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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부터 2003년까지 6년간 촬영한 북한 사진으로 <사는거이 다 똑같디요> 전시를 개최한 임종진 아이공감 대표 ⓒ 이희훈
"엄마, 이 사진 좀 봐. 내 친구 닮았어. 1999년도면 나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네."

사진 속에서 친구의 모습을 찾은 소녀가 깔깔거렸다. 잔디에 어린 소년 다섯 명이 모여 앉아있는 사진. 누군가는 심드렁한 얼굴로, 누군가는 만들기에 열중한 채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 임종진 공감아이 대표가 월간지 <말> 사진기자 시절인 1999년도 평양에서 찍은 장면이다. 소녀는 자신보다 오래된 사진 앞에 한동안 머물렀다.

심각한 표정으로 강가에서 낚싯대를 힘껏 던지는 소년, 그 찰나에 임 대표의 카메라가 그 장면을 담았다.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들고 환하게 웃는 북한 군인의 주름도 그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1998년도 평양에서 찍은 사진이다. 20년 전, 임 대표가 마주한 북한 사람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9일 오후, 평일 낮임에도 열댓 명의 사람들이 서울 종로구에 있는 갤러리 류가헌을 찾아 북한 주민의 모습을 둘러봤다. 방학을 맞이해 북한을 좀 더 알고 싶다며 찾아온 대학생들이 있었고, 엄마와 함께 나들이왔다는 청소년, 평소 임 대표의 사진을 좋아한다는 중년 여성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 북한 사람들은 머리에 뿔이 달린 것처럼 교육을 받았던 이부터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토실토실하니 귀엽다고 표현하는 청소년까지. 다양한 나이의 사람들은 찬찬히 북한 주민들의 얼굴에 머물렀다.

꽃제비가 아니었다
1998년 부터 2003년까지 6년간 촬영한 북한 사진으로 <사는거이 다 똑같디요> 전시를 개최한 임종진 아이공감 대표 ⓒ 이희훈
ⓒ 이희훈
ⓒ 이희훈
9일 류가헌에서 임 대표를 만나 20년 전 필름을 꺼내게 된 속내를 들었다. 그는 한때 '김정일 위원장이 아는 유일한 남녘 사진기자'라고 불리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6년간 6차례 북한을 촬영하며 북한 주민의 얼굴을 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모습을 좋아했다. 강둑에 쪼그려 앉아있는 중년 남성, 거나하게 취해 같이 한잔하자고 손짓하는 사람, 새초롬하게 막 남편이 된 이의 팔짱을 끼고 웃는 신부. 황해도, 평양, 금강산, 함경도. 북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만난 북한 주민이 다시금 그리워졌다.

"1998년이면 우리는 IMF 시기였고, 북한은 꽃제비 이미지가 강했어요. 경제적으로 못살고 불행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거였죠. 물론 가서 보니 그런 건 아니었어요. 가난한 것과 행복이 꼭 상관이 있나요. 불쌍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최근 남북 관계가 좋아지면서 북한의 여러 모습을 보며, 그때가 떠올랐어요."

지난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임 대표의 마음은 묘했다. 넋두리라면 넋두리를 개인 페이스북에 풀어내며, 20년 전 사진을 몇 장 올렸다. 평소 많이 달려야 200여 개 달리던 댓글이 1000여 개로 늘어났다. 마침, 류가헌에서 연락이 왔다. 전시하자는 거였다.

북한 살마도 웃으며 산다
1998년 부터 2003년까지 6년간 촬영한 북한 사진으로 <사는거이 다 똑같디요> 전시를 개최한 임종진 아이공감 대표가 작품속에 반영되어 보이고 있다. ⓒ 이희훈
"제가 사진을 찍었을 당시에는 여러 지적을 받았어요. 왜 북한의 어려운 현실이 아니라 웃는 사진을 갖고 오느냐는 거였죠. 제가 착해서 그렇다는 말도 들었고요. 그 말이 참 듣기 싫었어요. 내가 착한 손가락인 게 아니라 북한 사람들이 웃고 사는데 그럼 뭐를 찍어야 하지?"

그때는 그랬다. 사람들은 북한 주민이 웃을 리 없다고 믿었다. 배고픔에 허덕이며 깡마른 모습에 애처로운 눈빛이 아니라 어떻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느냐고. 웃는 얼굴에 손가락질했다. 우리가 원하는 북한의 모습이었다. 임 대표는 '북한 사람도 웃으며 산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국회에서 이틀 정도 전시도 했다.

"우리의 심장부인 국회에 북한 주민의 미소를 내걸었던 건 제 나름의 퍼포먼스였어요. 당시 신한국당이었나 8선인 국회의원이 와서 소리 지르며 삿대질하기도 했죠. 어디 이런 걸 국회에 거냐고요."

사실 임 대표라고 북한 주민에게 편견이 없었던 건 아니다. 1998년도 첫 방북을 앞두고 시장에 가서 두 보따리의 짐을 챙겼다. 두툼한 털옷부터 색연필, 스케치북까지.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을 만나면 줄 나름의 선물이었다. 북한에 도착한 임 대표는 그 마음이 부끄러웠다.

"나 역시도 편견이 있었구나, 별다르지 않았구나, 생각했어요. 선물이랍시고 내밀었을 때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러지 하는 얼굴이었어요. 정중하지만 단호한 얼굴. 나도 이 사람들을 동정했구나 싶어 두 보따리 챙겨간 걸 모두 안내원에 주고 왔어요."

그가 마주한 이들은 자존감이 두둑했다. 얄팍한 마음의 자존심이 아니었다. 경제는 어려울지라도 내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자존감. 우리 민족에 관한 자부심. 임 대표는 북한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상황으로 판단했던 자신을 바라봤다.

"북한은 제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찰하게 해준 곳이었어요. 타인의 삶을 함부로 바라보지 않게 한 그런 시간 같은 거요."

사는거이 다 똑같디요
1998년 부터 2003년까지 6년간 촬영한 북한 사진으로 <사는거이 다 똑같디요> 전시를 개최한 임종진 아이공감 대표 ⓒ 이희훈
전시장 한쪽에 걸린 사진에서 익숙한 사진을 발견했다. 김성혜 통일전선부 통일전선책략실장이었다.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을 밀착 수행하고, 북미 정상회담 당시 북미 실무회담에 참석한 고위급 인사다. 

사진 속 그는 청년의 모습으로 김 실장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당시 임 대표는 김 실장에게 스스럼없이 '누님'이라고 불렀다. 김 실장 역시 총각이었던 그를 위해 '임종진 선생 장가보내기 대책협의회'를 만들 만큼 그를 편하게 대했다.

"신기하고 아쉽고 여러 마음이 들죠. 얼른 방북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김성혜 누님뿐만 아니라 제가 찍었던 얼굴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의 모습을 다시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어요."

그는 북한에서의 사진전을 꿈꿨다. 사진을 찍으며 정서적인 통일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끼리 오고 가는 마음, 섬세하고 미묘한 순간을 다시 담아내고 싶은 것. 통일이 별건가, 이렇게 우리끼리 오고 가는 마음을 새기면 통일 아닌가 싶었다.

편견으로 무장해 대상화하는 북한이 아닌, 여러 표정의 얼굴들. 20년 전, 그가 찍은 사진 속 주인공들을 하나하나 만나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어떤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소소한 감흥을 나누고 싶어했다. 그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의 사진전 '사는거이 다 똑같디요-북녘의 일상'은 오는 9월 9일까지 류가헌에서 전시한다.

태그:#북한, #임종진,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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