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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손이 부족하다'

일을 할 사람이 모자랄 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나 또한 자주 쓰는 말이지만 어느 순간 저 문장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손은 신체의 일부이며, 나는 나의 몸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자체다.(정희진의 말처럼 '나의 몸은 나의 것'과 같이 자신의 신체를 대상화 하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차라리 '나의 몸은 나다'가 더욱 정확하다)

즉 이렇게 보면 저 말 속에서 나는 곧바로 하나의 노동력으로 치환된다. 이런 식의 표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제 사람들은 한 명의 개인을 노동을 하거나 할 수도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인력(人力)'으로 바라본다. 노동자를 인간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현상의 원인 중 하나다.

문제는 그 사람이 고통 받는가, 부당한 처우를 견디고 있는가, 위험한 환경에 놓여 있는가가 아니라 '제 기능을 하는가'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런 식의 비인간성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계급, 성별, 지위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존재한다. 이는 신체적 차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장애가 있는 사람, 몸이 아픈 사람이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책 <아픈 몸을 살다>에서 저자인 아서 프랭크는 자신의 사연을 들려준다. 그는 암에 걸려 한동안 학교에 출근을 할 수 없었는데, 그 해의 교수 연례평가서에 이 시기가 '학문적 생산성이 부족'한 때로 서술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학교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의 건강이 아니라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느냐'였던 셈이다. 프랭크는 이를 몸을 살아온 역사가 있는 삶으로 보지 않으며 생산의 자원으로만 사고한 결과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현상에 보다 근본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 대부분이 일하는 공적인 조직들은, 인간에게 몸이 있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돌봐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부정당하는 질병의 경험

 그러니까 질병이 부정될 때, 총체적인 개인의 경험은 파편화 되고 그 곳에는 부분적이거나 부수적인 요소들만이 남는다
 그러니까 질병이 부정될 때, 총체적인 개인의 경험은 파편화 되고 그 곳에는 부분적이거나 부수적인 요소들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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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성격을 부정하는 것은 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는 더 나아가 몸의 경험이 부정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아서 프랭크는 자신이 겪은 일을 '질병이 부정당한 경험'으로 규정한다.

무슨 의미일까? 이를 알기 위해선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다. 질환은 주로 의학의 관점이며 여기서 몸은 생리학적으로 분석되고 처리되어야 할 대상으로 파악된다. 의사가 혈당 수치나 혈압, 골밀도 등을 통해 환자를 규정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하지만 환자가 자신의 몸을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사와 달리 환자에게 자신의 몸은 외부의 장소가 아니기에 대상화가 되지 않는다. 앓는 개인에게 병은 경험이다. 질병은 이를 포착하는 단어다. 고통, 기쁨과 절망, 공포, 바뀌어 가는 일상과 변화하는 신체 그리고 그것이 주는 느낌과 의미,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통합된 개념이다.

그러니까 질병이 부정될 때, 총체적인 개인의 경험은 파편화 되고 그 곳에는 부분적이거나 부수적인 요소들만이 남는다. 앞서 언급한 사례로 설명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병에 걸리고 그 몸으로는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 생산성이 부족하다는 꼬리표를 다는 것은 불공평하다' 대신 '생산성이 부족하게 되었다'만 남는 셈이다.

혹은 질병으로 인해 발생한 (사람들이 기피하는) 외형적 변화,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소극적이거나 방어적인 태도 그 자체만이 남는다. 세상이 아픈 이를 이해할 아무런 단서를 남기지 않을 때, 결국 그 사람은 죄책감 속으로 던져진다.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단순한 몰이해와 무관심 때문일까?

왜 아픈 사람이 죄책감을 가져야 할까?

 사람들은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죄책감을 가지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죄책감을 가지기를 원한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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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이건 아니건, 확실히 사람들은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죄책감을 가지기를 원한다. 질병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인정함은 그것의 시작과 끝을 모두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질병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무작위로 대상을 선택해 찾아온다.

병이 예고장을 날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완벽한 치료 역시도 불가능하다. 치유를 가장해 우리는 생을 연장할 뿐 우리가 삶의 마지막으로 겪게 될 질병은 결국 죽음을 동반할 것이다. 즉 질병 경험은 우리의 삶이 불확실하며 때로는 심각하게 고통스럽고 언젠가는 끝이 남을 알려준다. 한마디로 취약함이 인간의 보편적인 조건임을 지시하는 셈이다.

젊고 건강한 사람들 중 이 사실을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질병'의 경험은 부정되며 아픈 사람들은 많은 이들에게서 멀어지고 낯선 대상이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얼마 전 형의 결혼식이 참석했던 날 나는 유독 우울한 표정이던 한 친척을 기억한다. 부모님께 저 분은 이 좋은 날 왜 저리 얼굴이 어둡냐고 물었다. 대답을 듣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에 한복을 자주 입을 일이 없기에 마침 결혼식에 오는 김에 영정 사진을 찍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 분의 나이가 아흔에 가까웠다. 준비할 때가 된 셈이다.

아마도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주변에 그런 사람들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최소한 그들의 육신이 쇠락하고 질병을 경험하며 끝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격하거나 혹은 돌봄에 동참해야할 것이다. '생'에 더하여 '노/병/사'가 내 삶의 직접적인 일부분이 될 시기가 점차 머지않게 되는 중이다. 나 또한 준비가 필요하다.

질병이 싸움의 '대상'이 아닐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우리는 자신의 혹은 다른 사람의 질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자신의 혹은 다른 사람의 질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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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혹은 다른 사람의 질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시 한번 아서 프랭크의 통찰을 빌리고 싶다. <아픈 몸을 살다>에서 그는 질병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암이 있는 몸 또한 자신의 몸이며 종양은 그 일부임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두 편으로 분리될 수밖에 없다. 건강한 원래의 나와 그런 나를 공격하는 나쁜 종양으로. 이렇게 될 때 신체과정이자 경험으로서 질병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이는 질병을 가진 사람이 그 자체로 온전히 이해받는 것을(혹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고 서둘러 빠져나와야 할 비정상적인 신체 상태에 놓인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또 다시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질병에 낙인이 찍힌다. 하지만 병이 사라지는 것은 절대 사람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자신의 몸에 낙인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야한다. 이게 최선일까?

"어떤 사람은 살아남아서 승리하고, 어떤 사람은 죽어서 승리한다."

아서 프랭크는 질병이 다른 누군가에 맞서 벌이는 싸움이 아니라 길고 고된 노력임을 주장하며 이렇게 적었다. 그는 질병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씨름을 해야 하며, 무엇보다 '씨름'과 그것을 하는 사람이 이미 온전함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저 문장에서 위로를 얻었다. 질병을 가진 이들이 살아남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이 생존에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망가지거나 부서진 것이 아니라 단지 누구나 겪게 될 삶의 다른 영역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이렇게 환자를 온전히 존중할 때, 질병을 가진 사람도 그들의 곁을 지키는 사람도 서로를 향해 진솔하게 다가설 수 있다. 느끼고 경험한 바를 가감없이 교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우리는 질병에 대한 필요이상의 의미부여와 두려움을 거두고 낙인을 찍거나 그 경험을 소외시키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아는 것과 겪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질병이 초래하는 고통과 그것을 겪고 바라보는 일에 대한 공포는 우리가 지닌 선입견을 넘어서길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력은 하고 싶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사랑하는 이들을 그 모습 그대로 온전히 끌어안고 싶다. 그들의 취약함, 유한함, 불안정함까지도. 그리고 이는 또한 모두 나의 것이기도 하다. 책 <모성적 사유>에서 사라 러딕이 쓴 문장을 마지막으로 인용하고 싶다.

"그리고 군사 전략가는 단지 착취하기 위해 육체의 상처입기 쉬움에 주목하고, 철학자는 육체의 실재성을 초월하려 하지만, 보살피는 사람은 육화된 존재(embodied being)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고통과 쇠퇴를 정확하게 인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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