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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합법화의 스페인어인 'Aborto legal' 전단지가 지하철의 창문에도 붙어있다.
 낙태 합법화의 스페인어인 'Aborto legal' 전단지가 지하철의 창문에도 붙어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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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많이 차졌다.

시린 손가락을 꼽아가며 이 도시에서 지낸 달 수를 세어 본다. 거의 반년. 벌써 이만큼의 시간을 지구 반대편에서 보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푹푹 찌는 날씨에 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칠레 국경을 넘던 게 어제 일만 같은데 지금은 슈퍼에 빵만 사러 가도 옷깃을 단단히 여미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하면 사람들의 옷차림도, 거리마다 가득한 가로수의 모습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늘 변함없는 몇 가지가 있다. 바로 출퇴근 시간대의 교통지옥(정말로 서울에 버금갈 정도이다!), 더우나 추우나 현지인과 함께하는 마테(Mate) 차, 거리의 너저분한 개똥들 그리고 녹색 반다나 정도가 되겠다.

갑자기 웬 녹색 반다나냐 하시면 사연은 이렇다. 우리의 선입견과는 다르게 중남미의 상당 국가는 보수적, 종교적인 경우가 많다. 아르헨티나도 그중 하나로 이런 배경은 자국의 정치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낙태가 불법'인 데에 있다.

물론 임신이 산모의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경우나 성폭행을 당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경우에는 중절수술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합법적인 수술은 불가하다(라고 적었지만 실은 이런 경우로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비싸고 위험한 불법 중절 시술이 암암리에 자행되고 있는데, 이것이 하나의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반발한 많은 여성들이 연대해 '낙태 합법화'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낙태 합법화라는 말은 '임신 초기 낙태 허용'을 뜻하는 말로 임신 14주 이내라면 '누구든 자유롭게',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녹색 반다나는 이를 지지하는 일종의 상징이다.

남의 집 담벼락에도 그들의 표어를 새기는 등 시위열기가 점점 과격해지고 있다.
 남의 집 담벼락에도 그들의 표어를 새기는 등 시위열기가 점점 과격해지고 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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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안이나 식당, 공원, 쇼핑센터에 내가 일하는 영어학원까지, 그 어디든 가방이나 옷자락에 이 반다나를 매단 여성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비단 여자들뿐만이 아니라 남자들까지도 눈에 종종 띈다. 나이대는 교복 입은 어린 학생들부터 7080세대까지 다양하지만 주로 이삼십대 여성들이 가장 많이 보인다.

낙태 합법화를 지지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의 수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 이슈가 아르헨티나 국내에서 오랫동안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가 한동안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음은 물론이다. 나는 현지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는 이유로 각자 다른 입장을 고수하는 학생들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은행원 M씨 : "임신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야. 한 생명이 태어날 준비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 모두의 소관인 거지.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좌지우지할 권한이 없어. 그게 아무리 한 개인의 신체에 관련된 일이라고 해도 말이야."

대학생 A 양 : "낙태 합법화 자체에 대해서는 찬성해. 하지만 문제는 여느 다른 수술들처럼 이것도 무료라는 거지(아르헨티나에서는 거의 모든 의료지원이 무료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이 생명을 얼마나 더 경시하겠어. 그리고 모두들 알다시피 우리 경제는 파탄을 치닫는데(실제로 IMF가 터진 지 얼마 안 되었다) 도대체 나랏돈을 얼마나 더 쓰려는 건지 모르겠어."

전업주부 L씨 : "이혼도 재혼도, 이것도 저것도 합법인 나라에서 왜 낙태만 합법이 아닌지 이해가 안 가. 나처럼 딸 있는 부모만 이 마음을 알까?"

이외에도 서유럽처럼 미래에 나라의 생산 인구가 줄어든다는 등 여성 전문 인력들의 커리어에 큰 지장을 준다는 등, 나라 자체가 싱글맘, 싱글대디를 위한 복지정책 마련이 안 돼 있다는 등 여러 의견들을 접할 수 있었다. 단지 찬성과 반대 의견뿐 아니라 다양하게 세분화된 의견을 가진 학생들도 꽤 되었다.

지난 8월 8일, 의회의 상원은 하원이 지난 6월에 가결시킨 안건을 다시 검토했고 현지시각으로 오후 무렵에 의사당 앞은 셀 수 없이 많은 녹색  반다나들이 파도처럼 물결쳤다. 안건 지지자들이 힘을 보태러 나온 것이다. 물론 파란 손수건을 매단 반대파 부대도 한 자리에서 시위를 벌이며 초조히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회 내에서의 끝도 없는 공방전에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자정이 넘어 들려온 소식은 7표를 차이로 법안이 부결되었다는 것. 일순간 의회(Congreso) 앞은 연방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와 환호로 뒤덮였다.

삼각형 모양의 녹색 반다나에는 이런 '낙태합법화'를 주장하는 표어가 있다.
 삼각형 모양의 녹색 반다나에는 이런 '낙태합법화'를 주장하는 표어가 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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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집에서 늦은 저녁을 지어먹고 현지인 식구들과 뉴스를 보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가 고향의 엄마 또래이신 호스트 맘 릴리는 한숨을 길게 내쉬셨다. 그리고 입을 여신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녀는 이어 바로 보드카를 찾으셨다. 밤이 깊어 텔레비전을 끄니 사방이 고요해졌다. 종종 개가 컹컹 짖는 소리만 조용한 밤하늘을 가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방금 전 뉴스 속보가 거짓말만 같다.

나는 침대로 들어가 눈을 감았지만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남의 나라 문제니 신경을 쓰지 않으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여자로서 또 이 문제와 장기간 씨름해온 사람들의 친구로서, 교사로서 그냥 외면하기가 힘들다.

내가 이럴진대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겠다 싶었다. 그들은 또다시 한 해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런 한 해 한 해가 언젠가 결국은 바위를 뚫는 빗방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태그:#남미, #아르헨티나, #낙태합법화, #찬성,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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