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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시작된다는 9월의 첫날, 경남 밀양을 찾았다. 유난히도 더웠던 지난 여름엔 차마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여름 최고기온에서 밀양이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를 꺾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터다. 밀양 주민에게 듣자니까, 올해는 섭씨 30도만 돼도 '선선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단다.

기상이변과 지리적 요인 탓이라는 '뻔한' 과학적 분석에 이골이 난 듯, 호사가들은 밀양이라는 도시의 이름을 걸고 넘어지기도 했다. '빽빽할 밀(密)'에 '햇볕 양(陽)'이니, 애초 더위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고장이라는 거다. 처서도 지나고 이파리마다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가 코앞인데도 이런 우스갯소리에 귀가 솔깃할 만큼 찾아간 날도 무지 더웠다.
 
밀양 의열기념관 전경 '손바닥만 한' 의열기념관 주변에 '해천 독립운동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해천은 인공 수로의 이름으로, 밀양 시내를 관통하고 있다.
▲ 밀양 의열기념관 전경 "손바닥만 한" 의열기념관 주변에 "해천 독립운동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해천은 인공 수로의 이름으로, 밀양 시내를 관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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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가자면 서울보다도 더 먼 밀양을 부러 찾아간 이유는, 일제강점기 불세출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만나기 위해서다. 영남루에다, 얼음골, 표충사 등 하루 이틀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만큼 볼거리가 넘치는 곳이지만, 다음을 위해 남겨두기로 했다. 오늘 하루만큼은 온전히 그를 위해 쓰기로 마음먹었다.

되짚어보니 20년도 더 된 성싶다. 조그만 냇가 옆에 잡풀만 무성했던 그의 생가 터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당시 인솔자가 거기서 태어났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했을 뿐, 독립운동가의 생가 터라고는 도무지 믿기 힘들 만큼 을씨년스러웠다. 하긴 김원봉이라는 이름을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주저하던 시절이었으니, 그의 생가가 멀쩡할 리 없었을 테다.

그땐 교과서에서도 그의 이름은 일종의 금기어였다. 김원봉은 의열단 뒤에 가려졌고, 그가 조직한 조선민족혁명당이나 조선의용대, 조선독립동맹과 힘을 합친 조선의용군 등은 그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단체처럼 서술됐다. 이명박 정권 때 <한국근현대사> 과목이 폐지된 이후 시험에도 거의 출제되지 않아 수업시간에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의열기념관 내부 모습 의열단 활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워낙 비좁아 단체 관람이 조금 힘들 수도 있다.
▲ 의열기념관 내부 모습 의열단 활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워낙 비좁아 단체 관람이 조금 힘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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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초,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했던 그의 생가 터에 '의열 기념관'이 들어섰다는 소식을 접했다. 비록 국고가 아닌,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조카가 사재를 털어 조성한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지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보수적인 지역에서 그를 기리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변화다. 6.13 지방선거 당시 여당의 압승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이 보수야당 출신 단체장을 배출한 곳 아닌가.

아직은 덜 알려진 탓인지 입구에 놓여 있는 방명록이 휑하다. 이곳 밀양과 부산 등 인근 지역 방문객이 대부분이다. 부러 방문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방명록만 놓고 보면 광주는 고사하고 호남과 충청, 강원 지역에서 이곳을 찾아온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해설사가 되레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2층으로 된 건물 전체를 둘러보는 데에는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1층 로비에서 상영하는 의열단 안내 영상과 김원봉의 육성 연설 장면마저 없다면, 전시된 내용을 꼼꼼하게 챙겨 읽어도 20분이면 충분하다. 말이 기념관이지 웬만한 가정집보다 규모가 작다. 만약 중고등학생 한 학급이 동시에 견학을 온다면, 서로 엉켜 관람이 불가능할 정도다.

시골 마을 도서관보다도 규모가 작은 이유는 콘텐츠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예산과 관심이 부족했던 탓으로 보인다. 마치 번화한 밀양 시내에 에워싸여 잔뜩 움츠리고 앉은 모양새다.

기념관 안팎 벽면에는 그와 동지들의 얼굴이 고등학교 졸업앨범의 흑백사진처럼 걸려 있다. 김상옥과 김익상, 나석주처럼 익숙한 이들도 있고, 박재혁과 김지섭처럼 낯선 이름들도 보인다. 하나같이 멸사봉공의 자세로 오로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식민지의 청년들이다. 그들이 자결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나이는 고작 서른 즈음이었다.

기념관을 돌아 나오면 왼편으로 빈터에 검은 빗돌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고향 선배인 김원봉을 따라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벌이다 산화한 석정 윤세주의 생가 터다. 선배 김원봉은 해방의 감격을 누렸지만, 후배 윤세주는 1942년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전사해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석정의 이름을 아로새긴 빗돌 앞에서 옷깃을 여미게 되는 이유다.

기념관 주변으로 어지러이 펄럭이는 태극기의 물결이 외려 묵념을 방해한다. 천변을 따라서 조성해 놓은 '해천 독립운동 거리'는 깃봉마다 내걸린 태극기가 주인이다.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단원들의 얼굴과 업적 등을 벽화로 그려 놓았지만, 태극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다.

자타공인 '보수 1번지'인 땅에서 교과서에서조차 '빨갱이'로 낙인찍은 이를 기리는 태극기의 물결이라니.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했을 어색한 풍경이다. 조변석개하는 인심 탓인가 싶다가도, 세상이 한 걸음 더 정의로워졌다는 생각에 위안을 삼게 된다. 어쨌든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한 나름의 예우일 테니까 말이다.

의거에 나서기 전 그들이 맹서하며 결의를 다졌던 태극기와 지금 기념관 주변을 뒤덮고 있는 그것의 의미와 가치가 같을 수 없다. 거친 비유일지언정, 마치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간 시신들을 덮었던 태극기와, 진압을 지휘한 계엄사령부 건물에 펄럭이던 그것의 차이라고나 할까. 근래 들어 태극기가 상징하는 가치가 훼손된 탓도 있을 듯싶다.

"나는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

영화 <암살>에 나온 이 대사 한마디로 우리 국민 모두는 김원봉을 공부하게 됐고, 덤으로 그의 고향이 어딘지도 알게 됐다. '잘 만든 영화 한 편이 열 교과서 부럽지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뿌듯해 했던 고향 땅 밀양에서 그의 흔적은, 이곳 기념관을 제외하곤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

고향을 지키고 살던 그의 혈육들은 6.25 전쟁 중 '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대부분 몰살당했다. 극심한 좌우 대립과 미국과 이승만 정권을 등에 업은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월북해 북한 정권의 각료가 된 그의 가족들은 멸문지화를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일제로부터 가장 큰 현상금이 내걸릴 정도로 독립운동의 거목이었음에도, 정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이유다.
 
박차정 의사 묘 가는 길에 세워진 팻말 '86걸음' 남았다는 글귀가 눈에 띈다.
▲ 박차정 의사 묘 가는 길에 세워진 팻말 "86걸음" 남았다는 글귀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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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거라곤 그와 백년가약을 맺은 부인의 무덤이 유일하다. 그의 고향 마을 뒷산에 박차정 의사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국권이 피탈된 해에 태어나 10대 때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주도한 뒤 중국으로 망명해 전장에 나가 일제와 당당히 맞서 싸웠던 여걸 독립운동가다. 하지만 전장에서 총상을 입은 뒤 부상 후유증으로 해방 직전 뜨거웠던 삶을 마감했다.

해방 직후 김원봉이 귀국하면서 맨 먼저 충칭에 남겨져 있던 부인 박차정 의사의 유해를 모셔 왔다. 그녀의 고향인 부산이 아니라 굳이 밀양에 이장한 것을 두고는, 죽어서도 가까이에 두고 싶어 했던 김원봉의 바람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귀국 직후 김원봉은 가장 먼저 밀양을 찾았는데, 고향 사람들로부터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 밀양과 김원봉은 그만큼 각별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차정 의사가 김원봉의 처였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1995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뒤로, 권기옥, 정정화, 남자현 의사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여성들의 독립투쟁을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적어도 이곳 대한민국에서는 김원봉보다 훨씬 더 인정받고 있는 독립운동가인 셈이다.
 
박차정 의사 묘의 모습 봉분 위에 떼가 자라지 않아 벌건 속살이 드러나 있다. 주위에 비슷한 크기의 묘가 많아, 빗돌만 아니라면 이곳이 의사의 묘라는 걸 알기 힘들다. 뒤편으로 아이들이 세워놓은 팻말이 보인다.
▲ 박차정 의사 묘의 모습 봉분 위에 떼가 자라지 않아 벌건 속살이 드러나 있다. 주위에 비슷한 크기의 묘가 많아, 빗돌만 아니라면 이곳이 의사의 묘라는 걸 알기 힘들다. 뒤편으로 아이들이 세워놓은 팻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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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편을 잘못 만난 탓일까. 그녀의 무덤은 남과 북에서 모두 버려진 남편 김원봉의 신산한 삶처럼 봉분의 떼마저 벗겨져 속살이 벌겋게 드러나 있다. 최근 들어 도로에 표지판이 설치되는 등 수월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기념관과 동네 주민들의 도움 없이는 찾아가기가 힘들다. 오르는 길이라고 해 봐야 잡풀만 무성해 후손된 자로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듣자니까, 햇수로 70년 넘게 방치된 무덤에 요즘 들어 비로소 '햇볕'이 든다고 한다. 무덤 앞에 꽃을 놓고 가는 이들이 종종 보인다는 것이다. 대가 거의 끊긴 마당에 직계 후손일 리는 없고, '빨갱이'와 '종북'이라는 말에 숨죽여 살다가 용기를 냈거나 뒤늦게나마 대한민국 현대사를 공부한 이들이 부러 찾아온 것일 테다.

기실 그 '햇볕'은 미래세대 아이들의 정성과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무덤가와 오르는 길목에 예쁘장하게 꾸민 나무 팻말들을 세워두고 그녀의 삶을 기리고 있다. 길이 보이지 않아 자칫 헤맬 수 있는 곳이어서 표지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박차정 의사가 졸업한 부산 동래여고 후배들의 정성이라고 하는데, '86걸음'이 남았다는 팻말 글귀에서 여고생 특유의 발랄함이 느껴진다. 의사의 묘를 참배하는 건 동아리 활동의 일환으로 선배에서 후배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기성세대와는 달리 발랄한 10대 아이들은 그들이 배운 대로 느낀 대로 실천하고 있었던 셈이다.

당장 내년이면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아울러, 김원봉의 의열단 역시 같은 해 조직되었으니 꼭 한 세기가 지났다. 만시지탄이지만, 분단과 냉전 시대 낡은 이념의 잣대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편 가르는 일은 이제 그만 멈출 때도 되지 않았나. 무덤가 팻말 앞에서 아이들 앞에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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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출판 담당 기자로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 ohmybook201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