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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설치 노동자 마니와 9살 동생 딜시아 샤니스 로페즈, 오누이의 엄마. 텍사스에서 출발한 마니의 부인과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온두라스에서 온 가족 에어컨 설치 노동자 마니와 9살 동생 딜시아 샤니스 로페즈, 오누이의 엄마. 텍사스에서 출발한 마니의 부인과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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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일 월요일, 워싱턴D.C.에서 버스를 타고 뉴욕에서 도착한 새벽부터 다시 노숙 여행을 시작했다. 호텔이든 도미토리든 아마도 숙소 가격이 세계에서 제일 비싼 곳이 이곳 뉴욕의 중심 맨하탄이 아닐까. 브루클린의 6인실 도미토리가 최소 40달러부터 시작한다.

인터넷으로 '뉴욕 노숙'을 검색하니 한국 청년 두 명의 노숙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멀리 자유의 여신상을 거치면서 맨하탄과 스테이튼 섬을 오가는 '사우스 페리'는 자산가의 기부로 24시간 무료로 운영된다는 것, 버스 터미널 포트 어쏠리티에서 비교적 안전한 노숙이 가능하다는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라이더 미즈키씨에게 낭만의 기운을 얻은 것처럼, 인터넷에서 검색한 여행자들의 기록에서도 정보뿐 아니라 동료 의식과 우정을 느끼곤 한다. 감사한 일이다.

 뉴욕 터미널의 노숙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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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터미널에서의 첫 번째 뉴욕 노숙이 별 탈 없이 끝났다. 두 번째부터는 무서움이 줄어든다. 노숙하다가 옆에 있는 다른 노숙자나 여행자와 눈이 마주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웃음을 주고받을 때가 많았다. 시끌벅적한 터미널의 피곤한 새벽에 이 동질감과 말 없는 공감은 커다란 안심과 위안이 된다. 안전하고 깨끗한 숙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밑바닥의 느낌이다.

둘째 날은 브루클린 다리 옆 이스턴 강변 한적한 곳에 텐트를 쳤다. 사우스 페리에서는 경비원들이 잠자는 걸 막았고, 역 앞 벤치에는 모기가 많아 잠들기 어려웠다.

'자유의 동상'. 'statue'가 왜 '여신'으로 번역되어 사용되는걸까
▲ 자유의 여신상 '자유의 동상'. 'statue'가 왜 '여신'으로 번역되어 사용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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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 모르겠다. 텐트를 치자. 건달이든 경찰이든 동료 홈리스든 누구든 깨울 테면 깨우시오'

요세미티, 그랜드캐니언 이후 오랜만의 텐트다. 13kg 가방을 메고 맨하탄을 남북으로 걸어 다니자니 가장 무거운 짐 1.8kg 텐트를 몇 번이고 던져 버리고 싶었는데 이럴 땐 참 고마운 텐트다. 새벽 내 지나는 사람 하나 없었던 나만의 리버 사이드 뷰 텐트 하우스. 행운의 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텐트 대신 다른 물건들을 줄였다. 수건, 바지, 셔츠를 가방에서 빼내어 다른 노숙인 가까이에 놓아두었다. 500g 정도는 줄인 것 같다. 수건이 없어도 손수건이 있으니까, 노 프라블럼.

 나만의 맨하탄 강변 호텔 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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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텐트 옆 브루클린의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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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실베이니아 역 귀퉁이에 깔개를 깔고 잘 때는 새벽 세 시에 나를 발견한 경비원이 잠을 깨웠다. 다행히 몸에 손을 대거나 하진 않았고 강한 말투로 "Sir!" 하고 불렀다.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수많은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수많은 노숙인이 테이블에 엎드리거나 의자에 기대어 선잠을 청하고 있었지만, 관리인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잠을 깨우고 밖으로 몰아냈다.

 맥도날드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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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는 깨끗하고 멋지고 커다랗고 텅 빈, 마천루라 불리는 빌딩들이 세상에서 가장 많았으나 홈리스들은 그곳으로 한 발짝도 들어갈 수 없다. 모든 건물 입구를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었고 대부분의 경비원은 흑인이었다.

 화려한 뉴욕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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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끔한 빌딩들 밖에서야 어느 누가 어느 귀퉁이에서 상자를 깔고 자든 쥐들과 함께 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창백한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내부의 티 없는 청결을 유지한 빌딩들 한 발짝 밖은 오줌 냄새와 쓰레기, 쥐와 노숙인들로 가득했다.

 월스트리트 아래에 잠든 노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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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버스 터미널이, 새벽에 바닥에 누워있는 신체를 제재하지 않는 뉴욕의 유일한 공공건물일 것이다. 그나마 새벽에는 티켓이 있는 사람만 출입이 가능하다. 차량 안내 방송과 청소 시간이 종종 잠을 깨우지만, 그 정도는 별일이 아니다. 바닥의 한기야 내 정든 깔개 한 장이면 거뜬히 막을 수 있다. 네다섯 시간 눈을 붙이고 일어나면 어느 정도 피로가 가신다. 해가 뜨면,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절로 행복해진다.

 뉴욕 터미널에서 정든 깔개를 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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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모이, #세계여행, #세계일주, #미국횡단, #뉴욕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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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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