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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예술일까? 아니면 노동일까?"

과학을 번역하는 남자 노승영과 스릴러를 번역하는 여자 박산호가 함께 쓴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에서 노승영 번역가가 던진 질문이다. 국어사전에서 '노동'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라고 뜻풀이가 나온다. 책의 목차 중 2부에 해당하는 '생계형 번역가의 하루'를 보면 번역가의 삶도 여느 노동자와 다를 게 없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 세종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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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다 보면 이따금 슬럼프가 찾아온다. 생활 리듬이 무너지거나 몸이 아플 때도 슬럼프가 오지만 가장 흔한 경우는 받아야 할 번역료가 제때 들어오지 않았을 때다. 번역료가 들어오지 않으면 자금 운용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 얼굴을 볼 면목도 없을 뿐 아니라 급기야 자신의 존재 가치에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129쪽 - 노승영)
 
이 책을 읽다 보면 번역 분야도, 성별도 다른 두 번역가의 삶이 종종 하나로 겹쳐 보인다. 두 번역가 모두 한 목소리로 말한다. 번역 원고를 넘긴 후 짧게는 석 달 이내에, 길게는 출간 후(1년이 넘어가기도 하고 출간이 취소되기도 한다.) 번역료를 지급하는 출판사 관행 때문에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번역가의 마땅한 권리이자 노동력의 대가인 번역료를 달라고 요청하는 메일을 쓸 때마다 받는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박산호 번역가는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다.

출판사도 할 말은 있다. 독서 인구가 크게 줄면서 출판사 불황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경기 불황이라는 그림자는 출판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뒤덮은 지 오래다. 그런 와중에도 최저임금 인상안이 꾸준히 논의되고, 노동자가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할 수 있게 노동시간이 주 52시간으로 단축되기도 했다. 그러나 번역가는 노동자로서 그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다. 사회적 안전망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한다.
 
"실력보다 속력이 중요하다. ... 중략 ...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초보와 대가가 받는 번역료에는 큰 차이가 없다. 어려운 책을 공들여 번역하는 것보다 쉬운 책을 술술 번역하는 편이 생계에 훨씬 보탬이 된다." (94쪽 - 노승영)
 
번역가는 안정적으로 생계를 이어가려면 한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양을 번역해야 한다. 시간당 임금이 정해진 게 아니라, 원고당 번역료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번역료를 100원이라 쳤을 때 총 번역 기간이 한 달이든 6개월이든 똑같이 100원을 받는다. 이러니 공을 들여 오랜 시간 번역할수록 번역가의 생계는 더더욱 힘들어진다. 번역 시간이 오래 걸리는 어려운 책은 기피할 수밖에 없다.

능력 있는 번역가도 번역만으로는 생계를 잇기 힘드니 다른 일을 병행하거나, 버티고 버티다 결국 번역계를 떠나고 만다. 경력 10년이 넘는 베테랑인 노승영과 박산호 번역가도 여전히 생계 걱정을 하니, 초보 번역가들 상황은 오죽할까.

한 달에 100만 원 수입을 벌기도 힘들다. 최저 생계비라도 벌기 위해 번역 속도에만 치중하면 번역 품질이 떨어질 수 있다. 번역 품질이 떨어지면 독자들의 질타를 받고 평판에 타격을 입는다. 초보 번역가가 경험을 쌓기도 전에 퇴출당하는 일도 많으니 악순환이다.

독자들 지식 수준은 나날이 높아지는데,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엉터리 번역서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현재 출판계 상황을 보면, 번역가들에게 고작 50원을 주면서 100원의 품질을 뽑아내길 바라는 격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번역 품질을 높이려면 번역계에 진입하는 문턱을 높여 번역 인재를 걸러내고, 그 인재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번역료를 합리적인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그래야 능력자가 번역계를 이탈하는 걸 막을 수 있다.
 
"번역은 실력이 아니라 속력에 따라 보상받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매번 최선을 다하고 언제나 실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번역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131쪽 - 노승영)
 
노승영 번역가의 말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 버텨준 번역가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노승영 번역가는 정확하게 번역하기 위해 저자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 질문을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10년 동안 총 25명의 저자와 주고받은 문답이 약 1000건으로 200자 원고지 1000여 매에 이른다고 한다. 원고지 1000매는 웬만한 책 한 권 분량이다.

노승영 번역가가 생계만을 생각하고 '번역 속력'에 집착했다면, 번거롭게 메일을 주고받지 않고 대충 얼버무렸을 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사명을 다하는 번역가들 덕분에, 나는 독자로서 그동안 많은 덕을 보았다.

번역가들이 없었다면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리베카 솔닛의 책을, 편하게 책상에 앉아 읽을 수 있었겠는가. 언제 번역료가 들어올지 몰라 가족들 눈치 보며 자신의 존재 가치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10년 넘도록 번역을 그만두지 않은 노승영 번역가가 고마울 정도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읽는 내내, 두 번역가가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듯 불안한 삶을 어찌 10년 이상 버텼는지 궁금했다. 박산호 번역가는 늘 고군분투한다. 마감과 전쟁을 벌이고, 번역료를 늦게 주는 출판계 관행에 눈물 흘리고, 엄마로서 주부로서의 일도 놓지 못하고 꾸역꾸역 번역을 하고 집필도 한다. 그 지난한 '일일'을 매일 반복하며 지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다. 그런데도 많은 번역가들이 번역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왜일까?
 
"이런 일을 생업으로 삼은 지 어느새 15년이 넘었다. 어떻게 이 긴 시간을 한 가지 일로 이어올 수 있었을까? 번역료 수입이 생계의 방편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글쎄다. ... 중략 ... 아무래도 이 일이 나와 잘 맞아서, 내가 이 일을 좋아해서일 것이다." (82쪽 - 박산호)

박산호 번역가는 "누구보다 먼저 좋은 책을 읽고 나만의 언어로 풀어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283쪽)" 일에 행복을 느낀다. "보수와 직업의 안정성을 떠나 좋아하는 일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인생이 선사하는 행운 중 하나(283쪽)"라고 말한다.

요즘은 '직장에서 자아실현 할 생각하지 말라'고들 하지만, 번역은 자아실현도 할 수 있는 행운의 직업에 속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번역가들이 버텨줄지 모르겠다. AI 번역기의 발달로 번역가란 직업이 사라질 거라고 전망되기도 하지만 그 전에 번역가들 스스로 출판계를 떠나지 않을지, 나는 그게 더 걱정된다. 출판번역계가 여태 무너지지 않은 건 열정과 사명으로 견뎌 온 번역가들 덕분이 아닐까.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은 번역가 이야기지만, 들여다보면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힘들게 노동하며 작은 행복과 보람을 찾아가는 삶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위로가 된다. 번역가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이 오늘도 버티고, 내일도 버티며 살아갈 것이다.
 
"'품에 돈이 들어오면 씩씩해진다'라는 표현이 있다. 돈이란 것이 그렇다. 없으면 어깨도 처지고, 밤잠도 안 오고,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돈이 들어오면 씩씩해지고, 표정도 밝아지고, 생각도 더 긍정적으로 변한다. 모쪼록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늘어나 책도 더 많이 팔리고, 출판사들이 번역가를 같은 길을 함께 걷는 동료로 여기며 지급 관행을 개선해 주면 좋겠다." (138쪽 - 박산호)
 
부디 박산호 번역가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노승영.박산호 지음, 세종서적(2018)


태그:#번역가모모씨의일일, #노승영, #박산호, #출판번역가의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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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며 글 쓰며 세상과 소통하는 영상번역가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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