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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었던 1970-80년대,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며 성장했다. 가난한 사람, 도시 이민자, 세입자 등 주로 개발 정책에서 목소리를 낼 겨를도 없던 사람들이 소외당했다. 그들이 갈 곳을 잃고 거리로 쫓겨날 때, 성직자, 재야운동가들이 그들과 함께하려 했다.

박문수 신부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시위를 할 때 함께 현수막을 들어주었고, 용역 깡패들 때문에 두려워하는 주민들을 위해 함께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거리의 사제'라고 부른다. 팔순을 앞두고 있는 그는 지금도 주거약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주거운동의 원로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어느 때인지, 생각하는 주거란 무엇인지, 앞으로 주거권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듣고 싶었다. 지난 8월 31일, 현재 서강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그를 만나기 위해 서강대학교로 향했다.

"멀리서 연구만 할 게 아니라 현장에 참여해야 된다 생각"
 
 서강대학교 정문
 서강대학교 정문
ⓒ 김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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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 소개와 청년 시절 한국으로 오시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제 이름은 박문수이고, 미국 이름은 프랜시스 부크마이어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났고요. 1960년도에 예수회에 입회했어요. 제가 살던 곳의 예수회 관구가 위스콘신 관구였는데, 입회 후에 선교사로 활동하고 싶어서 선교지역을 알아보니 저희 관구의 선교지역이 한국이었어요. (더구나) 위스콘신 관구가 한국에 대학교를 세우는 일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한국으로 갈 준비를 했어요. 그게 한국과의 첫 접점이었죠.

나중에 9년 동안 예수회 교육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서 1969년부터 1973년까지 가톨릭대학교 혜화교정에서 신학과정을 밟았어요. 제가 한국에서 보낸 첫 시간이었습니다. 그 후에 하와이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서강대학교 사회학 교수가 되었죠. 1985년에 귀화를 해서 지금의 이름인 '박문수'로 살고 있습니다."

- 한국에 오신 이후로 철거민과 도시 빈민과 오랫동안 생활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제가 도시빈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하와이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어요. 당시 예수회 정일우 신부님이 청계천에 있는 빈민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배달학당 야학교장으로 있던) 제정구 선생을 만났어요. 두 사람은 서로 사상이나 성격이 잘 어울려서 함께 빈민운동을 하기로 했죠. 저도 하와이에서 그분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도시빈민, 주거와 관련한 과목을 특별히 더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한국에 들어가면 빈민운동과 주거권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죠."

- 우리나라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활동들을 하셨는지, 활동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1979년에 한국에 들어와서 서강대학교 교수로 활동을 시작했어요. 사회학자로서 정일우 신부와 제정구 선생이 함께 만든 복음자리 마을에 가서 연구도 하고, 사회운동 단체들과 관계를 맺고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를 했어요.

1985년에 제정구씨의 초청으로 '천주교도시빈민회'에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빈민 문제를 연구를 했죠. 그런데 (이듬해인) 1986년에 제게 큰 변화가 일어났어요. 상계동 강제철거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 활동가들이 대전에서 연수회를 하고 있었는데, 상계동에서 잔인하게 강제철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바로 다음 날에 상계동으로 가서 혹시 다시 용역들이 올까봐 주민들과 함께 있었어요. 그 때 멀리서 연구만 할 게 아니라 현장에 참여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로 대학원생들과 같이 현장에 나가서 연구를 하고, 빈민운동에 동참해서 활동가로서 역할도 했어요.

1990년도에 들어와서 주거권 운동과 학자들의 연구가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 김수환 추기경님의 관심으로 만들어진 '천주교 도시빈민사목위원회'에서 재개발, 강제철거에 관한 토론회를 주최했어요. 재개발이나 강제철거에 대한 학술적인 논의나 연구를 통해 재개발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죠. 저도 학자로서 참여했고, 서울대교구와 협조하면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94년 즈음에는 한국도시연구소가 생겼어요. 제정구씨가 운영했던 빈민문제연구소와 서울대학교 내의 공간학회가 합쳐져서 생긴 단체인데, 빈민, 주거권을 포괄해서 운동이나 연구를 하고 있어요. 저는 이곳에서 연구도 하고,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의 창간호에 논문을 게재하기도 했어요. 지금도 이사로 있습니다.

문민정부 이후에 복지지출이 늘어나면서 빈민운동에 큰 변화가 생겼어요. 그 때가 1995년도인 것 같은데요. 빈민운동가, 단체들이 모여서 1주일 동안 세미나를 가졌는데, 당시에 나왔던 주제가 '활동은 재야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정부와 협조해서 제도로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 운동이 주민들의 문화와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 주민의 일상생활이 편리해질 수 있도록 지역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듬해에 이스탄불에서 'UN 인간주거계획' 회의가 있었어요. 주거권을 중심으로 지속가능한 'Human settlements'(기초생활권 정도로 해석)가 핵심 주제였어요. 그 때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죠. 덕분에 활동가 70명과 지방정치 공무원, 정치인 70명이 참여했습니다. 당시에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한 국가였습니다.

하나 추가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아시아주거권연합(Asian Coalition for Housing Rights)'을 만들어서 국제적으로 주거권 운동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제정구 선생과 일본, 파키스탄 등 아시아 주거 활동가들이 연대해서 만들었습니다. 주로 했던 활동은 아시아 국가 중에 주민운동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돕기도 했고, 각 국가에 있는 주거권 활동가들과 연대해서 세미나나 워크숍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1996년에 UN인간주거계획 회의를 할 때도 이스탄불에서 세미나를 열기도 하고, 다양한 국가의 활동가들과 연대하기도 했습니다. 굉장히 의미 있는 경험이었죠.

1999년에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제로서 빈민사목위원회 활동을 했어요. 그리고 서울시 무악동에 들어가서 공동체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세입자 단체와 연대해서 강제철거 반대운동도 하고, 청소년 스카우트 운동을 하면서 무악동의 공동체 만드는 활동을 했어요. 지금도 (저는) 무악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강대) 이사장직을 하고 있어서 예전만큼 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가끔씩이라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웃음)"

"우리 사회에 '토지공개념' 정립되는 것 중요"
 
 무악동에서 철거용역과 맞서고 있는 주민들.
투쟁 결과, 세입자들이 가이주 단지를 건축할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무악동에서 철거용역과 맞서고 있는 주민들. 투쟁 결과, 세입자들이 가이주 단지를 건축할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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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여 년 동안의 활동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동소문동 강제철거 중에 큰 사건이 생겼어요. 세입자 대책위원회 부위원장(고 정상률씨)이 건물주한테 살인을 당한 일이었어요. 그 때가 1989년인데요. 한 건물주가 세입자를 계속 괴롭힌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위원장이 그 집에 찾아갔어요. 그런데 집에 찾아가자마자 가옥주가 휘두른 칼에 찔렸어요. 결국 그 분은 돌아가셨죠. 돈암동에서 장례식도 크게 진행되었죠. 그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 한 몸 죽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나를 죽여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후에 예수회에서 '한몸 공동체'를 만들어서 고인을 기리고 있어요."

- 과거 재개발 철거 투쟁과 현재의 주거권 운동의 차이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선,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었다고 봐요. 과거에는 농촌에서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동네에 공동체정신이 남아있었어요. 그래서 빈민운동이나 철거 투쟁을 할 때 공동체정신으로 뭉쳐서 전개했죠. 그런데 지금은 세입자 간의 이해관계가 달라요. 공동체 정신보다는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들끼리 단체가 조직되고, 운동이 전개되죠.

또 하나 차이점은 정부가 다양한 주거정책을 시행하면서 주거권 운동을 하는 단체도 다양해졌어요. 예를 들면, 아파트에서 공동체 생활을 실현하려는 단체도 있고요. 가난한 사람들이 매입임대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돕는 단체도 있고요. 2000년대부터 홈리스나 쪽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 운동도 활발해졌죠. 청년주거 문제를 해결하려는 단체도 있죠. 덧붙여서 주거권 운동이 다양해진 만큼 학자들의 연구도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 신부님께 '주거'란 무엇인가요?
"주거는 1인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가구가 되어서 그들의 삶의 자리가 되는 기초적인 공간이죠. 삶에 필요한 조건, 도시권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선진국' 반열에 오른 우리나라지만 아직까지 '주거'를 포함한 기본적인 권리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많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의 원인은 크게 4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선, 미국의 자본주의 영향이 컸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북유럽 사회의 영향은 잘 들어오지 못했어요. 북유럽에서 시행하는 사회주의적인 주거 정책을 '빨간색'이라고 보고 받아들이지 않았죠.

두 번째는 '엘리트주의'가 많이 남아있어서 엘리트들을 위한 주택 마련을 하고자 하고, 이것이 재벌과 연결되어서 재개발을 더욱 추진하려고 하고 있어요. 재개발을 통해서 수익을 내는, 다시 말해 '부동산 사업'이죠. 재벌들이 부동산 사업을 통해 이윤을 얻다보니 우리 사회에 주거문제가 심각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주거 시장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주거 시장은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습니다. 정부가 '토지공개념'을 강하게 적용했어야 하는데, 시장에 접근하지도 못했죠.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이 개념을 정립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번째는 주택을 대부분 국민들이 부동산을 통해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만났던 도시빈민들도 그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언젠가 집을 얻고 팔아서 큰 이윤을 내고 싶은 것이죠. 너무 보편적인 문화예요. 이것도 주거권을 실현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주거는 '상품'이 아니고, '우리 가족의 삶에 중요한 자리'라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앞으로 주거권 운동은 어떻게 전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 사회에 '토지공개념'이 정립되는 것이 중요하고요. 다양한 주거복지정책을 통해서 주거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거시장을 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투자자들의 손해를 걱정하기보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경제수준에 맞게 주거시설을 누릴 수 있는, 'Affordable Housing(자신의 소득 수준에 적합한 주거비용을 지불하고 거주할 수 있는 주택)'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운동은 아래에서부터 전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민들이 직접 지방정부나 중앙정부에 문제 해결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계나 학술계와 연대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학술계가 주민들과 연대해서 빈민들의 경험과 요구를 정부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연구를 더 많이 늘여야죠."

-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지금은 이사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많은 활동을 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이사장이 끝나면 건강이 허락되는 한, 평화운동과 주민, 주거권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왼쪽부터) 필자와 박문수 신부
 (왼쪽부터) 필자와 박문수 신부
ⓒ 김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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