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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 한 점을 독자와 함께 감상하며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와 작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미술전문가의 입장보다는 관람객 입장에서 그림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편집자말]
 아폴리네르와 그의 친구들(마리로랑생,1908, 볼티모어 미술관)
 아폴리네르와 그의 친구들(마리로랑생,1908, 볼티모어 미술관)
ⓒ 볼티모어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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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마리 로랑생(1883~1956)이 그린 '예술가들의 그룹(Group of Artists)'이라는 작품이다. 중앙에 <미라보 다리>를 쓴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있고 뒤에 서 있는 여인은 마리 로랑생이다. 피카소가 그의 개와 함께 그려져 있고 턱을 괴고 있는 여인은 피카소의 연인이자 그의 주옥같은 작품의 모델이었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커플 인증샷과 같은 이 그림은 커플 초상화이다.

미술수집가이자 작가인 거트루드 스타인이 그림의 소유주다. 무명의 피카소를 비롯한 마티즈, 세잔, 마네 등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그들의 그림을 구입해 사실상 최초의 현대미술관이라 불릴 만한 곳인 '거트루드 살롱'을 운영한 여인. 이곳은 헤밍웨이의 휴식처였고 에릭 사티의 연주회장이며 기욤과 마리의 데이트 장이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배경이 된 곳 '거트루드 살롱.' 이곳에 마리의 그림도 어깨를 나란히 했다.

기욤과 마리의 인연

마리는 유부남 국회의원 아버지와 가정부였던 어머니 사이에 혼외자로 태어났다. 축복은커녕 숨어 지내야 하는 하는 신세였으며 아버지가 누군지도 알지 못한 채 자랐다. 어머니 사망 후에야 그의 존재(가정 있는 유부남)를 알게 된다. 그나마 양심은 있었는지 그는 두 여자가 살 집을 구해주고 양육비를 지원했기에 어렵지 않게 생활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실크 모자를 쓰고 재킷을 입은 신사'로 간간이 집에 들러 조용한 생활을 어지럽히는 존재였다.

파리 시립학교에서 데생을 배우고, 세브르에서 도자기에 그림 그리기를 배우고, 1904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동문수학하는 사이가 된다. 브라크는 마리가 그린 자화상을 보고 그녀의 재능을 읽어냈다. 곧바로 그 그림을 들고 전설의 아틀리에 '세탁선'으로 가서 그의 동료들에게 보여주고, 그녀는 그들에게 인정받아 '세탁선'에 드나드는 유일한 여성화가가 된다.

'세탁선'은 몽마르트르에 있는 건물 이름이다. 새로운 그림을 모색하는 젊은이들이 낮은 임대료 덕분에 이곳에 모여들었는데 피카소, 앙리 루소, 모딜리아니, 앙리 피에르 로셰 등 훗날 거물이 될 예술가들이 여기서 그림을 그렸다. 건물 바닥이 당시 세탁부들이 빨래를 하던 배와 비슷해서 지어진 이름으로, 피카소는 그 유명한 <아비뇽의 여인들>을 이곳에서 그렸다.

당시 '대상을 모든 각도에서 포착하여 기하학적 형태로 되돌려서 표현하는 입체파'와 '강렬한 원색과 거친 형태를 특징으로 하는 야수파'가 창궐하고 있었다. 이런 예술가들이 모여있는 그곳에 드나들다보니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영향을 받는다. '야수파 소녀'(조각가 로댕)라든지, '야수파와 입체파 사이 덫에 걸린 불쌍한 암사슴'(시인 장 콕토)과 같은 별명이 붙은 까닭이다.

피카소는 친구인 기욤에게 마리를 소개하며 "어제 자네의 부인과 만났어. 자네는 아직 그녀를 모르지만 말이야"라고 기욤의 소설 한 부분을 인용했다. 기욤 역시 혼외자로 태어나 마리와 성장 배경이 비슷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공감과 이해도가 높았다.

미술평론으로도 맹활약을 하고 있던 기욤은 '마리 로랑생의 예술은 우리 시대의 명예다'라고 칭송하며 그녀의 그림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그녀는 시인인 그에게 영감을 주고, 그는 그녀의 세계를 넓혀주었다. 둘은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동반성장했다.

사랑은 흘러간다

달콤한 시간들만큼 가혹한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 자연의 법칙인가보다.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기욤은 어처구니없게도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둘 사이는 더욱 벌어진다. 진범이 잡혀 누명은 벗었지만, 주변 친구들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는 결국 파국을 맞는다. 이별 후, 기욤이 그녀를 생각하며 쓴 시 <미라보 다리>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가 되었다.

"사랑은 흘러간다.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기욤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심각한 상처를 입고 회복 도중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고 만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가 죽고 몇 해 후, 피카소와 마티즈가 그림 한 점씩을 팔아 그 돈으로 초라한 기욤의 묘에 묘비를 세워 주는데, 그 묘비에 들어간 글이 기가 막히다.

"무게 없는 인생을 나는 얼마나 많이 손으로 달아 보았던가."

읽는 순간 신음 같은 것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것저것 저울질 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잃어버렸는지. 이 무게 없는 인생을 살면서.

기욤과 헤어진 마리는 파리로 유학 온 독일인 남작 오토 폰 뷔체와 급작스레 결혼한다. 그 또한 화가다. 이 성급한 결정은 큰 시련을 몰고왔다. 신혼여행 중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독일인과 결혼한 마리는 국적이 독일로 바뀌면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독일이 프랑스와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에 서로 적국의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둘은 중립국인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마리는 적국의 아내로 간주되어 프랑스에서 일궈놓은 재산을 압수당하고 명성도 잃어버린다. 마리의 남편 오토는 아내보다 예술적 재능이 없음을 시기하고, 귀족으로서 전쟁을 회피한 무력감, 기반 없는 스페인 생활에 좌절하여 술과 여자에 빠져 지냈다. 이렇게 맥없이 한순간에 모든 게 무너졌다. 마리는 친구 니콜로부터 기욤이 쓴 시 <미라보 다리>를 듣고 눈물을 펑펑 쏟았지만 모든 걸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마리의 유일한 위안은 마드리드에 위치한 프라도 미술관이었다. 벨라스케스, 고야의 그림을 탐구하며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외로움, 그 속에 희망을 투영한 그림들을 몇 년에 걸쳐 그렸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연꽃처럼 그때 그린 작품 대부분이 걸작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시기에 마리는 기욤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둘은 이별 후에도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었다. 비록 헤어졌지만 사랑도 미움도 넘어서, 마침내 정신적으로 엮여있는 진정한 '소울메이트'가 된 기욤의 죽음은 마리에게 큰 좌절을 가져다 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남편과 이혼한 마리는 우여곡절 끝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녀의 그림은 어느 유파에도 얽매이지 않았으며, 기품 있고, 우아하고, 성숙했다. 게다가 그녀만의 고유한 사랑스러운 색채는 파리 사교계의 여인들을 단박에 사로잡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초상화 의뢰가 넘쳐나고 무대 의상, 무대 디자인, 문학 삽화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다.

사교계를 휩쓴 샤넬, 초상화 수정 요구했지만

 샤넬의 초상화(마리 로랑생, 1923, 오랑주리 미술관)
 샤넬의 초상화(마리 로랑생, 1923, 오랑주리 미술관)
ⓒ 오랑주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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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코코 샤넬도 초상화를 의뢰했다. 동갑내기에 둘 다 역경을 딛고 성공한 여자라는 동질감이 둘 사이를 가깝게 했다. 샤넬은 자신을 '사교계를 휩쓴 야망 넘치고 성공한 여자'로 그려주길 바랐으나, 마리가 그린 샤넬은 유약한 몸에 지치고 우울해 보였다.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없이 몸부림치고 때때로 좌절했을 그녀의 내면을 표현한 그림이 샤넬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나는 샤넬의 가게에서 늘 곧바로 대금을 지불하는데 그녀는 나보고 그림을 다시 그려달라고 말해. 샤넬은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어차피 오베르주 출신의 시골 여자라서 파리의 예술을 알지 못해. 나는 절대 다시 그리지 않을 거야."

둘 사이는 끝이 난다. 그런데 샤넬이 거부한 초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샤넬을 대표하는 초상화가 된다.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창적인 자신만의 화풍을 추구함에 흔들림이 없었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신의 길을 개척한 마리는 1937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고 명실상부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의 반열에 오른다.

"내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 그녀의 시집이자 에세이집 <밤의 수첩> 중

한 시대를 접수한 그녀조차도 이런 생각을 했다니. 마지막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마리는 1956년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하얀 드레스에 장미 한 송이를 손에 쥔 채, 평생을 간직한 기욤의 편지들을 가슴에 품고 영면에 들었다.

덧붙이는 글 | <마리 로랑생 전시도록>(한가람 미술관), <예술가의 지도>(서해문집, 김미라) 참고.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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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