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바야흐로 격변의 시대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시민들을 겁박하던 대통령이 일개 사인(私人)과 재벌의 꼭두각시로 밝혀지며 감옥에 수감되었다. 또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의 항공모함이 시퍼런 대양의 물결을 헤치며 한반도로 향하는 장면이 중계되어 곧 전쟁이 터질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남쪽의 대통령이 이른바 '혁명의 수도' 평양의 한복판에서 15만 군중을 상대로 감동적인 연설을 하는 시대가 됐다.

이 모든 게 촛불항쟁의 결과이자 불과 1∼2년 사이의 변화라는 게 놀랍기만 하다. 이와 함께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던 북의 변화를 향한 열망과 경주 역시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는 갈림길 위에 서 있다. 과연 이와 같은 변화를,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민주화와 사회경제체제 개혁,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냐, 아니면 다시 기존의 관성대로 돌아가 반동적 국면으로 회귀할 것이냐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또 이런 시절일수록 우리 자신의 일상과 사회구조를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그에 적합한 대안을 찾으려는 부단한 지적 노력이야말로 필수적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출간된 <전환의 시대>(박노자, 2018)는 주목해볼 만한 책이다.

  
전환의시대
 전환의시대
ⓒ 한겨레출판

관련사진보기

저자 박노자는 이 책에서 자칫 딱딱하게 느껴지기 쉬운 사회과학적 주제들을, 지금 우리의 일상과 사회구조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친근하게 풀어낸다. 또 각종 실증적 통계수치와 역사적·경험적 사실을 예시하며 우리가 외면하거나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우리사회의 아픈 곳들을 콕콕 짚어낸다.

이미 저자가 펴낸 다수의 저작과 마찬가지로 주류 미디어가 유포하는 프레임이나 일국 중심적 관념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본질만을 파고들어가는 저자의 예리한 통찰력은 이 책에서도 빛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저자의 통찰로 본 작금의 한국사회는 어떤 상태인가? 이와 관련해 무엇보다 한국의 '지배층'에 대한 저자의 분석이 주목된다.

저자는 한국의 지배층을 서로 간에 "혼맥을 맺고 이웃에서 살며 같이 골프를 치고 아이들을 같은 학교, 같은 학원에" 보내는, 재벌가-고급관료-법조계로 연결된 지배연합"이라(194쪽) 규정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한국 지배층의 특징은, 이 책의 내용을 종합해볼 때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기본적인 재분배조차 거부하고 신분상승 가능성이 소멸된 '대물림사회'를 만들어낸 한국의 지배층은 피통치자들의 체제수호 의지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이에 그들은 "정말 전쟁이 나면 … 돈 받고 싸울 미군을 최후의 보험"으로(89쪽) 여길 뿐만 아니라 자유무역의 틀 밖에선 단 며칠간의 생존조차 불가능한 현재 우리의 무역의존 경제모델 틀을 최종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세력 역시 미국이라 인식한다.(90쪽)

저자는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종미(從美)성이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유래한 것이라 지적한다. 기성의 주류 미디어에선 결코 접할 수 없는 분석이다.

둘째, 이명박이나 박근혜 같은 '바지사장'을 내세우지만, 사실상 대한민국을 통치하고 있는 재벌들은 기존의 수출의존 경제모델을 개혁해 다수의 정당한 욕구를 제대로 만족시키는 경제구조를 창출해내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울러 최근 삼성전자 기흥공장 노동자 사망사건에서 잘 드러나듯 이미 비윤리적 경영이 체질화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당장의 단기이익과 배당일 뿐이다.

그 결과는 "몇몇 특권 재벌의 몇 안 되는 수출상품에 엄청나게 의존하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고 명목상의 중산층을 포함해 국내 가구의 대부분이 빚쟁이가 되도록 방치"한(189쪽) 현재의 상황이다. 저자는 이런 상황이 향후 수출 감소 및 내수부진, 정부의 경기부양능력 약화와 맞물릴 경우 필연적으로 장기적 경제위기를 야기할 것이라 전망한다. 즉, 국가를 사유화한 재벌이야말로 우리 사회 최대의 리스크라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지배층의 특징은 한국 사회의 각종 부조리와 차별 문화에도 고스란히 반영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이와 관련해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권위주의와 위계질서, 성폭력, 임금착취, 갑질,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개개인의 파편화, 영어 광풍, 왜곡된 공론장, 자본에 의한 대학의 식민화 등 저자의 필치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압권은 다음과 같은 지적이다.
 
극소수 대기업의 사익만을 챙겨주는 재벌공화국의 기본구조를 본질적으로 바꾸려는 정치인은 주류 정치무대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설정되어 있는 이 시스템은, 과연 민주주의가 맞는가? 몇 개의 대기업이 민주주의를 가장하면서 사실상 영구적으로 한 나라를 통치하는 모델을 왜 유일정당 통치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225쪽)

그야말로 죽비로 내려치는 통타(痛打)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우리 체제에 대해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는 허상에 불과한 것임을, 이보다 더 명쾌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견지에서 저자는 '정치의 민중화', 정치참여의 대중화·일상화를 주장한다. 이는 최근 일각에서 운위되고 있는 '직접민주주의'론과도 맞닿을 것이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아래로부터의 조직화'와 '집단적 저항'에 대한 열망을 숨기지 않는다. 결국 아래로부터의 압력과 그에 따른 사회구조의 혁명적 전환이 동반되지 않을 경우 개혁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3탈(脫)'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즉, 탈분단·탈군사화·탈자본이다. 여기서 '탈분단'이란, 남북이 '정상적 이웃'으로 지내는 상태를 의미하는 동시에 북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전환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북에 대한 악마화에 익숙해진 우리 자신을 상대화하고, 북한 역사의 긍정적 성취 역시 인정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반추하는 자세이다.

다음, '탈군사화'란 군비 감축 및 대체복무제 도입과 같은 제도적 조치뿐만 아니라 학교·직장 등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침투해있는 군대식 문화의 청산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탈자본'은 교육·의료·주거의 공공화, 기업의 공유화와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통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다들 골고루 살기 편한 사회'로 전환하는 것을 뜻한다.(298∼303쪽)

한편, 한국의 '자유주의 정치인'들에 대한 저자의 '까칠한(?)', 또는 '각박한' 평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는 저자의 저작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장이기도 한데, 이 책에서 저자는 "각종 온건보수 지향의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 사익 패거리에 불과했던 박근혜 정권의 실정과 폭정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과연 정책이라는 핵심적 측면에서 저들과 강경보수 사이의 차이가 그렇게까지 큰가?"라고(224쪽) 묻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저자의 지적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재벌통치가 강고하고, '아래로부터의 급진화'가 미약하기만 한 우리의 '엄혹한 현실'을 생각한다면, 양자 간의 차이가 그렇게까지 무시해도 좋은 정도일지 의문스럽다. 더욱이 한국의 강경보수는 불과 2년 전에도 전두환 일당의 5.17쿠데타와 유사한 '계엄령 음모'를 획책하며 시민들의 기본적 자유마저 박탈하려 들지 않았던가?

그러니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의 집권으로 폭넓게 신장된 자유와 탈분단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려는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즉, 한국적 현실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의 진보성을 인정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특히 현 정부가 추진 중인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의 궁극적 목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공동선언 당시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그대로 "그동안 전쟁의 위협과 이념의 대결이 만들어온 특권과 부패, 반인권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사회를 온전히 국민의 나라로 복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저자는 서문에서 현 정부의 개혁정책이 한국 사회의 심층 구조에 의해 언제든 좌초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구조적 전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는 그 자체로 적실한 지적이다.

다만, 현재의 그러한 '유동성'이 반드시 '성공'과 '실패'의 두 방향으로만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예컨대 '자국민 식민화'를 통한 이윤 챙기기에 한계를 느낀 한국의 재벌 중심 지배연합이 탈분단의 기회를 맞아 북을 '무노조 경영'이 가능한 '신(新)식민화'의 대상으로 삼으며 영속을 도모할 가능성은 없을까? '재벌 대리 정권'이었던 박근혜 정권과 그 대변지 <조선일보>가 한때 느닷없이 "통일 대박"을 소리높여 외쳤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더욱 그렇다.

만일 미래의 현실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래서 북한에도 현재의 남한사회와 같은 '제2의 헬조선'이 출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한반도 전체 주민의 끔찍한 불행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의 격변은, 언제든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저자 나름의 통찰이 더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우리사회의 '심층 구조' 뿐만 아니라 이미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구체제 기득권 세력의 저항 양태 역시 다각도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저자의 다음 논의를, 독자의 입장에서 기대해본다.

전환의 시대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2018)


태그:#<전환의 시대>, #박노자, #재벌, #자유주의자, #지배연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