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위에서부터 <지도자의 길>, <민족중흥의 길>, <새마음의 길>, <민족사의 새지평>, <헌수송>
 위에서부터 <지도자의 길>, <민족중흥의 길>, <새마음의 길>, <민족사의 새지평>, <헌수송>
ⓒ 조경국

관련사진보기


정치인들이 낸 책은 손님들에게 인기도 없고, 책방에서 대접도 시원찮다. 굳이 따진다면 철 지난 재테크나 자기계발서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고나 할까. 그보다 험한 취급을 받는 책도 있다. 글과 행동이 다른 정치꾼들이 낸 것이다. 굳이 이 자리에서 실명을 거론하고 싶진 않다. 주로 선거를 앞두고 출판기념회를 하거나 이름을 알리기 위해 급히 낸, 자신의 막말과 과거를 미화하는 그런 에세이가 대부분이다.

몇 번 책방을 이사하며 정치인들의 책은 많이 버렸다. 어떤 책이든 버릴 때는 마음이 아프지만 희한하게도 정치인들의 책은 버릴 때도 아쉬운 마음이 없다. 그렇다고 모든 정치인의 책이 그런 건 아니다. 그의 정치 행보가 어떠했던지 간에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책들은 따로 모아둔다.

예를 들면 탄핵된 박근혜 대통령의 첫 책 <새마음의 길>(1979년)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민족중흥의 길>(1978년)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이 두 권은 구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이승만 대통령의 여든 살 생일(1955년)을 맞아 관리와 명사들의 축시를 모은 당시 정부 공보실에서 펴낸 <헌수송>도 마찬가지다. 김영삼 대통령이 재야 정치인이던 시절(1979년) 몽고메리 장군의 책을 번역한 <지도자의 길>(원제 : The path to leadership)도 있다. 경향신문사가 '전두환 대통령의 통치이념'을 홍보하는 <민족사의 새지평>(1983년)도 빼놓을 수 없다. 책이 소중하고 무서운 이유는 그 자체가 역사의 증거기 때문이다.

일반 독자가 읽기 위해 이런 책을 찾을 리는 거의 없을 테고, 결국 사료의 역할만 할 것이다. 사실 이 책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손님을 만나지 못했다. 어떻게든 책을 팔아야 하는 처지지만 이런 책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언젠가 책방을 떠나 그 시대를 연구하는 눈 밝은 학자의 서가에 꽂히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역사의 증거로 버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애정이 없으나 이렇게 보관하고 있는 책도 있지만 반대로 무척 아끼며 따로 챙겨둔 책도 있다. 헌책방 책방지기가 아닌, 독자로서 아껴 개인 서가에 꽂아둔 것이다. 한 권은 고 김근태 의원의 <희망은 힘이 세다>고 또 한 권은 노회찬 의원의 <힘내라 진달래>다.

그의 촌철살인보다 좋아했던 <힘내라 진달래>

지난 7월 23일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그간의 일들은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오랫동안 나는 그를 정치인이 아닌 유머와 위트를 아는 어른이라 좋아했다. 그런 어른을 찾아보기 얼마나 힘든가. 사소한 것도 무겁게 만드는 능력은 보잘것없으나 무거운 것도 가볍게 만드는 힘은 귀하다. 앞뒤 없이 꽉 막힌 한국 정치에서 노회찬 의원은 청량한 존재였다.

시민으로서 정치를 외면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리 정치는 피로와 스트레스의 효과가 확실한 내복약이라 가까이할수록 내상이 커질 뿐이다. 대한민국 국민만큼 정치 피로에 강한 국민이 또 있을까 싶다.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 정치사가 맑았던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대개 자신의 잇속과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나라 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국민을 피곤하게 만드는 날이 훨씬 헤아리기 쉬울 테다.

책방지기다 보니 그의 촌철 '언변'보다 담백 '글'을 더 좋아했다. 김근태 의원의 <희망은 힘이 세다>와 함께 따로 빼놓은 그의 책은 <힘내라 진달래>(사회평론)였다. <힘내라 진달래>를 빼놓은 이유는 노회찬 의원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 책이 솔직하게 기록했던 일기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날그날의 잊어버리기 아까운, 의의 있는 생활을 기록하는 것이 일기다. 보고 들은 것 가운데, 또 생각하고 행동한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을 적어두는 것은, 형태가 있는 것이나 형태가 없는 것이나 모조리 촬영한 생활 전부의 앨범일 것이다. 그러나 일기는 앨범과 같이 과거를 기념하는 데서만 의미가 다 하지 않는다. 과거보다는 오히려 장래를 위한 의의가 더욱 크다."

상허 이태준 선생의 <문장강화>에 나오는 글이다. 편지글이나 일기를 책으로 묶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개인의 독서 취향 때문이고, 이태준 선생의 말처럼 '장래를 위한 세 가지 의의', 그러니까 수행, 문장 공부, 관찰력과 사고력의 훈련을 위한 본으로 삼기 위해서기도 하다. 책으로 묶인 다른 이의 일기를 읽는 이유다. 노회찬 의원의 <힘내라 진달래>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했다.

진보정치의 쾌거, 그 이면에 숨겨진 고뇌
<힘내라 진달래> 2004년 민주노동당의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노회찬 의원의 일기를 모아 펴낸 책.
▲ <힘내라 진달래> 2004년 민주노동당의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노회찬 의원의 일기를 모아 펴낸 책.
ⓒ 조경국

관련사진보기


<힘내라 진달래>는 노회찬 의원이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선대본부장으로 일하며 쓴 짧은 기간(2004년 1월 5일~3월 30일)의 공개 일기긴 하나 미사여구 없이 진심을 담았다. 4.19혁명 이후 44년 만에 "노동자, 농민의 정치세력화의 결실인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하기 위해 노력했던 막간의 사정이 절절하다. 이 책을 읽으면 당시 국내 정치 상황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듯하다. 오랜 세월 노동운동을 하다 현실 정치에 뛰어든 노회찬 의원의 고민과 정세 판단이 솔직담백하다.

진보 정치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난 23일의 애통함도 사실은 모두 돈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사람을 모으고, 정책을 만들고, 홍보하는 일 모두 부정하고 싶지만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도 그랬다. 그해 2월 5일 목요일 일기에는 "돈 문제만 나오면 대화가 막힌다"고 썼다.

"변변한 노동조합도 없는 (인천) 남구을이나 계양구는 총선 재정이 큰 부담이다. 돈 문제만 나오면 대화가 막힌다. 15억이나 드는 중앙당 선거재정을 어떻게 만들고 있냐고 물어오는 사람은 없다. 답이 뻔할 것이고 뻔한 답에 덧붙일 말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구당 선거재정에 대해선 가급적 묻지 않는다. 가난한 집에서 다가오는 제삿날 언급하기 힘든 것과 같다."


책을 덮으니, 더 마음이 아프다

 2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서 정의당 당직자들이 창원으로 노 의원의 영정을 옮길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서 정의당 당직자들이 창원으로 노 의원의 영정을 옮길 준비를 하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정의당… 상처받고 분열하고 또 다시 일어서면서도 노회찬 의원과 진보세력이 속 시원하게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는 바로 '돈'이 아니었을까 싶다. 2월 12일 목요일 유럽에 있는 당원이 찾아온 날 일기다.

"유럽지구당 이명희 당원이 방문했다. 서로 미안해하는 시간이다. 그는 민주노동당이 한창 바쁘고 고생하는데 유럽지구당이 큰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나는 민주노동당이 이역만리에서 고생하는 유럽지구당 당원들에게 해준 게 거의 없다며 미안해했다. 가난한 부부의 대화처럼 당과 당원이 미안해한다."

지금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의 마음이 이미 이날 일기 속에 담겼다 생각한다. 이제 그는 떠났고, 슬퍼하는 사람들만 남았다. 노회찬 의원은 이 책(일기)을 "첫 원내 진출의 경과 보고서로 전태일 영전에 바친다"고 썼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지역구 2석, 비례대표 8석을 얻었다. 그의 일기는 <힘내라 진달래>는 역사 기록의 가치를 인정받아 제13회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1월 23일에 쓴 일기 마지막 줄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권력에서 멀수록 쉬는 날이 많아진다."

가신 곳에선 편히 쉬셨으면... 고인의 명복을 빈다. 책을 덮으니, 더 마음이 아프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경남 진주의 헌책방 <소소책방> 책방지기입니다.



댓글4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