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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휴가도 이렇게 지나가버렸다. 샌드위치처럼 앞 뒤 주말까지 붙여 장장 9일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휴가라는 정해진 시간의 유속은 뒤도 안 돌아보고 무심히 흘러가 버렸다.

특히 가족과 함께, 커다란 캐리어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는 휴가는 넓은 관 안에 흐르는 물이 좁은 관을 통과하게 되면 급속히 유속이 빨라진다는 베르누이의 법칙처럼 시간의 블랙홀 속으로 정신없이 빨려 들어갔다.

거기에 이제 자신의 눈과 귀를 통해 세상 물정 좀 안다고 아무 때나 고집부리는 4살 배기 애 어른을 모시고 어르고 달래는 여행을 하다 보면 늦은 밤이 돼서야 겨우 제정신을 찾게 되고 여행의 느긋함을 맛보게 된다.

어쨌든 우리는 4박 5일간 베트남으로 떠났다. 폭염만큼이나 너무도 핫한 '다낭'에서 첫날을 보낸 후 '호이안'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아름다운 해변만큼이나 멋지고 으리으리한 리조트들로 수두룩한 곳이었다.

그 놈의 등장

그중 우리는 검색과 카페 등을 통해 아내가 고르고 고른 나름 최상의 리조트에 묵게 되었고 그곳에서 나머지 일정을 보내게 되었다.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는 길게 늘어선 숙소를 지나가던 중 벽에 뭔가 꿈틀거리는 작은 움직임을 감지했다. 도마뱀이었다.

한 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큰 놈 작은 놈 상관없이 여기저기 도처에 깔려 천지를 이루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동물의 등장에 신기해하며 아내에게 물었다.

"여기 도마뱀들이 많네?"
"응. 여기는 자연친화적인 곳이라 도마뱀들이 많대. 그런데 숙소 안에는 도마뱀이 없대."
"왜?"
"도마뱀은 추운 곳에는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숙소 안은 걱정할 필요 없대."

땀이 비 오듯 내리는 곳이라 숙소 안은 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야만 했다. 이런 상황을 나름 논리적으로 분석한 댓글과 아내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에 있는 동안 그 흔한 개미 한 마리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날, 아니 그 다음 날까지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 창문 커튼이나 방문을 아무 생각 없이 열 때마다 '척' 하니 붙어있어 나를 놀래 키는 그놈의 자태는 설마? 하는 염려병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긴장을 늦추면 안 되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혹시 분위기 파악 못하고 실수로 들어오는 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문과 베란다 창문을 급히 열고 닫기도 했다. 그렇게 나름 완벽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셋째 날. 결국 놈은 우리의 허를 찌르고 말았다.

종일 물놀이에 녹다운된 아이를 재우고, 기분 좋게 샤워를 마친 후 느긋한 저녁을 보내려고 하는 나에게 아내는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여보, 내가 기분 나쁜 이야기 하나 해줄까?"
"뭐… 뭔데?"
"저기 천장 봐봐."

보는 순간 기겁했다.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천장 벽에 붙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내의 손끝은 혹시나 했던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해주었고, 숙소 안에는 절대 없다는 확신의 댓글을 올린 익명의 그에게 사진 찍어 보내주고 싶었다. 한번 보시라고.

방법을 찾자

갑작스러운 비상사태에 한 손엔 인터폰을 잡고 한 손엔 번역 앱을 열고 일일이 영어로 번역하며 도마뱀이 있으니 얼른 잡아달라고 카운터에 요청했다. 직원이 오기 전, 혹시 내려올까 싶어 뚫어져라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중 '딩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문을 열었지만 직원이 들고 온 건 낡고 긴 막대기 딸랑 하나. 나는 과연 도마뱀을 잡을 의지가 있는 건가 싶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모르는 어떤 기술이라도 있겠지 싶어 막대기 하나를 들고 온 직원에게 천장에 붙어있는 도마뱀을 가리켰다. 낡은 막대기 하나에 의지해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는 실력을 보이는 직원. 리조트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걸 대비해 도마뱀을 잡는 뭔가 특별한 장비나 전문인력이라도 있을 거라는 나의 생각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어설픈 충격으로 자기를 잡으러 온 걸 안 도마뱀은 나무기둥 뒤에 숨어버렸고 아무리 충격을 줘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 막대기로 쳐본 직원은 아무 반응 없자 해결되었다는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반응에 나는 보답이라도 하듯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는 영단어를 총동원해 자고 있는 어린 아이 위로 도마뱀이 떨어지면 어쩔 거냐며 손짓 발짓 그리고 입짓까지 하며 내 뜻을 알렸다.

결국 위험한 동물은 아니라는 말만하며 뻘쭘해하는 직원 앞에 달리 방법이 없던 우리는 카운터로 전화를 걸었고, 아내는 방을 바꿔줄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사실 도마뱀이 우리 방에만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내키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직원은 잠시 누군가와 이야기하더니 마침내 '오케이'라는 말을 했고 우리는 한 차례 긴 한숨을 내쉰 다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짐을 다시 캐리어에 담기 시작했다. 이 해프닝에도 다행히 꿈속을 헤매듯 자고 있는 아이 덕분에 20여 분 만에 짐을 챙길 수 있었다.

짐을 다 챙겼다는 말에 이윽고 듬직한 직원 한 명이 우리 짐을 가지러 왔고, 나는 잠자는 아이를 그대로 업은 채 새로운 숙소로 이동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지만 수영장 주변에는 밤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분주했고 우리는 도마뱀이 없는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분주했다.

단독주택처럼 아담하게 생긴 숙소 안은 불이 꺼진 채 우리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은 깜깜한 방에 불을 켜고 캐리어와 가방을 숙소 안으로 옮겨주었다. 제법 넓고 바다가 보이는 위치라서 그런지 내부를 돌아보던 아내는 말했다.

"여기는 걱정 안 해도 돼. 아까 묵었던 방보다 좋은 곳이니 도마뱀은 없을 거야. "

나는 아내 말을 믿었지만 이 방을 믿을 수 없었다. 넓은 거실 뒤, 아직 가보지 않은 그곳, 어둠 속에 갇힌 샤워실과 화장실이 궁금했다. 나는 조용히 핸드폰 손전등을 켠 후 아내와 함께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다. 불빛은 바닥과 벽을 비춘 후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천장 쪽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러다 정적을 깨는 둔탁한 소리가 환풍기 쪽에서 들려왔고, 나는 얼른 그쪽을 비췄다. 제법 커다랗고 긴 꼬리를 가진 연둣빛 그놈이 허둥지둥 환풍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짧은 외마디 소리를 질렀고 나는 허둥지둥 인터폰 버튼부터 눌렀다.

아내의 비명소리에 더 놀란 도마뱀은 이미 환풍기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우린 지원군이 올 때까지 거실과 천장 등을 번갈아 보며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잠시 후 문들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제법 땅꾼처럼 보이는 두 명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우리는 또 한 번 어설픈 영단어를 써가며 다급히 환풍기 쪽을 가리켰고, 그들은 분주히 몸을 움직여 작은 놈 3마리를 잡아 보였다. 하지만 아내는 만족하지 않았다. "Big! Big!"을 외치며 제법 큰 놈이 환풍기 안에 있으니 잡아달라 요청했다.

그들은 대충 환풍기 망을 보는 듯하다 더 이상 아무 반응이 없자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가려 했다. 우리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잡아달라 요청하자, 그들은 도마뱀 사진이 들어간 안내표지판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위험한 동물이 아니니 안심하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돌아갔다.

지금 이걸 읽을 상황이아니라 잡아달라고요!
 지금 이걸 읽을 상황이아니라 잡아달라고요!
ⓒ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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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방을 바꿀 수도, 잡아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는 대략 난감한 이 상황에 불안감은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우리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일단 환풍기가 불안의 원인으로 지목된 만큼 더 이상 기어 나오지 않도록 뭔가로 막아야만 했다. 그래야 잠을 자고 샤워를 하고 볼일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뽀로로야 구해줘

우린 곧바로 가져온 가방과 물품을 뒤졌다. 뽁뽁이가 들어간 비닐 몇 개를 발견했지만 천장에 붙일 테이프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가져온 뽀로로 스티커가 생각났다. 다행히 스티커를 떼지 않은 것들이 많아 벽에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거라도 붙여야만 했다.

아내와 나는 부지런히 비닐을 자르고 이어 붙였고 제법 모양새를 갖춘 후 환풍기로 다가갔다. 붙이다 혹여 그놈이 기어 나올까 걱정도 됐지만 뽀로로와 그의 친구들이 진득하게 벽에 붙어있기만을 바랬다.

뽀로로 너만 믿는다. 제발 ^^;;
 뽀로로 너만 믿는다. 제발 ^^;;
ⓒ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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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싸하게 붙이고 나니 이제 한숨 돌려도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의 여유까지 생겼다. 우리는 대충 짐을 풀고 정리한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하필 침대가 있는 벽 위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환풍구가 있어서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젠 모르겠다 싶어 팔로 눈을 가린 채 잠들어 버렸다.

그 후 화장실에 가거나 세면 하러 갈 때면 무의식적으로 환풍기를 막은 비닐을 보게 되었고 아직 성실히 잘 붙어 있는 뽀로로의 모습을 보니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가끔 높은 천장에 붙어있는 작은 도마뱀 한두 마리가 보였지만 그들은 별 개의치 않은 듯 나를 대했고 나 역시 개의치 않았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만약 자고 있는 투숙객에게 다가와 물기라도 했더라면 이 리조트는 벌써 문을 닫았을 거라는 제법 큰 생각까지 하고 나니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졌다. 그래도 아직 새벽에 볼일이 급해 화장실을 가려해도 불현듯 그 놈들을 만나게 될까 두려워 바로 뛰어가지 못하고 10여분 정도 꾹 참다, 겨우 볼일을 보긴 했지만 어쨌든 귀국하는 날까지 도마뱀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었다.

수고했어 뽀로로 ^^
 수고했어 뽀로로 ^^
ⓒ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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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도마뱀은 보기엔 비호감처럼 생겼지만 성격이 온순해 애완동물로 많이 키우고 있고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도마뱀이 나오는 숙소는 오히려 깨끗한 곳을 뜻하기도. 여행 내내 팔과 다리가 가려웠지만 우리 가족 어디 물린 데 하나 없이 무사히 복귀한 사실을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인 것도 같았다.

사실 우리가 도마뱀의 등장에 치를 떨며 무서워했던 건 도마뱀 그 자체가 무서웠다기보다 오랜 도시환경 속에서 오로지 인간과 개,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 외엔 접할 수 없었던 자연생태계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에서 나온 반응 아니었을까?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물론 도마뱀 같은 건 없었지만) 우리가 살던 집 대부분은 온갖 벌레와 해충들로 바글바글 했다. 오죽하면 정부에서 '쥐를 잡자'라는 포스터까지 내걸 정도였으니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구호다. 중년의 나이쯤 된 사람이라면 어릴 적 부엌이나 방안, 화장실에서 그런 벌레나 해충들과 마주했던 추억이 한두 가지쯤 있을 것이다.

생활수준이 점차 향상되면서 깨끗한 주거환경을 자랑하는 아파트가 등장했고 콘크리트와 유리로 만들어진 수많은 건물이 우리 삶 속으로 파고들면서 이젠 조금이라도 더럽거나 지저분한 게 보이면 참지 못하고 무조건 제거해야 하거나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치부해 버리는 세상이 돼버렸다.(그렇다고 해충이나 벌레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병균을 옮기는 벌레는 당연히 제거되어야 한다)

심지어 우리 아이들 조차 흙이나 모래가 아닌 시멘트 바닥이나 인공 매트 위에서 뛰어놀아야 마음이 놓이는 세상이 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균실 같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것일까?

숙소 안에서 호들갑을 떨었던 우리는 작은 도마뱀에게 미안했다. 그저 인간들로만 꽉 차있는 도시 안에서 만물의 영장 행세나 하며 잘난 줄만 알았지 세상과 자연에 무지했던 우리는 그 작은 도마뱀 앞에 순간 머쓱했다. 이렇게 너와 나, 그리고 우리는 자연 앞에 무한히 겸손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나저나 그날 뽀로로 스티커라도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당시로선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이는 스티커가 없어진 것도 모르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는 사실. 들통나기 전 얼른 사둬야겠다. 아이를 위해 그리고 또 다른 만약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태그:#도마뱀, #뽀로로, #베트남, #호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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