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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정원과 네덜란드식 석축, 중국식 건물을 두루 갖춘 '다국적' 유적으로 타이난의 랜드마크다.
▲ 츠칸러우 전경 일본식 정원과 네덜란드식 석축, 중국식 건물을 두루 갖춘 '다국적' 유적으로 타이난의 랜드마크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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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타이완의 수도는 섬의 북쪽에 자리한 타이베이(台北)지만, 한 세기 전만 해도 타이완의 중심은 타이난(台南)이었다. 지금은 '신도시' 가오슝에 기댄 작은 도시일 뿐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주에 비견될 만큼 유서 깊은 고장이다. 타이완의 역사가 이곳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이완의 역사는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이후 전개된 유럽 제국들의 침략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중국인들이 유럽인들을 내쫓고 새로운 주인이 되는 과정이 사실상 전부다. 그들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원주민들은 지금 '고산족'이라는 이름으로 수천 미터의 깊은 산중과 가파른 동쪽 해안 지역에 일부 모여 살고 있을 뿐이다.

그다지 넓지 않은 타이난 시내에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들이 건재하다. 서세동점의 시기 해상왕국 네덜란드가 타이완에 첫 발을 내디딘 곳으로, 식민통치를 위한 행정기관과 방어 요새가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시내 중심가에 우뚝 선 츠칸러우(赤嵌樓)와 바다에 면한 질란디아 요새가 그것이다.

당장 500년이나 된 유적이 큰 훼손 없이 지금껏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유적이 지닌 내력에 더욱 눈길이 간다. 츠칸러우는 네덜란드 총독의 집무실이 있던 자리로, 네덜란드를 몰아낸 명나라의 정성공이 군 사령부로 사용했다. 이후 청나라가 지배하던 때도 관청으로서 기능하다가,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학교 건물로 쓰이기도 했다.

전쟁과 복속의 과정에서 승전국에 의해 수차례 허물어졌을 법도 하건만, 정작 츠칸러우를 무너뜨린 건 19세기에 일어난 지진이었다고 한다. 이후 여러 차례 복구를 거쳐 도심 속 정원에 둘러싸인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네덜란드가 석축을 세우고, 중국이 건물을 올린 뒤, 일본이 보존한, 타이완의 모든 역사가 한데 모인 유적인 셈이다.

츠칸러우에는 우리가 쉬이 납득할 수 없는 볼거리가 하나 있다. 일제 식민지 시절 타이난의 마지막 시장을 역임했던 한 일본인을 기리는 동상이 주인처럼 건물 안에 모셔져 있다. 그가 타이난의 문화와 전통을 보호하고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공로를 칭송하기 위해 타이난 사람들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타이완 총독부 고위 관료를 지낸 우조우남의 흉상과 공적을 새겨놓아 그를 기리고 있다.
▲ 츠칸러우 내 일본인 동상 타이완 총독부 고위 관료를 지낸 우조우남의 흉상과 공적을 새겨놓아 그를 기리고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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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에 타이완에 건너와 총독부의 말단 관리를 시작으로 요직을 두루 거쳤다는 약력을 동판에 상세히 적어 두었다. 기록대로라면 식민 통치의 주구로서, 타이완 사람들의 국민적 지탄을 받아 마땅한 인물인데도 우리와는 달리 그런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외려 동상 앞에서 예를 표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우리보다 15년이나 더 긴 일제 식민지 시절을 겪었으면서도 타이완 사람들에게선 우리와 같은 '반일 감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는 대륙의 중국인들과도 크게 다른 듯하다. 일본인과 일본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 대해서도 그들은 대체로 관대하다.

타이난 시내 중심에 자리한 백화점으로, 식민지 시절 당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 하야시 백화점 전경 타이난 시내 중심에 자리한 백화점으로, 식민지 시절 당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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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 시내에는 버젓이 일본 이름을 내건 백화점이 성업 중이다. 미츠코시 백화점은 규모 면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고, 하야시 백화점은 일제 식민지 시절의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아무리 일본 자본의 소유라는 걸 밝힌다고 해도 우리나라에선 그런 이름을 대놓고 상호로 쓴다는 건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여행 중에 만난 몇몇 타이완 사람들은 '일본의 도움이 없었다면 타이완의 근대화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 대한 공식적인 명명 역시 '담담'하다. 교과서 속 연표를 봐도, 네덜란드 통치기, 명 통치기, 청 통치기, 일본 통치기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타이완의 입장에서 명, 청과 일본이 하등 다를 바 없는 셈이다.

하지만, 질란디아 요새에선 그와는 사뭇 다른 장면을 만나게 된다. 질란디아 요새는 현재의 지명을 따서 흔히 '안핑구바오(安平古堡)'로 불리는데, 네덜란드가 점령한 뒤 건설한 천혜의 요새로, 정성공이 이끈 명나라 군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 곳이다. 결국 전쟁에서 승리한 정성공은 네덜란드에 이어 청나라의 지배를 받기까지 타이완을 20여 년간 지배하게 된다.

타이완에서 네덜란드를 축출한 정성공의 공을 기려 그의 동상을 세워놓았는데, 기단에 새겨진 '민족 영웅'이라는 글귀가 낯설다.
▲ 질란디아 요새의 정성공 동상 타이완에서 네덜란드를 축출한 정성공의 공을 기려 그의 동상을 세워놓았는데, 기단에 새겨진 '민족 영웅'이라는 글귀가 낯설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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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정성공은 타이난의 상징적 존재다. 시내 어디를 가든 그를 만나게 된다. 타이난 기차역 앞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고, 도시를 동서로 관통하는 간선도로의 이름도 '성공로'다. 정성공뿐만 아니라 그의 조상을 모신 사당이 시내 곳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타이난을 대표하는 대학 이름도 '성공대학'일 정도다.

세 겹의 석축을 쌓아올린 질란디아 요새의 중앙에도 그의 동상이 우뚝하다. 유럽 제국에 맞서 승전한 곳이니만큼 그의 동상이 어색할 건 없지만, 동상에 큼지막하게 새겨진 '민족 영웅'이라는 글귀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진다. 이민족을 몰아내고 중국인의 자긍심을 고취시킨 인물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인데, 타이완의 민족적 정체성을 그에게서 찾고 있는 셈이다.

타이난 운하를 사이로 질란디아 요새와 이웃한 '이짜이진청(億載金城)'도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1875년 청나라가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높고 두터운 석벽에 사방에 해자를 설치한 난공불락의 요새다. 당시 사용된 대포 등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타이완의 내로라하는 '안보 관광지'다.

1875년 청나라가 건설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수차례의 전쟁을 거쳤으면서도 훼손된 곳이 거의 없는 '안보 관광지'다.
▲ 이짜이진청의 영국제 대포 1875년 청나라가 건설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수차례의 전쟁을 거쳤으면서도 훼손된 곳이 거의 없는 '안보 관광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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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이곳은 1884년 청나라가 프랑스와 베트남의 종주권을 두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큰 위력을 발휘했고, 1894년 일본과의 전쟁 때도 청나라의 후방 기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타이완은 전리품이 되어 무려 반세기 동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역사적으로 타이완이 일본에 관대할 수 없는 이유다.

그들이 공유하는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에서 일본만은 예외로 둔 걸까. 아니라면 우리네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주장했던 '대동아공영권'에 모든 타이완 사람들이 죄다 경도된 탓일까. 그도 아니라면, 혹시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애써 지워내려는 정통성 없는 집권세력의 의도는 아닐까.

어쨌든 지금 타이완 사람들은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한편, 식민지 시절 일본이 이식시킨 근대화에도 큰 의미를 두는 '이중적인' 역사 인식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거칠게 말해서, 그들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자신의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탓이 아닐까 싶다. 늘 그래왔기에, 네덜란드가 지배하든, 명과 청이 지배하든, 일본이 지배하든, 무슨 대수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맹그로브 숲 생태공원을 견학한 뒤 질란디아 요새로 가는 길, 묻지도 않았는데 택시 기사가 타이완 해협 쪽을 가리키며 저 너머가 자신의 동포가 사는 중국 땅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선조가 바다 너머 푸젠성(福建省) 출신이라면서, 느닷없이 중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설 날이 곧 올 것이라고 으스댔다. 언뜻 그가 타이완 사람이라기보다 대륙에서 만난 여느 중국인 같았다.

그러고 보면, 흔히 '중화민족'이라고 통칭되는 중국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도 생래적인 것이라기보다 집권 세력에 의해 '농도'가 달라지는 정치적인 수단 아닐까 싶다. 사람에 따라, 유적에 따라 던지는 메시지가 확연히 다르다 보니, 이방인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이렇듯 복잡다단한 타이완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옛 수도 타이난을 일부러 찾을 일이다.



태그:#타이완 여행, #타이난, #정성공, #일제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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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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