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참가한 한 시민이 들고있는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촛불 문화제 구호
▲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촛불 문화제 구호 참가한 한 시민이 들고있는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촛불 문화제 구호
ⓒ 김선희

관련사진보기


우리의 교육과제, 1등급이냐, 다양성이냐?

1996년에 청평의 한 작은 중학교에 초임발령을 받은 이후 대개의 기간을 경기도 여러 지역의 중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올해 일반계 고등학교로 전입해 왔다. 공립학교 교사들이 학교를 옮기다보면 적응하기 힘든 기간이 있기 마련이기에 올 한해 지내기가 녹록지 않았다. 한 마디로 부적응 상태다. 익숙했던 전임학교에 비해 학교 체제 자체가 낯설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큰 이유는 우리나라 교육병폐의 최전방인 일반계 고교에서 잘못된 우리교육의 현실을 생생하게 목격하는 일이 가슴 아프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은 4%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내가 담임하는 학년의 인원은 192명이다. 그 중 7명이 4%, 즉 1등급이다. 명문대 입학의 티켓인 것이다.

사실 1등급 아이들에게 공부는 그다지 고달프지 않은 경우가 많다. 주로 그 아이들이 종합전형의 비교과영역까지 석권하는 이유는 그만큼 여력이 있어서다. 기본적인 학습능력의 바탕이 좋은데다 신체, 정서, 물질, 환경도 잘 따라주는 이 아이들은 대체로 흥겹게 학교생활에 임한다.

부모와 교사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기도 한다. 수치로 나타난 성적이 좋아서가 아니라 수업에 활력을 제공하고 가르칠 맛을 느끼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어른보다 더 나은 이해력과 품성을 지닌 아이들도 꽤 많다. 기분 좋은 성취는 또 다른 성취를 즐겁게 꿈꾸게 한다. 돈이 돈을 낳듯, 노력은 성취를 낳고, 성취는 더 많은 성취를 낳는 것이다.

노력의 대가로 성공을 정하자는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현재의 교육경쟁이 결코 공정하지 않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부 부정사례가 있다지만 공립학교 현장에서 보면 부정사례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하다. 사회 어느 분야나 반사회적 범죄가 있을 수 있듯 학교에서도 드물게 그런 사고가 있는 것 뿐이다.

학교 스스로 명문대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비행을 저지를 필요는 없다. SKY로 대표되는 유명대학 진학의 성과를 내줄 학생들은 다른 여타의 스펙 쌓기도 손쉽게 해내기 때문이다. 그저 대회만 많이 열어주면 성적 우수자들이 척척 나가서 상을 타낸다.

3, 4등급 아이들도 더러는 받지만 그것은 1, 2등급 아이들이 선택한 뒤에 기회를 잡은 경우이다. 일부 예체능 대회가 아닌 이상 대체로 1, 2등급 아이들 차지다. 사실은 대부분의 예체능 관련 대회나 각종 동아리 활동에서도 학업성적 우수자들의 활동이 두각을 나타내곤 한다. 성취의 달콤함을 많이 맛본 아이들이 더 많은 노력 에너지도 지녔기 때문이다.

결국 교사를 비롯한 성인들의 역량이 그렇듯 아이들의 학업도 주요과목이라 칭해지는 일부 교과목의 학습강자 엘리트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양적 기준으로만 본다면야 더 많이 성취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경제효율이 높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더 이상 경제효율에만 머무르는 대한민국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면 다양한 특성을 아우르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입시, 시키는대로 다 해내는 사람만을 가려내는 도구

90년대에 비해 비교도 못할 만큼 높아진 임용고시 경쟁률, 교사들의 정보지식 수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스런 교육현실. 이 또한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교사들을 뽑아내는 데만 혈안이 된 과열 입시경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말없이 묵묵하게 일만 하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버티기 어려운 교사들의 업무조건, 그런 교사들은 묵묵히 버티는 학생들을 길러내는데 최적화 되어 있다. 다행히 교사는 묵묵히 공부하고 일하는 우리 사회의 긴 터널에서 걸러지고 걸러진 단련의 기간을 거쳐 살아남았기에 버틸 수 있다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오늘의 아이들은 과거사회의 무조건적 억압과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유년기부터 몰아친 과잉학습의 압박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그 무엇보다 자기 정체성을 찾고 싶은 내면의 욕구가 비약적으로 분출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성장 단계에 놓여있기도 하다. 그래서 더는 견디지 못하고 수업에서 영혼을 이탈시킨 채 교실에서 낙오되거나 교실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한다.

내신 1등급에 숨은 비밀
  
참석한 한 시민이 촬영한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촛불 문화제 안내문
▲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촛불 문화제 안내문2 참석한 한 시민이 촬영한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촛불 문화제 안내문
ⓒ 김선희

관련사진보기

 
십 수 년 만에 고등학교에 컴백하여 1학년 담임교사가 된 나에게 1학년 1학기 교실의 첫 인상은 싱그러운 오월의 신록과 같았다. 아이들의 눈빛은 빛났고, 공부에 열의가 있었으며, 모든 일에 열정적이었다. 마음가짐이 누구나 명문대 입학 후보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차 지필고사 후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성적이 몇 등급인지 알면서 출발선을 확인하게 되었다. 학급의 서너 명을 제외한 다른 모든 학생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이 사태가 많은 학생들의 학습 무기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예견하고 순발력 있게 대처하기 위해 열 일 제치고 개인 면담을 실시했다. 그리고 시험 결과를 스스로 진단하며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 보도록 조언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도록 다독여 주었다.

그러나 곧 이어진 각종 수행평가와 2차 지필고사의 결과를 마주하는 순간, 나와 아이들의 노력이 무력해짐을 느껴야 했다. 내 희망고문으로 나도 신뢰를 잃고 말았다. 내가 상담한 학생이 1등급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1등급을 기꺼이 내어 놓는 다른 학생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등급을 올리고 싶은 학생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지금 등급에서 내려가게 된 친구가 없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말이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1, 2등급의 현주소를 확인한 아이들이 왜 굳이 3, 4등급으로 내려가겠는가? 9등급이 8등급이나 7등급으로 올라갈 수는 있지만 3, 4등급이 1, 2등급으로 오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1, 2 등급은 이 사회가 그토록 열망하는 명문대와 '인 서울'의 티켓을 거머쥔 것인데, 그것을 왜 내어주려 하겠는가? 이미 출발선을 훌쩍 떠나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레이스가 가능한데, 왜 굳이 늦추거나 멈추려 하겠는가? 혹시라도 실수를 해서 한 아이가 1등급을 놓친 덕에 다른 아이가 1등급에 진입할 수 있었다한들 교사인 나는 기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실패를 기다려야하는 성공을 지지할 수 있을까? 깨물면 똑같이 아픈 나의 열 손가락 같은 학생들인데 누구를 골라 '이번엔 네가 내려와 줄래?' 라고 권할 수 있을까?

내신 실패자의 진로

그렇다면 이렇게 가려내어진 내신 실패자들은 어떤 길을 가게 될까?

일반고에서의 내신 실패는 수능의 실패이기도 하다. 수능은 영재고, 자사고, 특목고의 1차 경쟁 레이스에서는 성공했지만 내신에서 밀려난 아이들의 더 치열한 경쟁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학교 1, 2등급보다 더 높은 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아이들은 제일 먼저 자신을 책망하고 기죽인다. 그나마 여건이 좋은 아이들은 유학길에 오르거나 대안학교, 홈스쿨로 빠져나가 내신 갈아타기 또는 물 타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런 저런 여건이 안되면 교실에서 남아 견뎌내야 한다.

학생의 주요 사명인 학업 의욕은 점차 내려놓고 대인 관계만이라도 챙기자는 쪽으로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또는 엎드린 채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차단하기도 한다. 마음의 상처를 안고 학교를 이탈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탈한 아이들은 자기 방 안으로 도피하거나 미처 준비가 안 된 채 사회로 뛰어들기도 한다.

그렇게 한 학기에 두어 명씩 야금야금 학교를 떠나거나 교실 속 좀비화가 되어 간다. 학교 밖에서는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서 성적비관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부작용을 간헐적으로 접하게 되지만, 현장의 교사들은 매일 매일 수많은 학생들의 '정서적 자살'을 목격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실패가 지불한 대가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2차 촛불 문화제에 참석한 한 시민이 촬영한 사진
▲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2차 촛불 문화제의 촛불을 든 한 시민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2차 촛불 문화제에 참석한 한 시민이 촬영한 사진
ⓒ 김선희

관련사진보기

 
3학년이 되면 인원이 줄어든 교실에서 좀 더 쾌적하게 공부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재적학생이 줄어든 만큼 4%의 압박은 좀 더 좁혀져 있다. 못 견디는 아이들이 많이 떨어져 나간 교실 분위기는 더욱 맹렬하다.

이제 슬슬 정상적인 학과수업은 거부하고 문제풀이에 몰입하고 싶어 한다. 다가오는 수능 티켓도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학부모도 당당히 학교에 요구한다. '정규수업보다는 문제풀이 위주의 실전대비나 자율학습시간을 달라'고 말이다.

이때까지 1, 2등급을 유지하지 못한 친구들은 이 맹렬한 문제풀이 몰입 시간에 견디기가 점차 더 힘들어진다. 심지어 일부 지역은 8시에 시작하는 수능고사 시간표에 적응시키자는 이유로 이미 사라진 0교시를 부활해 9시간 이상 학교생활을 견디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물론 학교운영위원회의 결정에 따른 경우가 많으니 주로 학교운영에 참여도 높은 일부 학부모의 요구라고 봐야겠다. 그렇게 견디어낸 아이들은 방과 후에 다시 학원, 과외, 독서실에 가서 몇 시간을 더 견뎌야 한다.

문제풀이 공부만으로 하루 온종일을 도배질해도 견딜 수 있는 공부 적성인자는 생각보다 그리 흔치 않다. 이 기간이 얼마간 지나다 보면 또 많은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나가게 된다. 출석부에 그려진 동그라미, 세모, 엑스, 쌍동그라미 등 결석 표시가 점차 빈번하고 화려해진다.

수능을 50여 일 앞둔 현재, 심지어 어떤 학급은 오후 3, 4시 정도 되면 50% 이상의 학생들이 자리를 비우고 없다. 물론 교실에서 남아 줄곧 낮잠으로 하루를 견뎌주는 아이들도 꽤 있다. 그나마 이 친구들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다른 친구들의 내신과 학교운영을 가능하게 해주는 고마운 이들이다. 학적을 파내어 나가지 않아 주니 4%의 압박도 학급 축소의 위험도 덜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들에게 사회의 그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는다. 친구도, 교사도, 부모도 한심하게 여긴다. 심지어 그들 자신조차도 자신을 떳떳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공자도 실패자도 불평하지 않는다. 성공자는 성공의 보상이 있어서요, 실패자는 실패의 원인이 자신의 노력 부족에 있음을 이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통해 끊임없이 확인받아 왔기 때문이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 아닌가? 이 시대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기회가 누군가의 실패를 지불한 대가라는 걸 망각하고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을 외면하는 것과 뭣이 다른가?)

"우리나라 일반계고 어딜 가나 다 그래요"

이 현실에 가슴 아파하고 문제의식을 드러내면 동료들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일반계고 어딜 가나 다 그래요. 선생님이 최근에 중학교에 주로 계셔서 잘 몰라서 그래요. 1년만 지내보세요. 다 적응해요."

맞다. 내가 잘 몰랐다.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다른 동료들과 달리 마음이 몹시 불편하고 아프다. 그렇지만 나는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부적응하겠다. 비정상이 되어버린 교육의 현실을 다수가 선택한 정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바로 잡힐 때까지 계속해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다.

학교가 시대에 역행하며 용광로로 걸어 들어가지 않도록 깊은 애정을 가지고 지적하며 시정을 요구할 것이다. 공교육이 살아야 우리 사회가 건강하다. 그래서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뼛속까지 파고 들지 않도록 고약을 붙여서라도 쇄신하는데 일조하겠다.

그래서 2022 대입정책을 반대한다

모든 학생과 학부모는 자신과 자녀가 교사와 학교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바란다. 그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 교사와 학교의 기본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의 양심으로 양적평가, 상대평가를 비롯한 과잉학습 체제로의 회기인 2022대입 제도를 결코 수용할 수 없다. 90%의 실패자를 담보하는 평가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지난 1학기, 한 아이가 '현대사회의 노예는 누구인가?'라는 역사 논술평가에 답한 내용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대기업 부장인 나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에 일찍 나가 밤늦도록 일만하고, 주말에도 종종 일 때문에 집을 비우십니다. 밤이나 낮이나 가족들 먹여 살리고 가르치느라 정작 따뜻한 밥 한 끼도 함께 먹지 못하십니다. 그 흔한 취미 생활도 없이 오로지 일만 하시는 우리 아버지가 바로 현대 사회의 노예라고 생각합니다."
 
평가를 실시한 동료교사는 아이의 답이 특이하다며 나에게 보여주셨지만 나는 그간 어지간히 태만하게 보였던 이 아이가 새롭게 다시 보였다. 머리도 좋고 가정환경이 넉넉한 아이가 공부에 열정을 다하지 않는 바람에 눈물어린 상담을 청해오셨던 아이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이 아이의 공부 역량 낭비를 불러온 것은 어쩌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 결국 현대사회의 노예로 완성된 부모와 우리 어른들의 삶이 아니었을까? 우리 사회 모두 아이들에게 더 열심히 노력해서 이 사회의 주류가 되자고 말하는데 힘을 잃고 만 것은 아닐까? 정작 주류라고 생각한 자기 자신들이 노예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경쟁사회란 그렇다. 묵묵히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만 살아남게 만든다. 살아남은 자의 삶도 결코 녹록지가 않다. 그래서 해내지 못한 사람의 열악함도 돌아봐줄 여력이 없다.

가혹한 경쟁사회에서 묵묵히 살아남은 우리는 모두 투명인간

고 노회찬 의원님의 6411번 버스 연설이 떠오른다. 새벽 4시부터 강남의 빌딩들로 출근하기 위해 저녁 9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잠자리에 드느라 이 사회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청소 노동자들의 이야기 말이다. 그들을 이름하여 '투명인간'이라 말하며, 그들을 대변하는 정치를 하자고 호소하던 내용이 종종 되새겨진다.

그러나, '과연 새벽 4시에 6411번 버스를 탄 청소 노동자들만 투명인간일까?'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호기심과 탐구욕을 잃은 아이들. 가르침은 기본이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 각종 행정서비스와 온갖 책임을 도맡느라 사유와 성찰을 포기한 교사. 적은 인원으로 많은 성과를 내어야만 자리가 유지되는 직장인. 성공한 직업군으로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많은 돈과 명예를 축적해야만 하는 각계의 전문가들. 가족들이 자신을 최대한 쥐어짜고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정보와 헌신을 제공해야하는 어머니와 아내들. 우리 모두가 나도 모르게 6411번 버스에 탑승해 있는 투명인간들이 아닐까?

과거 회기를 주문하는 '노오력'
 

큰아이의 유아기에 둘째를 가진 채 직장 일과 가사 일을 병행 하느라 몸이 많이 축나서인지 둘째아이 출산이후 몇 주간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소 나를 특별히 아끼셨던 이모님이 들려주신 말씀은 이 사회의 여성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품었던 내 말문을 막는 장치가 되곤 했다.
 
"얘, 나는 새벽에 아이 낳고 내 손으로 미역국도 끓여먹었어. 한 숨 자고 시어머니 눈치 보여 오후에는 밭일도 했단다. 그러다가 현기증에 까무러쳤는데, 누구라도 병원에 데려다 주기는커녕 집안 어르신이 찬물을 끼얹어 깨워주신 게 다다. 요즘은 뜨끈한 방에 미역국 끓여다주는 산후도우미도 있겠다. 얼마나 좋니? 나약하게 굴지 말고 어서 빨리 툴툴 털고 일어나라."
 
상상도 못할 고생을 다 해내고 살아남은 어르신들의 충고에는 '내가 너무 못났나?' 돌아보게 하는 막강한 힘이 있다. 그들의 고생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너무도 흔하디흔한 생생한 실화였기 때문이다. 맞다. 그분들이 그 호된 고생을 견뎌내신 덕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머물러 질경이 같은 억센 삶을 살아내는 수준에 만족해야 할까? 그 어떤 열악함도 견디어 살아남아서 노예 된 삶이 후대에도 탄탄하게 지속될 수 있도록 과거의 삶에 멈춰 주는 게 답일까?

능력주의보다 더 무서운 노력지상주의

과연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이라는 행위야말로 이전의 삶보다 더 나아지자는 행위, 그 자체이다. 그런데 왜 멈추라고 교육하는가? 왜 돌아가라고 교육하는가?

과거로부터 이어진 가혹한 경쟁체제에 내어 던져져, '살아남는 자는 충분한 기회를 갖고 살아남지 못하는 자는 군소리 없이 열악함을 견디며 살아가야하는 세상', 그게 촛불 민중이 갈망한 세상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다수의 민중이 결국 이 사회의 가속화되고 있는 경쟁 시스템에서도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 옹호자들에 불과했단 말인가?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경쟁의 수레바퀴를 견뎌내기 힘든 다양한 처지의 다수, 즉 개인들이 모여 이룬 무리였다. 비록 오랜 경쟁폐해 속에서 냉정하게 문제의 요인을 짚어낼 여유를 찾지 못했을 뿐, 다 같은 고통을 호소한 민초요 동지였다.

그것을 제대로 진단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면 시대착오로 퇴행한 2022대입정책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속속들이 누가 더 많이 고생했는지를 주요 평가 기준으로 두고 승자와 패자를 판가름 한다. 심지어 고등래퍼로 대표되어 이 사회의 소외된 아이들을 끌어안는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들도 결국 '누구의 고생이 더 고되었나'를 기준으로 스토리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최고 승자의 소리에만 귀 기울인다. 우리 사회 모두 다각도에서 능력주의보다도 더 무서운 노력지상주의를 완성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양적, 물적 성과 일변도에서 벗어나 질적, 정서적 성장을 이끌어 내어야한다.

"현장의 목격자로서 문재인 대통령을 지원한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을 존경한다. 역대 그 어떤 지도자보다 사려 깊고 공감능력이 뛰어나며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최고의 능력자이자 인격자이기 때문이다. 두 아이의 부모이자 교사로서 아이들이 보고 배울 훌륭한 인간상을 현재의 지도자로 만나게 된 것은 우리 시대의 큰 축복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가 열망해온 그 지도자가 적폐정권이 남긴 수많은 난제를 동시에 풀어가는 과정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교육의 문제를 인식하고 순발력 있게 바로 잡도록 애정 어린 요구를 하고 있다. 오랜 갈증 끝에 만난 이 훌륭한 지도자가 더 강한 힘을 발휘하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위대한 지도자도 크고 작은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건강한 리더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 사과한다. 그리고 시정한다. 그러나 부족한 자신감을 권위주의로 감춘 리더는 자신의 실수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결코 사과하지 않는다. 외면하고, 억압하고, 회피한다. 오히려 반대의 소리를 위력으로 잠재우려 들기도 한다.

촛불 민중이 지지한 문재인 대통령은 전자의 리더임을 믿고 있다. 그래서 작으나마 보탬이 되고자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촛불 문화제'에 참석하여 마이크를 잡았다.

"문재인 대통령님, 부디 이제라도 보다 많은 아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대통령님의 교육공약들을 하나하나 되살리고 실천해주시길 바랍니다. 양적평가, 상대평가로 인한 과열경쟁의 고리를 과감히 끊고, 소중한 우리 아이들과 대한민국이 질적으로 성장하는 새 시대를 맞이할 수 있도록 빠르게 대처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시민여러분, 교육 문제는 결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학부모와 교육자들에게만 국한된 육아의 일부 영역도 아닙니다. 교육은 우리 사회의 모판입니다. 밑그림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방향제시입니다.

함께 외쳐주시기 바랍니다. 발전과 퇴행의 기로에 서 있는 우리 교육이 무력하게 퇴행의 길을 선택하지 않도록 한 분이라도 더 참여하여 목소리 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촛불 문화제 참석 안내 및 신청 배너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지킴이 국민운동 페북 공개그룹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지킴이 국민운동 국민청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본인 페이스북 포스팅 글을 편집한 내용이며 그 중 일부는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제2회 촛불 문화제'에서 필자가 발언한 내용입니다.


태그:#2022대입정책, #문재인대통령 교육공약, #상대평가, #문재인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촛불 문화제, #문재인대통령 교육공약 지킴이 국민운동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