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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 올해 초, 기자는 한참 불볕 더위가 기승일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입성했다.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현지 영어교사의 길. 그런데 관련 자격증 코스를 시작한 뒤에도 본인이 비원어민이라 뒤쳐질 거라는 자격지심에 시달리고 마는데. 하지만 그도 생각보다 나름 잘 헤쳐나가는듯하다. 그런데 어째 뒷통수를 지지는 아르헨티나판 삼복더위는 나기가 쉽지만은 않다. 이 글의 시점은 올해 3월 둘째 주다.)

"에, 그럼 수업계획 과제 내준 거 잊지 말고... 내일 아침에 다시 봅시다. 그럼 이만!"

담당 강사인 릴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는 가방을 거머쥐고 교실을 나섰다.

점심시간 30분 포함, 하루 단 5시간의 수업이지만 혈기왕성한 청춘들에게는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다. 대한민국 수험생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한 백만 번 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나중에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는 하루에 몇 개 없는 강의 출석에도 게을러지듯 모든 게 다 상대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의 이 좀이 쑤시는 시간들이 짧든 길든 나중에 정식 선생님이 된 이후에 뼈가 되고 살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왠지 교실 밖 세상이 더 궁금하다. 나는 그새 배긴 엉덩이를 슬슬 문지르며 제일 먼저 학원을 나왔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학원 앞 가로수길의 그늘 아래서 잠깐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다 버스가 오면 누구는 고양이 밥을 주러, 다른 누군가는 현지에 휴가차 온 가족을 챙기러, 우리 중 또다른 누군가는 기타 연습을 하러 간다며 제각기 흩어진다.

오늘은 덴마크에서 온 S, 미국 텍사스에서 온 N 그리고 나만 남았다. 모두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지라 어떻게 오후를 잘 날지 머리를 맞댔다. 나 역시 현재 머무르는 악몽 같은 호스텔로 돌아가는 시간을 미루고 싶어 가장 열심히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그러는 동안 굵은 땀방울 몇 줄기가 우리 이마를 타고 흐른다. 잠시 뒤, 못 참겠다는 듯 N이 외친다.

"무조건 시원해야 돼! 지금 어디 피서라도 갈 수 있나?"

내일 다시 등원해야 하는 처지인 데다 한 푼이 아쉬운 우리였다. 나는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런 우리를 보던 S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왜 안 돼? 시원한 데다 공짜이기까지 한 곳이 하나 있는데?"

그렇게 각각 다른 3대륙에서 온 세 젊은 피들은 오늘 오후를 근처의 '알 아테네오 그랜드 스플랜디드(El Ateneo Grand Splendid)'에서 보내는 데 찬성했다. 이곳은 아르헨티나 최대 규모의 서점으로 영국 일간 가디언 선정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탑 10' 중 무려 2위에 든 곳이기도 하다. (2008년 기준. 1위는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히트 서점이다.) 그렇게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산타페 거리(Avenida Santa Fe)에 위치한 엘 아테네오(El Ateneo) 서점 앞은 늘 인파로 북적인다.
 산타페 거리(Avenida Santa Fe)에 위치한 엘 아테네오(El Ateneo) 서점 앞은 늘 인파로 북적인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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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 그대로 더위 먹기 바로 직전에 서점에 도착했다. 먼저 바깥에서도 느껴지는 그 웅장한 규모에 압도됐다. 아무리 근처라도 행여 놓칠까 봐 두리번거리며 왔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엉거주춤 안으로 들어서니 입구에는 무전기를 허리춤에 꽂은 심각한 표정의 경비원들이 가득하다. 머지않아 우리는 곧 그 이유를 알아차리게 된다.

이 거대한 몸집의 서점은 100년이 넘은 오페라 극장을 개조한 건물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개조'라기 보다는 내부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살리고 객석과 관객 대신 서가와 책들로 몇 층에 달하는 실내를 채운 모습이다. 20만 권의 장서와 3만 점의 음반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니 규모 면에서도 확실히 다른 보통의 서점들과 비교 불가능하다.
 지은지 100년도 넘은 극장을 개조한 서점의 내부가 그 화려한 과거를 상기시킨다.
 지은지 100년도 넘은 극장을 개조한 서점의 내부가 그 화려한 과거를 상기시킨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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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시간이 잘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서점 이상의 공간이다.
 이곳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시간이 잘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서점 이상의 공간이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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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정한 정보의 바다'인 서가 산보에 나섰다. N과 나에게는 '영어인 듯 영어 아닌 영어같은 너'인 스페인어인지라 비교적 유창한 S가 번역을 맡았다. 층을 나누어 각각 다른 종류의 서적과 관련 물품 판매가 진행되고 있다(1층과 2층엔 각종 서적이, 3층엔 온갖 종류의 고전 음반이 전시되어 있다. 지하 층에선 어린이 서적과 대중음악 음반을 판매한다). 우리 셋 모두 스페인어 공부에 한창인지라 잠깐 사전 코너에 멈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얼마 뒤 우리는 거의 '넉 다운(Knock down)'되고 만다. 학원에서의 반나절에, 더위에 그리고 이 잠시간의 '관광객 타임'에 완전히 지쳐버린 것이다. 우리는 잠깐 '카페인과 당 충전' 시간을 갖기로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이 서점 중앙의 무대는 카페로 꾸며져 있다.
커피처럼 책과 잘 어울리는 음료가 또 있을까. 이 서점은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공간을 넘어선다. 중앙 무대에 위치한 카페는 이미 사교의 장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 커피처럼 책과 잘 어울리는 음료가 또 있을까. 이 서점은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공간을 넘어선다. 중앙 무대에 위치한 카페는 이미 사교의 장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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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전의 예술인들이 혼을 불살랐을 이곳은 이제 애독가들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소리와 향긋한 커피 향으로 가득하다. 오묘한 기분으로 각자 주문을 마친 우리는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씩 넘겼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인데도 붐비는 서점을 보니 실내에서 비 오는 날의 바깥 풍경을 감상하듯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부호나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이곳은 이제 포르테뇨(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신 현지 거주민)부터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 그리고 우리까지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 서점은 아마 처음 극장 시공에 들어갔던 식민지 독립 이후 시기부터 페론 군부 정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의 근대사와 함께 커온 것 아닐까 싶다. 때로는 극장으로 한때는 영화관으로 그리고 지금은 10여 곳에 분점을 가진 대형서점으로 말이다.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앉고 S와 N은 먼저 나섰다. 나는 이곳이 자정까지 문을 여는 데다 지내는 숙소에 과제 할 곳도 와이파이도 마땅치 않아 좀 더 있다가 가기로 했다. 무대 옆구리에 위치한 테라스석에 앉아 과제도 하고 층계를 다시 오르내리며 다리 운동도 하다가 천장에 위치한 프레스코화를 넋 놓고 보기도 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서점은 밤이 깊어갈수록 더 분주해지는 듯하다. 이 도시의 책벌레들은 밤에 모두 이곳으로 모여드는 모양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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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수박과 생막걸리가 유명한 곳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집나가서 하는 개고생과 그를 바탕으로 끄적이는 글쓰기가 인생의 큰 낙이지요. 호주, 유럽, 동남아를 거쳐 지금은 남미 아르헨티나에 정착해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항상 여행에 목말라하며 늘 궁금해하는 삶을 살고자합니다. 저와 같은 꿈을 가진 분들은 이곳에서 제 여행에 동참하셔도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