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식하지 말라시더니 내 편식의 뿌리는 부모님이더라며 농담하는 친구들이 있다. 생선이나 갑각류, 향이 강한 채소 등 특정 음식이 부모님의 기호에 의해 식탁에서 제외되었다고. 일찍이 접할 기회가 없어서인지 지금도 부모님과 비슷한 식성을 갖게 되었단다. 그 중엔 집밖에서 기꺼이 새로운 음식을 맛 본 적도 있으나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판단한 친구도 있고, 애초에 새로운 시도를 원하지 않는 친구도 있다.

한때, 이 친구들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다양한 먹거리를 고루 접하며 자라온 나로서는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음식은 내게 호기심과 즐거움의 대상이지, 불편이나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국내외 어디를 가든 음식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었다. 미식의 천국으로 알려진 홍콩에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라면과 햄버거로 연명했다는 친구가 안쓰러웠던 동시에, 그녀와 여행은 동행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식도락 또한 여행의 큰 즐거움이므로 포기할 수 없던 나다. 

이런 내가, 살다보니 채식을 하게 되었다. 단지 고기 먹기를 중단했을 뿐인데,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는 요즘이다. 최근 열렸던 2018년 채식영화제에서 <고기를 원한다면>이라는 네덜란드의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게 됐다. 채식에 한정되지 않은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영화라 공유하고 싶다. 
 
 다큐멘터리 <고기를 원한다면>

다큐멘터리 <고기를 원한다면> ⓒ Herrie Film & TV

 
고기 먹기를 중단한 나
 
감독이자 주인공인 마리옌은 채식주의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육식을 금지했지만 그녀는 다섯 살때부터 고기가 먹고 싶었고, 지금껏 먹고 있다. 동물이 고기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는 그녀는 육식을 중단하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딸을 낳고 그녀의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더해진 질문. 먹일 것인가 말 것인가. 
  
그녀는 뇌분석을 통해 자신이 섹스보다도 고기에 강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심리치료사를 만나 상담을 받기도 하고 각각 육식과 채식을 대변하는 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먹고 싶으면 먹으면 간단한 것을 뭘 그리 고민하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녀로서는 사안을 직면하길 원한다. 
 
 다큐멘터리 <고기를 원한다면>

다큐멘터리 <고기를 원한다면> ⓒ Herrie Film & TV

 
마리옌은 몇 주에 걸쳐 동물의 도축과정을 직접 경험한다. 비인도적으로 운영될 것으로 추측되는 대형도축장은 모두 촬영을 거부하고, 비교적 윤리적인 방법으로 운영되는 소형도축장에서만 촬영을 허락한다. 

도축장으로 들어오기 싫어서 뒷걸음질 치는 소의 이마 한 가운데를 공기총으로 쏴 기절시키고, 거꾸로 매달아 목을 잘라 피를 쏟아내고, 온갖 장기를 꺼내고, 피하지방을 벗겨내고, 뼈와 살을 분리하는 등 모든 과정을 그녀는 직접 체험한다. 

딱히 의도를 의심할 만큼 잔인하게 묘사된 장면은 없지만, 살아 움직이던 동물을 죽이고 분해하는 장면이 아름답게 보일 리는 없다. 그러나 생각외로 내가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살해 자체보다 소의 주춤주춤하는 뒷걸음질이었다.

소의 도축과정을 체험한 그녀

도축과정에 참여하는 기간 중 한동안 육식을 중단하기도 하는 마리옌. 그러나 잠시 뿐이다. 그녀는 다시 고기를 먹는다. 언뜻 남다른 강심장으로 여겨지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은 없다. 도축하는 육식주의자와 도축하는 채식주의자. 어느 것이 더 어색할까.

영화는 우리 역시 동물임을 보여준다. 단지 먹는 동물과 먹히는 동물로 나뉘게 되었을 뿐. 그녀가 육즙을 줄줄 흘리며 맨손으로 고깃덩어리를 뜯어먹는 장면은 최대한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게 보이려고 작정한 듯하다. 마리옌의 온몸이 고깃점들로 뒤덮이는 장면 역시 섬뜩한 진실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고기를 원한다면>

다큐멘터리 <고기를 원한다면> ⓒ Herrie Film & TV

 
채식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이니 고민 끝에 고기와 이별하게 될 것을 예상하기 쉽지만, 마리옌은 고기 먹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긴 고민 끝에, 자신의 아이에게도 고기를 내어준다. 생애 처음 고기를 맛본 아이는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하나 더!'를 외친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고기를 원한다면

영화는 결국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듯하다. 단, 고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진실을 직면하자고, 살아 숨쉬던 동물이 고기가 되어 식탁에 오르게 되는 과정을 외면하지는 말자고 설득하는 듯하다. 그래야만 보다 인도적인 방식의 사육과 도축이 널리 정착될 수 있을 테니. 

그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다른 것이 궁금해졌다. 그녀는 왜 이토록 자신의 이성과 가치관을 배반하면서까지 육식에 열광하는 걸까. 영화에서는 깊게 다루지 않지만, 나는 그녀가 채식주의자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에 주목했다. 섣부른 짐작이지만, 혹시 그녀에겐 육식이 자신 안에 내재된 억압을 벗어나기 위한 의식은 아닐까.

어린 그녀에게 어떤 음식이 금기였다면, 나에겐 어떤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금지된 행동이었다. 편식을 곱게 보지 않는 부모님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맏딸과 귀한 아들 사이에 콕 끼인 둘째딸로서, 무엇이든 잘 먹는다는 칭찬이라도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좋은 딸이고 싶었다.

그 영향일까. 채식을 해온 지난 반 년간,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공표가 내겐 커다란 용기를 요구했다. 유난떠는 것으로 보이는 건 아닐까,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내 스스로 만든 금기에 갇혀 있었다.
 
 다큐멘터리 <고기를 원한다면>

다큐멘터리 <고기를 원한다면> ⓒ Herrie Film & TV

 
아이로 하여금 어떤 음식을 먹게 하는 것, 혹은 먹지 못하게 하는 것, 그 모든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뤄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어느 정도의 강제가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꼭 식습관이 아니어도, 우리는 자라면서 세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자체에 좋고 나쁨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성숙한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세상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만이 정답일 듯하다. 
 
 다큐멘터리 <고기를 원한다면>

다큐멘터리 <고기를 원한다면> ⓒ Herrie Film & TV

 
좀 돌아왔지만, 결국 나 역시 선택의 문제에 도착한다. 영화는 육식을 조명하고 있지만, 나는 최근의 내 고민들을 마주했다. 우리는 삶의 많은 것들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스스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자발적 모름을 택하기보다는 끔찍하더라도 진실을 목도하면서. 당연한 결론이지만,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각성은 반가운 일이다.
고기를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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