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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 시절, A 선생님은 우리들의 어깨를 주무르곤 했다. 누구도 그 손 당장 치우라고 외치지 못했다. 수업 중 갑자기 찾아오는 어깨 안마는 꽤 긴 시간 동안 공들여 진행됐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종종 선생님은 물었다. "어때, 시원하지?" 

교실에 들어온 B 선생님은 우리에게 호된 질책을 하기도 했다.

"여자가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니? 어떨 땐 팬티까지 다 보여. 보는 사람이 얼마나 민망한 줄 알아? 상의도 그래. 브래지어가 다 비치는데 메리야스 안 입은 애들, 너희들 그거 집안 망신이야!" 

교육부 지침으로 전교 교실에 성폭력 예방 비디오가 상영되던 날, C 선생님은 책을 꺼내 봐도 된다며 은근히 딴짓을 할 것을 독려했다. 영상 말미, 성폭력 피해 상담전화번호가 몇 번인가 반복적으로 안내됐다. C 선생님은 말했다. 

"할 일 없는 여자들이나 밤에 잠 안 자고 저런 데 전화하는 거야. 안 좋은 일 있으면 얼른 잊고 열심히 잘 살 것이지, 쓸데없는 짓이야." 

어리숙한 걸까. 나는 그 누구도 악의를 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몰랐던 것일 뿐. 하지만 몰랐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피해자가, 누군가는 가해자가 되었고, 그 틀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나는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왜 그녀는 '썅년'이 됐나

몰라서 그랬던 거라고 믿고 싶다. 그러니 이제 함께 알아갔으면 한다. 사회 곳곳에서 들리는 외침,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외치는 목소리를 모른 체하고, 폄하하고, 비난한다면, 그때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하고, 서로를 이해해야 하고,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야만 한다. 당신이 어떤 성별이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민서영이 그리고 쓴 <썅년의 미학>은 잘못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썅년의 미학> 책표지
 <썅년의 미학> 책표지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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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욕먹을 거라면 차라리 하고 싶은 걸 하고 욕먹겠다고,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여자가 썅년이라면, 차라리 썅년이 되겠다"(p238)고 자처한 저자.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그러나 실은 너무도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 그 당연한 말을 하기 위해 '못된 여자'가 되기로 했다는 아이러니가 서글프다.
 
"여자와 남자가 같은 임금을 받는 세상. 여자와 남자가 같은 비율로 채용되는 세상. 여자와 남자가 같은 취급을 받는 세상. 여자와 남자가 같은 대우를 받는 세상. 여자와 남자가 같은 세상. 우리는 그저 공평하기만을 바랄 뿐인데. 그런 마음으로 이 만화를 그리고 글을 썼습니다." (p13, 프롤로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한 그녀의 박력 있는 대처를 보고 있으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이런 식이다. 남자가 노브라인 여성에게 말한다. 여기는 외국도 아니고 보기가 좀 안 좋으니, 서로를 위한 배려로 속옷을 좀 입으라고. 내 속옷으로 타인을 배려하라니, 온당한가. 여자의 답을 보라.
 
"나는 브라를 하면 불편하고, 너는 브라를 안 한 내 가슴을 보는 게 불편하니까 네 눈깔만 뽑으면 서로가 편해지지 않을까?"(p111)

섬뜩한데 어쩌나. 속이 다 시원해진다.

우리는 아직 할 이야기가 많다

위의 예는 Part2 '어쩌다 여자로 태어나서'의 한 대목이다. Part 1은 '남자와 여자, 같은 곳, 다른 삶'이다. 얼마나 다른지 들어보자. 밤길도, 낮길도 무섭다는 여자에게 남자가 말한다. "걱정하지 마, 넌 내가 지켜줄게!"라고. 여자는 답한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네가 안 지켜줘도 되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p32)

가장 공감한 대목이다. 내가 아는 한, 어떤 성인 여자도 함께 화장실에 가는 것을 좋아하거나 재밌어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할 뿐이다. 화장실에 도착하면 끝이 아니다. 칸막이 안에서는 몰카(몰래카메라)를 두려워하며 사방을 살핀다. 

저자도 지적하듯, 이를 두고 여자들이 '너무' 민감한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에 나 역시 반대한다. 슬프게도, 가까운 지인 중에 몰카 피해 여성이 있다. 최근의 뉴스들은 어떤가. 한 방송 스태프가 촬영 중 여성 연예인 숙소에 몰카를 설치한 사건이 있었다. 한 의사는 간호사를 불법 촬영해 음란 사이트에 유포했다. 문체부 산하 기관의 공무원 역시 동료 직원을 상대로 같은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내게 있어 이 사건들은 실재 그 자체다. 생생하고 현실적이다. 밤길을 걷다가 공포에 질려보지 않은 여성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여성들은 서로의 귀가를 확인한다. 빨래 건조대에 남성의 옷을, 신발장엔 남성의 신발을, 존재하지도 않는 남자의 물건들을 진열하며 우리는 살고 있다. 

나는 그 누구도 잠재적 범죄자로 몰 생각이 없다. 다만, 모든 일들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여성들의 공포를 과대망상으로 치부해서는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안전한 세상에 살고 싶다.  

책을 보며 실컷 웃고 싶었지만 마냥 그럴 수만은 없었다. 속이 시원하다가도 울컥했다. 그녀가 짚고 있는 현실에 너무도 공감했기 때문에. 잠 못 이루며 내 탓을 했던 일들이 실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개인적 경험이 아닌 사회적 경험이라는 것을 깨달은 여자들은 이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모두를 응원한다.

저자는 이 책이 해결이나 대안은 제시 못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 역시 이에 적극 동의한다. 우리는 아직 할 이야기가 많다. 
 
"말하고, 설치고, 생각하는 여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데이터는 쌓일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힘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무수히 쏟아질 여성의 이야기를 기꺼이 응원하고자 합니다. 제가 못한 것을 분명 누군가가 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p237, 에필로그)

썅년의 미학

민서영 지음, 위즈덤하우스(2018)


태그:#썅년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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