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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얼예술특구 전경 가오슝의 떠오르는 랜드마크로, 일제 식민지 시절 각종 자원을 수탈해 간 항구 터를 그대로 남겨두었다.
▲ 보얼예술특구 전경 가오슝의 떠오르는 랜드마크로, 일제 식민지 시절 각종 자원을 수탈해 간 항구 터를 그대로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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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동안 타이완 남부의 여러 지역을 두루 여행하며 만난 공통적인 풍경이 하나 있다. 크든 작든 도시의 한복판에 당장 허물어질 듯한 낡은 건물들이 넓은 터와 함께 주인 행세를 하며 버젓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타이완 제2의 도시인 가오슝(高雄)의 옛 항만 시설이 그렇고, 태평양에 면한 작은 도시 타이둥(台東)의 옛 기차역 건물 또한 그렇다.

대개 한 세기 전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이거나, 도시의 권역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공공시설 등이 이전하는 바람에 남겨진 것들이다. 유동인구가 많은 도심인 데다 건물의 수도 많고 터도 넓어, 우리 같으면 당장 재개발을 시작해 고층 빌딩이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을 법한데 옛 모습 그대로다. 심지어 잡풀조차 무성해, 어쩌면 방치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건물 안을 현대적으로 새로 꾸미고, 넓은 터에 설치미술작품이 띄엄띄엄 서 있는 것 말고는 실상 '폐허'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스꽝스러운 건, 그렇듯 손대지 않고 내버려 둔 곳마다 '공원'이나 '특구', '문화촌' 등의 근사한 이름을 붙여 놓았다는 점이다. 나름대로의 보존 방식일 테지만, 허름한 외관만 봐서는 도무지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다.

보얼예술특구의 낡은 창고 벽 야적 창고로 쓰인 건물 벽마다 도화지 삼아 다양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가오슝 지역의 청년예술가들의 솜씨라고 한다.
▲ 보얼예술특구의 낡은 창고 벽 야적 창고로 쓰인 건물 벽마다 도화지 삼아 다양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가오슝 지역의 청년예술가들의 솜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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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얼예술특구를 관통하는 노면전차 옛 철길의 일부는 보얼예술특구와 지하철 역을 잇는 노면전차의 철로로 활용되고 있다. 노면전차는 낡디낡은 공원에 유일하다시피 한 새 것이다.
▲ 보얼예술특구를 관통하는 노면전차 옛 철길의 일부는 보얼예술특구와 지하철 역을 잇는 노면전차의 철로로 활용되고 있다. 노면전차는 낡디낡은 공원에 유일하다시피 한 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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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오슝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보얼(駁二) 예술특구'는 일제 식민지 시절 내륙의 삼림자원과 설탕 등을 실어 나르던 옛 항구 터다. 보얼이라는 이름도 선착장을 의미하는 영어 'PIER'의 중국식 발음인 듯하다. 낡은 창고는 미술관과 공연장, 서점과 카페 등으로 탈바꿈했고, 벽돌이 드러난 갈라진 콘크리트 벽면에는 만화영화의 주인공 등 다양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창고들 주변에는 당시 사용된 방사상의 수십 갈래 철길이 녹슨 채 그대로 깔려 있다. 한쪽에는 수명을 다한 낡은 증기기관차가 무심히 철길 위에 얹혀 있고, 바로 옆에 놓인 철길은 최신식 노면전차의 발이 되어 아직도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철길의 방향을 제어하던 갖가지 쇠붙이들은 모두 뜯겼지만, 설치미술작품으로 되살아나 관광객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사진을 통해 몇 해 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보고서야 예술특구로 조성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뜯기고 설치되며, 또 지워진 뒤 새로 그려지고 있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건, 새 건물이 들어서거나 도심의 확대 등으로 인해 특구의 면적이 줄어들거나 훼손되지 않는다는 거다. 달라진 거라곤 기껏해야 노면전차의 정류장이 새로 생겼다는 것 정도다.

가득 채워져 있으면 담을 수가 없고, 완성된 상태로는 더 이상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낡으면 낡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둔 것 아닐까 싶다. 보얼 예술특구를 몇 해 전에 다녀온 여행자와, 나처럼 올해 찾은 이들, 그리고 몇 년 후에 찾아갈 이들은 각각 같은 장소에서 다른 것들을 보고 전혀 다른 느낌을 가슴에 담아오게 될 것이다.

보얼 예술특구의 설치미술작품이든, 낡은 창고의 인테리어든, 벽면의 알록달록한 그림이든, 대부분 가오슝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년 예술가들의 솜씨라고 한다. 어느덧 퇴락한 도시의 역사적 장소를 청년들에게 내어주고, 그들의 무한한 꿈과 끼를 도시 재생에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청년들의 재능과 열정을 펼치기에는 낡고 미완성된 상태가 더 낫다는 판단인 성싶다.

옛 기차역이 젊은이들의 포토존으로

타이둥 도심의 옛 기차역 운행을 멈춘 낡은 기차와 플랫폼, 팻말이 을씨년스럽지만, 주말 저녁이면 세련된 축제의 장으로 변모한다.
▲ 타이둥 도심의 옛 기차역 운행을 멈춘 낡은 기차와 플랫폼, 팻말이 을씨년스럽지만, 주말 저녁이면 세련된 축제의 장으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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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타이둥의 옛 기차역도 가오슝의 보얼 예술특구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몇 해 전 기차역이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기존의 철로와 터가 도시 한복판에 그대로 남았다. 워낙 사통팔달의 교통의 결절지라, 옛 역사(驛舍)를 시내와 주변 지역을 잇는 버스 터미널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기차 시간표를 뗀 자리엔 대신 버스 시간표가 붙어 있다.

승객들이 타고 내리던 플랫폼도 여전하고, 역 이름이 적혀 있는 나무 팻말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다. 여러 갈래의 철로가 거미줄처럼 깔린 터는 잡풀이 무성해 언뜻 을씨년스럽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동네 마실 다니듯 즐겨 찾는 공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듣자니까, 옛 기차역 주변은 타이둥 시내에서 신혼부부들이 가장 선호하는 웨딩포토 촬영지라고 한다.

가동을 멈춘 타이완 최초의 설탕공장 무너질 듯한 낡은 건물과 먼지 수북한 녹슨 기계가 그대로 보존된 가오슝 설탕공장에는 웨딩포토를 찍는 신혼부부와 소풍 온 학생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 가동을 멈춘 타이완 최초의 설탕공장 무너질 듯한 낡은 건물과 먼지 수북한 녹슨 기계가 그대로 보존된 가오슝 설탕공장에는 웨딩포토를 찍는 신혼부부와 소풍 온 학생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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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이번 여행 중에 웨딩포토를 찍는 신혼부부들을 유독 자주 만났는데, 마치 공식처럼 '빈티지' 물씬 풍기는 낡고 오래된 건물 등을 배경 삼고 있었다. 보얼 예술특구의 낡은 창고가 화려한 웨딩드레스와 의외로 잘 어울리는데, 가오슝의 '차오터우 공장(橋頭糖廠)' 안 가동을 멈춘 기계와 고철더미 앞도 그들을 위한 대표적인 '포토존'으로 되살아났다.

기실 그곳은 타이완 최초의 설탕공장으로 문 닫은 지 수십 년도 더 지나 건물 내부는 종일 어두침침하고 해질녘이면 음산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일제 식민지 시절인 1902년에 세워진 당시의 공장 건물과 굴뚝, 더께로 뒤덮인 녹슨 기계 등이 괴기스러운 옛 모습 그대로다. 이것도 볼거리라고, 가오슝 인근의 학생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소풍 장소라고 한다.

타이둥의 옛 기차역 주변도 '티에화춘(鐵花村)'이라는 폼 나는 새 이름을 얻었다. '티에(鐵)'는 기차역이 있었던 자리라는 뜻이고, '화(花)'는 삭막한 그곳에 꽃을 심고 가꾸었다는 의미로, 여기서 꽃이란 예술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말하자면, '옛 기차역 주변에 조성한 예술인들의 마을'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카페로 변신한 역 주변의 콘테이너 타이둥 옛 기차역 곁엔 콘테이너를 개조한 카페와 서점, 식당이 성업 중이다. 이 콘테이너 상가는 티에화춘의 시작 지점이기도 하다.
▲ 카페로 변신한 역 주변의 콘테이너 타이둥 옛 기차역 곁엔 콘테이너를 개조한 카페와 서점, 식당이 성업 중이다. 이 콘테이너 상가는 티에화춘의 시작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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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에화춘의 길거리 공연 어둠이 내리면, 타이둥의 옛 기차역 주변 곳곳에선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우리로 치면 군 단위의 작은 도시인데, 예술의 향기 가득한 밤 풍경이 조금은 부러웠다.
▲ 티에화춘의 길거리 공연 어둠이 내리면, 타이둥의 옛 기차역 주변 곳곳에선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우리로 치면 군 단위의 작은 도시인데, 예술의 향기 가득한 밤 풍경이 조금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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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어둠이 깔리면 티에화춘에는 열기구 모양을 한 수백 개의 전등이 가로등처럼 불을 밝혀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매 주말과 휴일 저녁이 되면, 이곳에선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과 주민, 관광객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축제의 마당이 펼쳐진다. 옛 기차역 주변은 순식간에 '예술의 거리'로 탈바꿈되며, 낭만과 열정의 파티가 밤새 이어진다.

어둠이 내리면, 티에화춘 거리 곳곳에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기타와 베이스, 드럼 등을 모두 갖춘 록밴드부터 색소폰과 바이올린 독주, 어쿠스틱 기타에 해금 연주를 입힌 젊은 음악인들의 라이브 공연이 동시에 펼쳐진다. 비록 지역에 사는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꾸미는 무대라곤 하지만, 연주 실력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개중엔 곁에 자신들의 앨범을 쌓아두고 판매하는 이들도 많다. 길거리 공연을 등용문 삼는 듯한 앳된 연주자도 있고, 서로 다른 악기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젊은 부부 악사의 모습은 정겹기만 하다. 낡은 철로 곁 넓은 잔디밭에서는 벼룩시장도 열리는데, 지역 예술가들이 직접 만들어 파는 악기와 그림, 고급스러운 장신구 등이 눈길을 끈다.

탁 트인 공간에 입장료가 있을 리 없고, 수준 높은 연주에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지만, 이곳을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지갑을 연다. 물건을 사라고 부추기는 이도 없고, 바가지 상혼에 눈살 찌푸릴 일도 없어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고 싶어진다. 타이둥의 티에화춘은 낮엔 편안한 휴식을, 밤엔 뜨거운 열정을 그 누구에게든 무상으로 제공한다.

가오슝의 보얼 예술특구와 타이둥의 티에화춘은 외관상 낡고 보잘것없는 공터에 불과하지만, 두 도시의 어엿한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청년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생산자'가 되고, 주민과 관광객들이 '소비자'로서 즐겨 찾다 보니 시나브로 그렇게 된 것이다. 크고 높고 화려한 새 건물이 도시의 주인 행세를 하는 시대는 갔다는 점을 두 곳은 증명하고 있다.

예컨대, 보얼 예술특구에서 올려다 보이는 '85 스카이 타워'는 타이완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빠른 승강기를 보유한 것으로 유명한 가오슝의 최고층 건물이다. 한때 타이베이에서 가장 높은 '101 빌딩'과 경쟁하며 가오슝을 대표하는 명소였다지만, 지금 그러한 '순위'에 집착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전형적인 후진국형 관광지라는 인식 때문이다.

일정상, 예술의 향기 가득한 티에화춘의 밤 풍경을 불과 몇 시간밖에 보지 못한 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다. 그나마 보얼 예술특구는 국제공항이 있는 가오슝에 자리한 덕에 출국하기 전날 한 번 더 둘러볼 수 있었다. 시간이 남아서라기보다 처음 갔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해 부러 다시 찾은 것이다. 몇 번을 가도 또 가고 싶고,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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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