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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지난 12일 열린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파업을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는 사안과 함께 낙태죄에 대한 유 후보자의 입장을 집중적으로 질의했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지난 12일 열린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파업을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는 사안과 함께 낙태죄에 대한 유 후보자의 입장을 집중적으로 질의했다.
ⓒ 심상정 의원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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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지난 12일 열린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파업을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는 사안과 함께 낙태죄에 대한 유 후보자의 입장을 집중적으로 질의했다. 심 의원은 "헌재 결정 중에 아주 시급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낙태죄에 관한 것"이라며 2017년에 헌법소원이 제기된 후 581일(12일 기준) 동안 계류 중인 낙태죄에 대한 판결이 연내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심 의원은 '심판 사건을 접수한 날부터 180일 이내에 종국 결정을 선고해야 한다'는 훈시규정을 훌쩍 뛰어넘어 600일 가까이 판결을 미루고 있는 헌법재판소에 대해 "이것은 사법편의주의라는 생각이 든다"며 비판했다. 인력부족 등의 물리적 한계는 이해하지만, 헌재가 논쟁적인 사안을 정치적으로 지연시키려는 소극적이고 회피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을 함께 지적한 것이다.

앞서 지난 10일과 11일에 열린 이석태, 이은애, 이영진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도 낙태죄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의가 등장했으나, 심 의원은 현행 낙태죄의 문제점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적했고 "임신 초기 사회경제적 사유에 따른 임신 중절을 허용하도록 입법을 고려해야 한다"는 유 후보자의 답변을 이끌어냈다.

그렇다면 심상정이 제시한 낙태죄의 핵심적 위선은 무엇일까.

여성만을 벌하는 위선

심상정 의원은 '태아를 떨어트린다'는 의미를 내포한 '낙태'라는 단어의 편향성을 먼저 지적했다. '낙태'는 생명을 잃은 태아와 그 생명을 앗아간 악마적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결부되어 대중으로 하여금 여성을 벌하는 데에 대한 심리적 정당성을 부여해왔다. 낙태는 이미 '낙인찍힌 단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낙태라는 단어보다는 '임신 중단' 혹은 '임신 중절'이라는 의학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치중립적이다. 하지만 낙태라는 단어가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만큼, '낙태'라는 용어에 사회적으로 씌워진 부정성을 씻어내는 작업 또한 중요하다.

용어 사용에 대한 문제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현행 형법이 남성의 책임은 지워버린 채 임신 중절한 여성의 불법행위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행 낙태죄는 형법 제269조·제270조에 근거하는데, 제269조는 낙태한 임부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제270조는 그를 도운 의사를 2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심 의원은 해당 조항들이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는 징벌적인 죄목"이라며 피임 실패 이후의 임신과 임신 중절, 그리고 처벌의 위험성을 여성만이 짊어지는 부당함을 지적했다.

이 지점은 지난해 11월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한 청와대 답변에서도 거론된 바 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현행 법제는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며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있다"는 법제적 한계를 인정했다.

여성만을 범죄자로 내모는 현행 낙태죄는, 여성의 몸을 국가의 통제 속에 두려는 시도와 같다. 낙태죄가 존재하는 이상 여성의 신체, 성적자기결정권, 그리고 섹슈얼리티는 끝없이 객체화되고, 그럴수록 여성은 독립된 인격체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이러한 지체 현상은 임신 중절 반대론자들이 '출산율 저하'라는 핵심에 어긋난 논리를 내놓으며 헛발질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7월 7일 오후 5시께, 서울 광화문 광장에 낙태죄 위헌·폐지 촉구 퍼레이드 '낙태죄, 여기서 끝내자!'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몰렸다.
▲ "낙태죄 폐지" 위해 모인 사람들 지난 7월 7일 오후 5시께, 서울 광화문 광장에 낙태죄 위헌·폐지 촉구 퍼레이드 "낙태죄, 여기서 끝내자!"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몰렸다.
ⓒ 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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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 모르는 체 하는 국가

심상정 의원은 "우리나라는 낙태죄를 걸개그림으로 걸어놓고 실제 낙태를 예방하거나 생명존중을 위해서 해야 될 정치사회적 역할을 다 방기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상황을 '위선적'이라는 단어로 평했다.

'위선'은 임신 중절 규제법과 싸우는 여러 나라가 겪고 있는 현실을 지시하는 관용구로(<유럽낙태여행>, 봄알람) 낙태죄 폐지 운동을 벌이고 있는 시민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 불법을 무릅쓰고 임신 중절을 행하는 여성들의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여전히 이를 금지하는 국가의 방관적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2010년 기준 한국에서 행해진 임신 중절 시술은 약 16만 8천 건으로 추정되지만(보건복지부), 이 중 낙태죄로 기소되는 경우는 연 10여 건 정도이고 처벌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법은 실질적으로 사문화되었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단속을 피하기 위해 의료진에 시술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현금으로만 수술비를 결제하고, 의무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죽은 법을 눈앞에 두고 여성과 국가는 위험한 숨바꼭질을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심 의원이 말한 생명 존중을 위한 정치사회적 역할은 무엇일까? 그것은 안전한 임신 중절을 위한 제도 설계와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공적 교육의 확립이다. 약물을 사용한 인공 임신 중절은 수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단하고 안전성도 확인된 만큼, 합법적인 환경이 제공된다면 얼마든지 여성의 건강권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다.

또한 태아의 생명권에만 초점이 맞춰진 '낙태 예방 교육'을 넘어서, 임신 중절이 아이를 낳고 싶을 때 낳아 기를 수 있다는 행복권과도 긴밀하게 관련된 권리라는 것을 강조하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정치의 침묵, 초 단위로 위협받는 여성들

낙태죄 폐지 논의가 정치권보다는 시민사회의 운동에 의존해온 것은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시민사회의 투쟁으로 어젠다가 형성되면 정치는 항상 그 뒤를 따랐다. 1975년 프랑스에서는 343명의 여성들이 자신의 임신 중절 경험을 밝혔던 '343 선언'을 시작으로 낙태죄 폐지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유럽에서 임신 중절을 가장 넓은 범위로 허용하는 네덜란드에서는 '위민 온 웨이브'라는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낙태죄 폐지를 이뤄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낙태죄 폐지 및 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 국민 청원에는 약 23만 명이 참여해 청와대의 답변을 이끌어냈고, 여성단체들은 2016년부터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검은 시위를 조직해 검은 옷을 입고 거리를 행진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등의 시민사회는 임신 24주까지는 본인의 요청만으로도 임신 중절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합법화 찬성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또한 임신 중절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하는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개정안을 발표한 보건복지부의 결정에 대항하는 각종 공동 행동도 지난달부터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여성의 건강권과 생명권이 초 단위로 위협받고 있는 이 상황에서, 정계의 방관 아래 시민사회의 투쟁이 입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렇기에 현재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는 낙태죄 실질적 폐지를 이뤄내기 위한 흐름에서 중요한 시점이다.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를 향한 심상정 의원의 질의는 그래서 굉장히 시기적절하고 핵심적이었다.
 
지난 2017년 9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는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발족 행사를 열었다.
 지난 2017년 9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는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발족 행사를 열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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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헌재, 이제는 국회의 차례

지난 17일 실시된 이종석 헌법재판관 후보자 청문회를 끝으로 총 여섯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마무리됐다. 재판관 아홉 명 중 여섯 명이 대거 교체되는 이 시기에, 낙태죄를 비롯해 동성결혼 법제화와 군내 동성애 허용 여부 등 그간 터부시되었던 논쟁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질의 내용에 포함되었다는 점은 사회적 변화를 실감케 한다.

뿐만 아니라 유남석 소장 후보자를 비롯해 이은애, 이영진 후보자가 임신 중절 허용 범위를 확대하고 낙태죄를 완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이미 밝혔다. 이석태, 김기영 후보자는 현재 심리중인 내용이라는 이유 등으로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는데, 이 역시 현행 형법을 고집할 당위가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유 후보자가 낙태죄 폐지 관련 헌법소원을 연내 처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답변한 만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결정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상당하다.

낙태죄 폐지 청원에 조국 수석을 내세워 답변한 청와대나,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변화의 의지를 드러낸 헌법재판소 모두 아직은 중립적이고 타협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국민적 요구를 인지하고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와 비교했을 때, 입법 주체인 국회는 여전한 회피 전략을 취하는 듯 보인다. 낙태죄가 폐지된다면 그 자리를 메꿀 법안, 즉 안전한 임신 중절 시술을 위한 체계적인 단계를 만들어야 하는 실질적 주체가 가장 소극적인 태도로 논의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낙태죄 폐지와 그 이후의 입법 과정에선 보건복지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 교육위원회 등 국회 내의 전방위적 협력이 필수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기에 이제는 시민사회의 자발성에 대한 의존을 그만두고, 국회 구성원들이 임신 중단권과 재생산권에 대해 공부하고 이해하여 낙태죄가 사라진 자리를 여성의 건강권과 생명권으로 채워 넣을 준비를 해야 한다.

태그:#심상정, #낙태죄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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