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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100번째 달거리 공연에서 노래하고 있는 김원중.
 27일, 100번째 달거리 공연에서 노래하고 있는 김원중.
ⓒ 김원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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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땐 말보다 숫자가 더 강력하고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지난 8월 27일 100번째 공연을 마친 '김원중의 달거리 공연'만 봐도 그렇다.

2003 : 달거리 공연을 처음 시작한 해다.
2005 : 북녘 어린이들을 먹을 빵을 만드는 평양 대동강 빵 공장을 만든 해다. 김원중은 달거리 공연에서 후원금을 모아 빵 공장에 전달하고 있다.
750 : 지금까지 달거리 공연 무대에 올랐던 출연자 수다. 연인원이 아니다.
2000 : 달거리 공연을 만들어 온 스탭들 수다. 이것은 연인원으로 계산한 것이다.
30000 : 지금까지 김원중의 달거리 공연을 함께 한 관객 수다.

28일 전남 화순에서 만난 가수 김원중의 모습은 작업실 앞 초록의 숲처럼 여여했다. 지역에서, 15년 동안, 100회의 공연을 이어온다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그의 말대로 '엄청난 사건'이다. 그 '엄청난 사건'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왔다. 일본에서도 북녘의 빵 공장을 후원하는 8개 지부 대표들이 현해탄을 건너왔다.

'엄청난 사건' 중에서 '가장 엄청난 사건'은 북녘 어린이들이 먹을 빵을 만드는 빵 공장을 지은 것이라 했다. 2003년과 2004년 달거리 공연 때 모은 후원금 2천만 원을 전달했다. 2천만 원은 기폭제가 되어 빵 공장 설립에 속도를 내게 했다.

김원중은 "100회 달거리 공연을 돌아보며 등장한 숫자에서 오는 느낌이 좋다"고 했다. "작게 시작한 것이 쌓이니까 엄청나다"고 했다. 그리고 세 번 말했다. "광주니까 가능했다"라고.

"가수 김원중의 입장에서 봐도 달거리 공연은 참 중요하다. 달거리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는 난 창작하지 않았다. 달거리 공연을 하면서부터 창작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양한 음악적 실험과 도전을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바위섬>을 기타 반주로만 불러보기도 했고, 피아노와 단 둘이서 가기도 했고, 가야금과 함께 하기도 했고, 합창으로 부르기도 해보았다. 음악적으로 넓어지는 계기였다. 이런 다양한 시도와 경험을 가진 공연자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지역에서 이런 공연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노래가 갖는 힘과 지속성이 더해졌을 때 거기서 만들어지는 에너지와 감동이 구체적인 힘으로 만들어져가는 과정을 확인하는 일, 광주니까 가능했다. 5월 정신으로부터 출발한 광주니까. 천안함 침몰 사건을 보도하는 아침 뉴스를 보고나온 분들에게 저녁 때 북녘에 빵 보내자고 말하기 쉽지 않다. 그런 날에도 달거리 공연장엔 사람들이 있었다, 광주니까 가능했다.

오월광주는 우연이 아니다. 그런 정신과 기질로 살아온 우리를 확인한 것이다. 달거리 공연은 오월광주를 만든 정신과 힘이 면면히 이어져왔던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었다. 정말이지 광주니까 가능한 일이다."

 100번째 달거리 공연을 마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출연진과 스탭들. 지난 2003년부터 시작한 '김원중의 달거리 공연'엔 지금까지 750명이 무대에 섰고, 약 3만 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김원중은 "광주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100번째 달거리 공연을 마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출연진과 스탭들. 지난 2003년부터 시작한 '김원중의 달거리 공연'엔 지금까지 750명이 무대에 섰고, 약 3만 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김원중은 "광주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 김원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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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는 두 말할 것 없고 시인은 평범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750명 무대에 오른 이들은 다양하고 또 다양했다. 광주지역 뮤지션들은 물론 다른 지역 뮤지션들도 달거리 공연 무대에 올랐다. 타 장르의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미술, 문학, 무용, 연극... 다양한 콜라보가 실현되었다.

김원중의 달거리 공연엔 매회 이야기 손님이 등장한다. 100회를 넘겼으니 100명의 이야기 손님이 있었다. 세월호 가족들, 한승원 작가, 오덕호 목사, 박영산 도편수, 박남준 시인 등이 언뜻 떠오른다고 했다. 

"오덕호 목사님을 이야기 손님으로 모셨을 때 주제가 '거짓말'이었다. 목사님께 물어보았다. '선의의 거짓말은 해도 됩니까?' 2,3초 생각하시더니 '하면 안 됩니다'라고 하시더라. '왜 그렇죠?'라고 다시 물었더니 '선의란 것은 누가 결정합니까?'라고 하시더라."

100회로 달거리 공연이 막을 내린 건 아니다. 100회 공연을 끝내자마자 그는 다음 달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 달 공연이 열리는 날은 9월 24일, 추석이다. "분명히 추석 저녁에는 할 일 없을 것"이라며 "광주천 다리 위에서 놀자"고 했다.

가수가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특정일에 공연을 한다는 것은, 시인이 날짜를 정해놓고 한 달에 한 권씩 시집을 내는 일과 같다. 그 무지막지한 압박을 어떻게 이겨내는 것일까. 길게 물어볼 필요 없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준비하니까 그게 가능해지더라. 광주니까 가능한 일이다."

그놈의 '광주'! 천생 '광주사람'인 김원중은 요즘 또 다른 일로 광주와 전국의 벗들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광주와 부산에서 출발해 문화공연을 하며 평양을 거쳐 시베리아, 모스크바, 베를린까지 가는 '유라시아 로드 런' 프로젝트다.

 100번째 달거리 공연을 마친 뒷날, 전남 화순에 있는 작업실에서 짧은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김원중.
 100번째 달거리 공연을 마친 뒷날, 전남 화순에 있는 작업실에서 짧은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김원중.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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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좋아졌다고 급하게 만든 이벤트가 아니다. 전국의 49개 도시를 돌며 '잘 가라 지역감정'을 외쳤던 김원중. 길거리 순회 공연을 마친 2002년, 그는 지인에게 "지역감정 저것 갖고 평양으로 가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20여 년 세월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섬이냐, 우리도 평양 거쳐 유럽으로 한 번 가보자"고 했다. "꿈인가, 열망인가"하고 물었더니 "억울함"이라고 했다.

"어느 해인가 유럽에 갔을 때 일이다.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넘어가는데 국경을 언제 넘은지도 모르게 넘더라. 주 스위스 한국대사관에서 보내는 안내 문자를 받고서야 국경을 넘은지 알았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나? 우린 못한다. 우리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저녁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친구랑 회 한 점 먹을 수 있나. 우린 못한다.

그게 억울하지도 않다? 그게 나는 이해가 안 됐다. 속된 표현으로 쪽팔린다. 억울하지도 않나? 섬도 아닌데 섬처럼 살면서 쪽팔리지도 않나. 내가 '코리아-유라시아 로드 런'이라는 행동에 나서는 이유는 다른 거 없다. 가만히 있으면 쪽팔리니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하니까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휴전선이 열려서 북한도 가고 유라시아 대륙을 갈 것처럼 말한다. 예전에도 그랬다. 6.15 직후에도 글자 하나 안 틀리고 지금과 같은 분석과 예상들을 저마다 내놨었다.

그런데 어떻게 됐나, 정권 한번 바뀌니 글자 하나 남은 게 없다. 4.27남북정상회담은 문재인 대통령 개인기로 나온 게 아니다. 목숨 걸고 희망 걸었던 우리들의 걸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다양한 움직임들을 다시 해보자는 것이다. 말이 곧 현실이 되는 건 아니잖나. 달거리 공연이 100회가 될 무렵에야 작은 열매라도 맺혔듯이 말이다."

분단 현실을 극복하려는 문화 행동인 '코리아-유라시아 로드 런'에는 벌써 전국 각지에서 약 300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올해 하반기엔 워크숍 등을 통해 기본을 다지고, 내년부터는 전국을 돌 계획이다. 이번엔 국내 50개 도시를 돌며 '잘 가라, 지역감정' 대신 '잘 가라, 분단'을 외칠 가수 김원중. 그의 '직녀'는 늘 꿈과 열정으로 노둣돌을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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