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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자 원고지로 약 77매에 이르렀다. 2012년 9월 5일, 당시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 분량이 그러했다.

그리고 정확히 6년 만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연설이 4일 이뤄졌다. 이번에는 200자 원고지로 64매 정도 분량이었다. 원고지 13매 정도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차이도 있었다. 두 글자로 이뤄진 단어였다.

재벌.

민주통합당 대표 시절 2012년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이 단어는 모두 7차례 등장했다. 하지만 이번 연설에서 이 단어는 단 한 차례도 나타나지 않았다.

2012년 제시됐던 재벌들을 '어떻게'

2012년 9월 5일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컬러사진을 흑백 모드로 전환했다).
▲ 2012년 교섭단체 대표연설하는 이해찬 대표 2012년 9월 5일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컬러사진을 흑백 모드로 전환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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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오너의 탐욕과 대기업의 무분별한 확장이 위험수위를 넘어서면서 시장경제의 지속 가능성에 빨간 불이 켜졌습니다. 우리나라 상장사 전체 매출액의 52%, 시가총액의 53%를 차지하고 있는 10대 재벌 총수들은 겨우 0.94%의 지분으로 수백조 원의 자산을 가진 수많은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6년 전 연설에서 이 대표는 "민주당이 추구하는 경제민주화는 공정 경쟁과 분배 정의를 통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부자와 서민이 상생하는 경제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수십 년 간 이어져온 재벌과 특권 중심의 경제 기조를 '민생 중심 경제'로 대전환하자는 것"이라며 그 첫 번째 과제로 "재벌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적정 수준으로 완화하겠다"라고 밝혔다.

그 다음 '어떻게' 역시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다시 도입하겠다"라고 했다. "산업자본이나 투기자본이 금융회사를 지배함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국가적 위험을 줄이기 위해 금산분리제도를 다시 강화할 것"이라고 했다. "하도급 중소기업 보호를 위해 '납품단가 후려치기' 같은 부당 거래 근절을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겠다"라고도 했다.

또한 "재벌 내부의 '일감 몰아주기'에 대해서는 과세를 강화하여 경제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고 했으며, "중소기업 적합 업종에 진출하는 대기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적합 업종 범위도 제조업을 넘어 필요한 모든 영역으로 확대해 나가겠다"라고 했다. "SSM(기업형 슈퍼마켓)의 영업시간, 취급 품목을 제한하여 전통시장과 골목시장이 생존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도 있었다.

잠깐 나왔다 사라진 대기업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 2018년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나선 이해찬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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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이 대표의 연설은 6년 전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재벌 대신 대기업이란 단어가 두 번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것도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 이상과 대기업 1000개 중 75%가 몰려있다"거나 "관치 특혜와 몸집 불리기로 성장했던 대기업들이 일시에 무너졌다"는 수준이었다. 단지 현황이나 '과거'를 언급하는 정도였다. 그때는 "경제민주화는 헌법가치이고 시대정신"이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경제민주화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민생·경제적폐, 생활 적폐의 뿌리는 매우 깊다"라고 했지만, 그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재벌적폐 이야기는 없었다. "정경유착이 반복되지 않도록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반드시 설치하겠다"거나 "노임착취, 부실공사,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민관 유착형 건설적폐는 범죄행위"라고 했지만, 골목상권과 자영업자를 초토화시킨 대기업에 대한 '어떻게'는 없었다.

물론 공통점도 있었다. 특히 바세나르 협약(Wassenaar Agreement)이나 빔콕(Wim Kok)이란 이름은 이번 연설을 통해서도 다시 소개됐다. 그때는 "당시 노총위원장인 빔콕이 당시 상당히 양보하는 결단을 내렸다"라고 했고, 이번에는 "빔콕의 결단이 네덜란드의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역사적 합의를 이끌어냈다"라고 했다. 모두 경제 주체간 사회적 대화 모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 대표는 앞서 이런 말도 했다.

"아담 쉐보르스키는 어떤 사회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과정에서 사회·경제적 비용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현상을 '전환의 계곡(valley of transition)'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변화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대한민국이 나라다운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한 동안 견뎌내야 할 고통스러운 전환기를 지나야 합니다. 촛불혁명이 요구하는 개혁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이 전환기를 헤쳐 나갈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 협치가 필요합니다."

그때 실현하겠다고 한 '반값 등록금'은 여전히...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마친 후 동료의원들과 인사하며 퇴장하고 있다.
▲ 동료의원들에 둘러싸인 이해찬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마친 후 동료의원들과 인사하며 퇴장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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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환의 계곡'에 재벌들도 서 있는 것일까.

지난 8월 27일 공정거래위원회는 공시대상기업집단 주식 소유 현황을 공개하면서 "총수가 있는 52개 집단의 자산 총액은 1743조6000억 원으로 2017년 국내 총생산(GDP) 잠정치 대비 100.8%에 달해 경제력 집중이 매우 놓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2017년 공정위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내부거래 현황'에 따르면, 자산 규모 상위 10개 대기업 집단의 내부 거래 규모는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총수 2세가 지배하는 기업일수록 그 비중이 더 빠르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아직 도입되지 않고 있으며, 대기업들의 골목 상권 장악은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봐도 무방하다. 별로 달라지지 않은 상황은 그밖에도 많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등록금"도 그중 하나다. 역시 이번 연설에서 나오지 않은 사회적 화두다. 이해찬 대표는 2012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등록금을 절반으로 낮춰 반값등록금을 실현하겠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1인당 GDP는 세계에서 32번째인데도 왜 우리 학생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등록금을 내야 합니까?"

지난 2월, 교육부에 따르면 2000년 연 451만1000원이었던 국내 4년제 사립대 평균 등록금은 2017년 739만9000원까지 올랐다고 했다. 2000년 이후 사립대 등록금이 64%나 오른 것이라고 했다. 2012년 -5.4%(국·공립대), -3.9%(사립대)였던 등록금 인상률은 2017년 각각 0.3%와 0.5%로 제자리 걸음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비싼 등록금이란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것도 있다. 그때 민주당은 집권에 도전하는 정당이었고, 지금은 집권에 성공한 정당이란 점이다.


태그:#이해찬, #재벌, #경제민주화, #빔콕, #반값등록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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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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