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지막 수트> 포스터

<나의 마지막 수트> 포스터 ⓒ 에스와이코마드

 
88세의 아브라함(미구엘 앙헬 솔라)은 재단사로 평생을 열심히 살아왔다.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대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소파에 앉아 증손주들을 양쪽에 거느리고 가족사진을 찍고 있다. 아브라함은 곧 한 명이 빠진 것을 알아챈다. 자신이 아끼는 증손녀 미카엘라가 보이지 않는다.

미카엘라는 가족사진 찍는 것이 싫다고 바깥으로 도망간 터였다. 아브라함은 증손녀를 찾아 설득에 나선다. 어린 미카엘라는 당돌하게도 가족사진을 찍는 대가로 천 달러의 용돈을 요구한다. 아브라함은 그 돈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묻는다. 미카엘라는 "아이폰 6"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요양원에서 자랑삼아 얘기할 증손들과 추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필요하다. 그 대가로 증손녀는 사진 수만 장을 저장할 수 있는 '아이폰 6'를 요구한다. 아브라함에게 가 족사진이 얼마나 절실한지, 미카엘라에게 남겨진 미래가 얼마나 긴지 비유하는 것 같다. 세대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사진의 희소성과 보편성을 나타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나의 마지막 수트> 스틸컷

<나의 마지막 수트> 스틸컷 ⓒ 에스와이코마드

 
아브라함과 증손녀 미카엘라 사이에 몇 차례 협상이 오가고 결국 미카엘라는 800달러를 받아낸다. 아니, 뜯어낸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아브라함은 약삭빠른 증손녀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되려 칭찬을 한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그 정도 용돈을 주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아끼는 증손녀와 추억을 만들고 작은 가르침을 주려고 한 것 같다. 앞으로 후손과 함께 지낼 날이 그리 오래 남지 않은 것도 사실이니까.

이제 아브라함은 유산을 자손들에게 나눠주고 주변을 정리해야 한다. 요양원에서 보낼 시간만이 남아있다. 그때 오래된 수트 한 벌이 작업실 한쪽에서 발견된다. 70년 전,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친구에게 만들어 주기로 했던 수트이다. 그는 약속을 지키키 위해 수트를 짊어지고 여행을 떠난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오른쪽 다리를 간신히 끌면서 나아간다.
 
 <나의 마지막 수트> 스틸컷

<나의 마지막 수트> 스틸컷 ⓒ 에스와이코마드

 
아브라함은 불편한 다리를 "오랜 친구 추레스"라고 부르며 3인칭으로 대상화한다. 가족과 의사는 다리를 절단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해도, 아브라함은 추레스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추레스를 포기하면 자신의 삶도 거기서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는 택시기사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택시기사가 아브라함에게 의례적으로 "할어버지"라는 호칭을 쓰자. 아브라함은 "자네 같은 손자를 두지 않았네"라며 나이 든 사람으로 불리기를 거부한다. 젊은 날의 약속을 수행하기 전까지는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마지막 수트> 스틸컷

<나의 마지막 수트> 스틸컷 ⓒ 에스와이코마드

 
여행은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면서 시작된다. 약속을 지키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비행 편은 편도만 예약한다. 아브라함의 동선을 지도로 옮기면 아르헨티나를 기점으로 스페인, 프랑스, 독일을 거쳐 폴란드로 이어진다. 동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스페인에서부터 폴란드까지는 기차로 이동하는데, 항상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린다. 아브라함도 기차 내부에서는 순방향으로 왼쪽에 앉아 오른쪽을 바라본다. 단, 프랑스에서 독일을 진입하는 열차에서만 역방향으로 앉아 있다. 최종 목적지 폴란드를 향하며 독일 영토를 어쩔 수 없이 통과하지만, 쳐다보기도 싫어하는 마음을 좌석 방향과 시선으로 대신한다. 아브라함이 '폴란드'를 말로 하지 않고 쪽지에 적어서 보여주는지, 그에게 '독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다.
 
 <나의 마지막 수트> 스틸컷

<나의 마지막 수트> 스틸컷 ⓒ 에스와이코마드

 
아브라함은 여행을 떠나며 크고 작은 도움을 받게 된다. 레오(마틴 피로얀스키), 마리아(앙헬라 몰리나), 잉그리드(줄리아 비어홀드), 고시아(올가 보라즈)이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독일인 인류학자 잉그리드이다. 아브라함이 프랑스에서 곤란을 겪고 있을 때 다른 프랑스인들은 비웃고 말았지만 잉그리드가 나서서 도와주려 한다.

아브라함은 독일인인 잉그리드가 달갑지 않아 도움을 받는 것조차 꺼려한다. 잉그리드는 전후 세대라서 전쟁에 대한 직접적 책임은 없지만, 피해자인 아브라함에게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한다. 잉그리드의 모습을 통해 독일의 역사 인식을 대신한다. 그런 배려로 아브라함은 독일을 별 일 없이 지나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브라함은 달리는 기차에서 독일군의 환각을 동반한 쇼크로 인해 쓰러지고 만다. 이렇듯 <나의 마지막 수트>는 2차 세계대전의 상흔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의 마지막 수트> 스틸컷

<나의 마지막 수트> 스틸컷 ⓒ 에스와이코마드

 
영화를 만든 파블로 솔라르스는 아르헨티나의 감독이자 각본가이다. 한국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2012)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감독은 실제 경험과 전해 들은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나의 마지막 수트> 각본을 썼다. 초고는 2004년에 쓰였지만, 영화를 제작하기까지 13년이 걸렸다. 시간이 흐른 만큼 각본도 동시대에 어울리도록 다시 썼으나, 최종 시나리오는 초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독일이 아무리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고 사과를 거듭한다지만,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의 마지막 수트>는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지만 시종일관 무거운 장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유머와 재치는 관객을 미소 짓게 만들고 여행 중에 만난 느슨한 연대의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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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를 씁니다. 블로그에 동시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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