일본화풍의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친일 미술인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오히려 김은호나 이상범, 노수현 등이 뚜렷한 친일의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에 비해 이한복은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한 모습을 찾기 어렵다.

또한 이한복은 추사 김정희를 선양하는 등 한국 전통 미술을 수용하려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서양화에 밀려 소외되는 동양화에 대해서도 "조선 사람으로 동양화에 사랑이 적은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다. 일부에서 동양화는 일본화라고 하며 꺼리는 이도 있으나, 어떠한 양식으로든지 자기네의 '국민의 혼(國民魂)'만 표현하면 그만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조선미전에서 성공을 할 생각을 하여야지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를 넘겨다보게 되면 도리어 조선미전의 전도는 낙관할 수 없다"며 조선미전의 발전을 기원한 의식 있는 면이 있는 작가였다.

그런 면에서 이한복을 당시 드물게 새로운 형식의 회화를 추구한 미술인으로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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