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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노량진길>이다. - 기자말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옛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 ⑤가톨릭노동청년회(현 가톨릭까르딘청년회) - ⑥노량진 컵밥거리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기사 수정 : 10월 10일 오후 6시 7분]

동작경찰서에서 한강대교 방면(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대로를 따라 걷는다. 100m 남짓 가면 횡단보도가 나타나는데 그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노량진 컵밥거리가 보인다. 반갑긴 하지만 '동작 민주올레'는 노량진 컵밥거리로 바로 가기 전에 오른쪽 샛길을 통해 가톨릭노동청년회를 먼저 연결됐다가 컵밥거리로 이어진다. 

민주노조와 함께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가톨릭까르딘청년회)

가톨릭노동청년회(아래 가노청)는 도시산업선교회(기독교)와 더불어 1970년대 우리 사회 민주노조운동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종교단체다. 가노청은 원래 명동성당 가톨릭 회관에 있었다. 가노청이 노량진에 이사 온 것은 1975년이었다. 지금은 2015년까지 함께 운영하던 카페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문을 닫고, 2017년 11월부터는 '친구네'라는 이름으로 청년들의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친구네'는 알바 청년, 수험생 청년 등이 쉬면서 소통도 하는 열린 공간이자 커뮤니티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까르딘청년회라는 명칭은 가노청의 별칭으로 변화된 환경에서 청년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고민의 산물이다.
  
가톨릭노동청년회는 함께 운영하던 카페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2015년에 문을 닫고, 2017년 11월부터는 '친구네'라는 이름의 청년들의 쉽터(열린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 노량진에 있는 가톨릭노동청년회 전국본부 사무실  가톨릭노동청년회는 함께 운영하던 카페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2015년에 문을 닫고, 2017년 11월부터는 "친구네"라는 이름의 청년들의 쉽터(열린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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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노청은 1925년 벨기에에서 창설되는데, 한국의 가노청은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1958년에 결성됐다. 창설자인 조셉 까르딘 주교가 한국에 들어와 명동성당에서 주교 집전 아래 9명의 투사가 선서식과 미사를 봉헌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한다"

가노청의 초기 활동은 빈민촌 무료진료, 윤락여성 선도, 서독파견 간호원과 광부들을 위한 활동, 가정부 생활실태조사 같은 일이었다. 그 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이르러 산업화와 함께 급증하는 노동청년들을 활동대상으로 각 산업체의 노동조합 결성과 임금인상 등 처우개선 지원 활동, 노동 강좌와 직업여성 실태조사, 노동자들의 인권신장과 복지향상 지원 등을 중심에 놓고 활동하게 된다.

가노청은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 노조 탄압 사건,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을 겪으면서 노동자의 경제투쟁 지원, 노동인권 개선 활동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강화도 삼도직물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가 가톨릭 신자인 노동자 300여 명이 해고되자 전미카엘 신부가 처음 개입하면서 가노청은 노동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탄압을 받아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가노청이 노동자 가운데 자리 잡는 데는 1968년부터 영등포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하면서 '노동자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 푸른 눈의 도요안 신부(1937~2010)가 큰 역할을 했다. 가노청과 도요안 신부는 소모임 지도와 교육활동 등을 통해 지금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이 된 원풍모방 노조(신대방 공장과 노량진 공장)를 민주화시키고 활성화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노동자들의 아버지'로 불린 도요안 신부는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이끈 푸른 눈의 신부였다.
▲ 도요안 신부 장례식 장면 "노동자들의 아버지"로 불린 도요안 신부는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이끈 푸른 눈의 신부였다.
ⓒ 살레시오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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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노청, 1970년대 민주노총의 상징 원풍모방 노조 발전에 큰 기여

원풍모방의 전신인 한국모방 시절인 1972년 '노조 정상화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의 기틀을 마련한 원풍모방 노조에는 가노청과 연결된 소모임이 많았다.

1970년 한국모방과 역시 신대방동에 있던 외국인투자업체 세미코어의 가톨릭 신자 12명이 함께 결성한 '무궁화팀'은 최초의 가노청 소모임이었다. 1971년에는 인원이 35명으로 늘어나는 등 규모가 커지고 신대방동 원풍모방 인근 의용촌에서 8명이 투사선서식까지 한다.

이어 예비팀 소나무를 결성하고, 한국모방 내 전체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인 성우회(회장 조화순)도 발족한다. 이들 가노청 관련 소모임은 노조 민주화 과정에서부터 큰 힘을 발휘한다. 가노청이 관여한 세미코어에도 민주노조가 있었다.

1975년부터 원풍모방 노조의 수석부지부장을 맡아 방용석과 함께 노조를 이끌었던 '선한 싸움꾼' 박순희도 가노청의 '투사'였다. 박순희는 현재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맡고 있다.

상생의 거리, 노량진 컵밥거리

가톨릭까르딘청년회가 운영하는 카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뒤로하고 큰 길로 나가면 노량진 컵밥거리의 반대편으로 연결된다.

동작구의 명물 '노량진 컵밥거리'는 원래 노량진역 맞은편에 있었다. 취업준비생과 학원생들이 많은 노량진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돼 자연스럽게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2012년 대선 당시에는 문재인 후보(현 대통령)가 청년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취지로 이곳에서 컵밥으로 식사하는 장면을 연출해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유동인구가 지나치게 많은 노량진역 맞은편 거리의 특성으로 시민의 보행권과 노점상의 생존권이 심각하게 충돌하면서 동작구청과 노점상 간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결국 양측은 지역주민까지 참여하는 가운데 끈질긴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합의에 이르게 되면서 2015년부터 지금의 자리로 이동하게 됐다.
 
노량진 컵밥거리는 싼 가격으로 노량진 일대 수험생들의 식사 문제를 해결해주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 노량진 컵밥거리 노량진 컵밥거리는 싼 가격으로 노량진 일대 수험생들의 식사 문제를 해결해주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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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지역에서 노점상은 현행법상 불법이지만, 노점상들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여서 노점상들은 불법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불법운영과 단속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다행히 노량진 컵밥거리에서는 동작구청과 노점상이 서로 머리를 맞대면서 '합법'의 길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노량진 컵밥거리는 '상생의 거리'로 불리면서 타 지역에서도 벤치마킹을 하려고 방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동작구임에도 사당동이나 장승배기 방면, 숭실대 입구 등 다른 지역은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을 반복하고 있어 벤치마킹조차 여간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노량진 컵밥거리의 합의 사례를 전국적 모델로 삼을 수 있었으면 한다"라고 자랑하던 이창우 동작구청장이 "동작구의 다른 곳에는 적용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동작구 시민사회에서 구청의 일관성 없는 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기도 했지만, 구청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상생의 거리' 노량진 컵밥거리를 만들어낸 성과를 스스로 무색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최근 서울시가 '노점상 합법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노량진 컵밥거리' 사례가 서울시의 주도로 서울시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노량진 학원가의 형성·발전과 노량진 고시촌이 등장

사실 노량진 학원가와 노량진 고시촌의 등장 이야기를 빼놓고 노량진 컵밥거리에 대해 말할 할 수 없다.

노량진 학원가는 197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이 도심교통 분산과 면학분위기 조성을 내세워 종로와 광화문 일대의 학원을 도심 밖으로 이전시키는 과정에서 본격 형성됐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라는 특성이 반영된 결과다. 처음에는 입시학원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나, 지금은 공무원 시험 대비 학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입시학원은 대치동을 중심으로 한 강남으로 그 중심지를 옮긴지 오래다. 서울시는 2015년 노량진 학원가를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노량진 공시생(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 주를 이루는 노량진 고시촌은 동작경찰서 뒤편에 형성되었다. 대개 원룸형의 좁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시생들은 명절도 잊은 채 오직 시험에 합격하는 그날을 생각하며 젊음을 불태우고 있다. 노량진 수험생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 <힘내요 노량진박>(2011, 사이)이 나오기도 했다.
 
<힘내요 노량진박>
노래 : 사이(Sai), 작사 : 사이(Sai), 작곡 : 사이(Sai)
서울의 하늘은 참 맑아
내 추리닝 바지는 꼬질꼬질
나는 왜 고향을 떠나와
차가운 주먹밥을 먹나

흰 벽에 창문을 그려본다
저기 갈매기떼가 날 부르는 것만 같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한 평짜리 나의 꿈, 나의 우주

힘내요 노량진 박,
당신 아직 젊잖수?
힘냐요 노량진 박,
네버 네버 기브업

힘내요 노량진 박,
당신 꿈이 있잖수?
힘내요 노량진 박,
네버 네버 기브업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자신의 청년 시절을 작은 골방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진취적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길 고대해마지 않는다.

박정희와 박근혜가 살던 곳, 노량진역 건너편

한편,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결정적으로 후퇴시켰던 박정희가 한 때 살던 곳도 이곳 노량진에 있었다.

1955년 7월 광주포병학교 교장에서 인제에 있는 제5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된 박정희는 노량진역 맞은편 100m 정도 안쪽에 셋방살이 집을 마련했다. 물론 박정희는 근무지가 강원도 인제이다 보니 육영수와 박근혜 등 그 가족들만 살았고 본인은 두 달에 한 번 꼴로 들렀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 가족의 노량진 거주 시대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마무리된다. 1956년에 신당동 집을 구입해 이사 갔기 때문이다. 신당동 집은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소유주로 있던 곳이다. 박정희 가족이 살았던 곳은 아마도 지금은 노량진 고시촌 건물이 들어서 있을 가능성이 높다.

(* 곧 [동작 민주올레]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⑬ (노량진길 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태그:#동작 민주올레, #노량진길, #박정희, #노량진컵밥거리, #가톨릭노동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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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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