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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지인이 '덕밍아웃(누구의 팬 활동을 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을 했다. 늘 페이스북에 육아와 여행에 관련된 것만 올리던 지인이 느닷없이 방탄소년단의 사진을 올린 것이다. 지인은 수년 전에 '입덕(누군가의 팬이 되는 것)'해 몰래 '덕질'을 해왔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방탄소년단이 지난 8월 26일 오후 월드투어 콘서트 < LOVE YOURSELF >의 시작점으로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단독콘서트를 열었다. 이들은 콘서트에 앞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지난 8월 24일 발매한 리패키지 앨범 < LOVE YOURSELF 결 Answer >와 이번 투어공연에 관해 기자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 방탄소년단 방탄소년단이 지난 8월 26일 오후 월드투어 콘서트 < LOVE YOURSELF >의 시작점으로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단독콘서트를 열었다. 이들은 콘서트에 앞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지난 8월 24일 발매한 리패키지 앨범 < LOVE YOURSELF 결 Answer >와 이번 투어공연에 관해 기자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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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부터 '덕질'에 익숙한 난 꽤나 반가운 마음에 '좋아요'를 눌렀다. 그런데 반가운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지인의 페이스북에는 "나는 강다니엘", "박지훈" "세븐틴!" 하면서 그동안의 덕질을 고백하는 댓글들이 줄줄이 달렸다. 대부분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인 여성들이었다.

40대 워킹맘인 또 다른 지인은 '원유'라는 필명으로 강다니엘 입덕기를 온라인상에 연재했고, <이 나이에 덕질이라니>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출간한다고 알려왔다. 원유 작가의 강다니엘 입덕기에는 "꼭 내 이야기 같았다", "이 나이에 이러는 게 부끄러웠는데 이렇게 내 마음을 대신 써줘서 고맙다", "십 대 때도 안 하던 것을 이제 하고 있다"는 등 30, 40대 여성의 뜨거운 댓글들이 가득하다.

워너원과 방탄소년단이 30, 40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요즘, 40대와 그 언저리를 살고 있는 이른바 '중년의 문턱'에 있는 여성들의 '덕질'이 이슈가 된 것은 최근의 일만은 아니었다. 2000년대 중반 god, 동방신기 등이 인기를 끌 때부터 종종 팬 활동을 하는 '이모 부대'가 이슈가 되어 왔으니 말이다.

10년 넘게 이런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는 건, 게다가 다양한 스타들이 중년 여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건, 이런 현상의 원인이 스타에게 있기보다는 중년 여성들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도대체 왜 중년 여성들이 남성 아이돌에게 사로잡히는 것일까? 그 심리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여성에게 더욱 특별한 중년이라는 시기

중년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 정신분석가 융에 따르면, 40대 전후(평균적인 나이를 의미하지만, 각 개인에게 중년의 시기는 다를 수 있다)가 되면 그동안 살아왔던 역할들에서 벗어나 보다 진정한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이 시작된다. 융은 이 시기 종종 겪는 여러 가지 정신적인 문제들(우울, 불안, 공허감 등)은 '진짜 나'를 찾으라는 메시지라고 분석한다.

현대의 융 학파 정신분석가인 제임스 홀리스는 저서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에서 이 시기에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을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맡아온 역할들을 빼고나면, 나는 대체 누구인가'라고 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중년에 해야 할 일이며, 그래야만 보다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융은 중년이 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역할들을 마치 자기 자신인 양 착각하고 살아간다고 한다. 이런 착각은 남녀 모두에게 해당되는데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은 자신 안의 여성성인 아니마를 억누르고, 여성은 자신 안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를 억누르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가부장적 사회는 남성에 의해 규정된 사회다.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자기 자신을 주체적으로 바라보기 힘들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여성들에게 너무나 많은 역할들을 요구한다. 전통적인 어머니, 아내, 며느리로서의 역할 외에 경제적 능력까지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에서는 엄마, 아내, 며느리로 사회에서는 직장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사는 많은 여성들은 이런 역할들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로 살아갈 시간이 거의 없다.

때문에 중년이라는 삶의 전환기 무렵, 여성들은 더 간절하게 '이 역할들을 내려놓으면 진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매달리게 된다. 이 질문을 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이 시기 많은 여성들이 겪는 다양한 심리적 어려움들은 무의식에서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표시다.

왜 하필 남성 아이돌인가  
 
중년여성, 왜 하필 남성 아이돌에 빠져드는 걸까.
 중년여성, 왜 하필 남성 아이돌에 빠져드는 걸까.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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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하필 남성 아이돌에 빠져드는 걸까. 이는 진정한 나를 찾아간다는 것은 그동안 내가 억압해온 나의 그림자를 의식으로 떠올려 인식하고 통합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융이 말하는 그림자는 단지 내가 의식하기 싫었던 나의 단점이나 상처, 싫은 모습만이 아니다. 사회적 통념에 맞춰 사느라 억눌렀던 열정과 즐거움, 숨겨두었던 욕구 등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긍정적인 면까지 포함한다.

아이돌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역할에서 벗어난 '진짜 자기'를 찾는 것을 갈망하는 이 시기의 여성들의 그림자를 자극한다. 이들이 내뿜는 에너지는 육아와 살림, 혹은 사회속의 역할에 갇혀 지친 여성들의 열정을 자극한다.

<이 나이에 덕질이라니> 온라인 연재에 달린 댓글에서 한 여성은 '(내가 저런 열정을) 완전히 잃어버린 걸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의 자리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반짝일 수도 있지 않을까. (강다니엘은) 이걸 일깨워주는 게 아닐까'라고 말한다. 즉, 아이돌을 통해 억눌러왔던 자신의 열정을 읽어내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오롯한 자신만의 즐거움을 모르던 여성들에게 덕질은 즐거움과 몰입의 경험을 선사한다. 즐거움과 몰입은 내가 진정 나답다고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심리적 기제다.

나아가 여성들은 남성 아이돌 스타의 매력에 자신 안에 숨겨두었던 아니무스, 즉 남성성을 투사한다. '여성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 따라 사느라 억눌렀던 강하고 활기찬 남성적 성격인 아니무스를 남성미 가득한 아이돌스타에게 투사하고 이를 통해 만족감을 얻는 것이다.

또한, 젊은 남성 아이돌이 안무를 통해 보여주는 성적인 매력은 오랫동안 금기시 되어왔던 여성들의 욕망을 자극한다. 원유 작가가 연재를 통해 '강다니엘의 허벅지에 끌렸다'고 고백하자, 많은 중년 여성들이 '공감'을 표시하고 있는 것은 이런 심리를 잘 보여준다.

덕질이 주는 심리적 기능
  
이렇게 남성 아이돌스타는 중년 여성들이 역할에 갇혀 사느라 그림자 속으로 밀어냈던 열정과 즐거움, 성적 욕망 등을 표면 위로 떠오르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이 역할들을 벗어던지고나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해왔던 여성들이 그들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몰랐던 나의 다른 부분과 만나는 희열은 '진정한 나를 찾는 기쁨'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덕질을 통해 이런 기쁨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게다가 덕질은 개인만의 공간을 가질 수 없는 여성들에게 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제공한다. 남성에게 가정은 휴식의 공간이지만, 결혼한 여성들에게 가정은 주부로서 일해야 하는 공간이다. 여성들은 직장에 다니든 그렇지 않든 가정에서 아내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고 끊임없이 가사노동을 한다. 때문에 여성들은 가정에서조차 나만의 시간이나 휴식처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언급했듯 여성들에게는 프라이버시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덕질은 이를 가능케 한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사이 슬며시 침대를 빠져나와 맥주 한 캔을 들고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의 매력에 빠져드는 시간. 그 장소와 시간은 오롯이 나의 것이 된다. 드디어 집은 나만의 사적인 공간이 되고, 여성에게도 프라이버시가 생긴다. 덕질은 여성들에게 오롯이 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여성들은 그동안 모른 채 지내왔던 자신의 그림자 속 열정과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런 '살아있는' 느낌은 이 시기 여성들의 공통된 두려움 중 하나인 '늙어감'에 대한 공포를 줄여주는 역할도 한다.
 
<이 나이에 덕질이라니> 온라인 연재에 달린 강다니엘에게 입덕한 중년여성들의 댓글들
 <이 나이에 덕질이라니> 온라인 연재에 달린 강다니엘에게 입덕한 중년여성들의 댓글들
ⓒ 송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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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여성들의 덕질은 이들이 10대 때부터 팬덤 문화에 익숙한 세대라는 점, 온라인 매체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든 아이돌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년 여성들의 덕질이 남성들의 팬덤보다 유난히 두드러지는 것은 여성들에게 주어진 심리사회적 조건이 이 같은 현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덕질을 하는 중년여성의 모습에서 여전히 기존의 성역할과 충돌하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엿보이기도 한다. 원유 작가가 적었듯 '강다니엘이 상처받지 않고 잘 컸으면 좋겠다'고 의미화 하는 모습 등은 '돌보는 자'의 자리에 있는 여성의 성역할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들이다.

남편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입덕'을 쉬쉬하거나, 다른 식구들에게 충실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또한, 덕질은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비생산적 취미라고 스스로 폄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삶의 의미가 뭐 그리 거창한 것일까. 지금 여기서 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숨쉬고, 느끼고, 열광하며 즐거워하는 나를 발견하는 것. 이를 통해 억눌러왔던 나의 그림자 속 욕망들을 되살리는 것.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의 기쁨을 느끼는 순간들이 모여서 하나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중년 여성의 덕질은 타당하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다.

중년 여성들이여, 부디 '덕질'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맘껏 하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 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강다니엘, #방탄소년단, #덕질, #입덕,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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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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