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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프터서비스 기사는 수리비용, 소요 시간 등의 설명 대신 새 제품 구매를 권유했다.
 애프터서비스 기사는 수리비용, 소요 시간 등의 설명 대신 새 제품 구매를 권유했다.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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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PDP TV 화면이 꺼져버렸다. 어떤 전조증상도 없이 화면과 소리가 순식간에 먹통이 돼버린 것이다. 노트북 컴퓨터와 TV를 HDMI 케이블로 연결해 영화를 보던 중이었다.

TV 전원을 껐다가 켜보고, 케이블을 새것으로 바꿔 다시 연결해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리모컨으로 TV를 켤 때 딸깍거리는 소리도 나고 초록 불도 들어오니 전원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순간 전면에 열기가 느껴지는 게 화면 액정도 아직은 살아있는 것 같았다.

곧장 서비스센터에 도움을 청했다. 이튿날 약속한 시각에 맞춰 정비기사가 집을 방문했다. 늘 느끼는 바이지만, 가전제품과 인터넷 통신에 관한 한 우리처럼 애프터서비스가 빠른 나라는 전 세계에 없을 거라 장담한다.

빠른 것까지는 좋은데, 정작 애프터서비스라 할 만한 게 없었다. 정비기사는 TV를 켜보더니 전원엔 별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화면 액정이나 내장된 메인보드에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게 전부였다.

애프터서비스 기사는 수리비용, 소요 시간 등의 설명 대신 새 제품 구매를 권유했다. 액정이든 메인보드 등 교체하는 데 족히 수십만 원이 드니 차라리 새로 사는 게 낫다는 뜻이었다. 더욱이 이 TV는 수명이 짧은 모델이라면서, 9년이면 오래 쓴 편이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당황스러웠다. 현장 진단만으로 파악이 어렵다면, 적어도 정확한 진단을 위해 서비스센터에 싣고 갈 줄 알았다. 9년 전 사들일 당시에는 첨단기술 제품이라고 소개받았을 뿐, 수명이 짧은 모델이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가 '쓸 만큼 썼다'고 말하는 9년이라는 시간도, 솔직히 그리 오랜 기간이라 생각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고 기술이 진보하는 세상이라면, 제품의 수명도 그에 따라 길어져야 정상 아닌가.

그는 사용 연한이 오래된 제품이라 고장 나는 게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사실 우리 집 TV는 '장식용'이었다. 프로그램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긴 어렵지만, 우리 가족은 매주 금요일 저녁에만 TV를 켠다. 굳이 평균을 계산해본다면, 시청 시간이 하루에 채 20분도 안 될 정도다.

그나마 노트북 컴퓨터와 TV를 연결해 영화를 본 것도 최근의 일이다. 화면이 크고 선명하다는 것만 알았지, 지금껏 다양한 기능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었고 활용할 줄도 몰랐다. 아무튼 제품의 하자가 '복불복'이 아니라면, 단지 제작 연도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고장을 당연시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 집 TV는 절대 고칠 수 없었다

 업계에 따르면 전세계 TV시장에서 50~60인치대 제품의 시장점유율이 올해 처음 50%를 넘을 것으로 예측됐다. 반면, 지난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40~49인치 제품은 점유율이 2.6% 떨어졌다. 사진은 2017년 6월19일 서울의 한 할인매장에 전시돼있는 대형TV.
 업계에 따르면 전세계 TV시장에서 50~60인치대 제품의 시장점유율이 올해 처음 50%를 넘을 것으로 예측됐다. 반면, 지난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40~49인치 제품은 점유율이 2.6% 떨어졌다. 사진은 2017년 6월19일 서울의 한 할인매장에 전시돼있는 대형TV.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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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비용 정도로 저렴하고 성능이 좋은 신제품이 많다는 그의 말을 중간에 끊고 물었다. 새 TV를 살 때 사더라도, 우선 정확한 고장 원인은 알아야겠다고 채근했다. 거듭된 질문에 그제야 그는 진단 결과와 상관없이 수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고백했다. 액정이든 메인보드든 현재 같은 모델의 부품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집 TV가 이미 단종된 제품이라 부품이 생산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회사 내에서도 오래전에 PDP 사업부가 해체된 상태라며 양해해달라고 했다. 그럼에도 수리를 하겠다면, 전국 서비스센터에 남아있는 부품을 수소문하거나 중고품에서 떼어 내 재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부연했다. 물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기약이 없는 일이다. 결국 난 제품 수리를 위한 '애프터서비스'는 못 받고 새 제품을 사야 하는 이유만 설명받았다. 하나 마나 한 애프터서비스로 애먼 출장비만 허비한 셈이다.

우리나라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애초 제품의 수명은 기업에 의해 결정되고, 소비자에게는 사실상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일정 기간이 지나 기업이 관련 부품의 생산을 멈추면 그것으로 제품의 수명은 다하게 된다. 소비자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해도, 일단 고장이 나면 재고나 중고품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업들의 '전략'을 모르진 않았다. 지난해 초 17년 된 자동차를 폐차할 때 깨달았다. 이태 전부터 도미노 블록 쓰러지듯 곳곳이 고장 났는데, 그때마다 부품을 구할 수 없어 여러 정비업체를 전전하곤 했다. 새것은커녕 다른 자동차에서 뜯어낸 중고품조차 귀해서, 그저 도로 위에서 서지 않길 기도할 뿐이었다.

정비업체 이곳저곳을 찾아갈 때마다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똑같은 조언을 들었다. 그만하면 오래 탔다는 '칭찬'부터, 애초 기업이 생산할 때부터 교체 주기를 감안하기 때문에 때가 되면 예외 없이 고장이 날 수밖에 없다는 '위로'까지 한결같았다. 해외에서 호평받는 좋은 차 아니냐는 '우문'에, 내수용과 수출용은 품질이 원래 다르다는 '현답'이 나오기도 했다.

고쳐서 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는데,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 흔한 접촉사고 한 번 나지 않은 차였지만, 더 이상 부품을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수리하는 비용이 찻값을 훌쩍 뛰어넘어 울며 겨자 먹기로 새 차를 살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신제품 광고에서 '내구성'이라는 말이 사라져버렸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고 여기는 걸까. 신제품은 시장에 마구 내놓으면서도, 파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을 뿐, 이미 판매된 제품에는 그만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거칠게 말해서, 팔 때는 환심을 사기 위해 별의별 짓 다 하다가 팔고 나면 서둘러 싫증을 내도록 만드는 꼴이다.

자동차든, 가전제품이든, 스마트폰이든, 우리나라에서 신제품의 교체 주기가 유난히 짧다는 건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교체 주기가 자동차는 평균 7년, 스마트폰은 채 1년도 안 된다는 충격적인 통계자료도 있다. 따지고 보면, 이는 이러한 기업의 판매 전략에 많은 소비자들이 현혹된 결과다.

교실에 꽂힌 충전기에 놀란 이유

구입한 지 10년도 더 된 '폴더 폰' 아이는 충전기가 고장이 나서, 멀쩡한 휴대전화까지 버리게 생겼다며 울상을 지었다.
▲ 구입한 지 10년도 더 된 '폴더 폰' 아이는 충전기가 고장이 나서, 멀쩡한 휴대전화까지 버리게 생겼다며 울상을 지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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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이를 수업 소재로 삼아 아이들과 생각을 나눠볼 요량으로 교실에 들어갔다. 순간 교실 한쪽 구석 콘센트에 꽂혀있는 낡은 휴대전화가 눈에 띄었다.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한 아이가 당황스러워하는 낯빛으로 담임선생님의 허락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정작 놀란 건, 수업시간에 왜 휴대전화를 꺼내 충전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아직도 흠집투성이인 낡은 '폴더폰'을 사용하고 있는 아이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구매한 지 10년도 훌쩍 넘은 구형이란다. 어른이고 아이고 한두 해만 지나도 고물 취급하며 새 스마트폰을 구입하지 못해 안달하는 세태라, 마냥 신기해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아직은 별 고장이 없어 사용할 만한데, 문제는 충전기란다. 접촉 불량 탓인지 충전이 됐다 말았다는 반복한다는 것이다. 낡고 오래 사용한 탓이지만 새 충전기를 구할 수 없어 혹여 잃어버리거나 고장이 나면 멀쩡한 휴대전화까지 함께 못 쓰게 된다면서 무척이나 애지중지했다.

한때 우리 사회에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이른바 '아나바다'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고장 난 충전기 하나에 애면글면하는 그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낡고 오래된 것은 설 자리가 없다는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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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