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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를 찾아 떠난 아기 공룡이 고생 끝에 무지개를 만났다.
 무지개를 찾아 떠난 아기 공룡이 고생 끝에 무지개를 만났다.
ⓒ 강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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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 여섯 살 난 아들과 함께 책을 읽고 있었다. 아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공룡과 무지개가 나오는 책이었는데,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병에 걸린 엄마 공룡이 아기 공룡에게 말했다.

"아가야, 내가 나으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단다. 무지개가 가지고 있는 일곱 색깔의 부채로 부쳐 주면 엄마는 금세 나을 수 있단다."

이 말을 들은 아기 공룡은 일곱 빛깔의 부채를 찾아 긴 여정에 오르고, 산을 넘고 사막을 지나는 동안 추위와 배고픔,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끝끝내 무지개를 만나게 된다. 아기 공룡의 갸륵한 효심에 감동한 무지개는 아기 공룡에게 기꺼이 일곱 빛깔의 부채를 건네주고, 아기 공룡은 우여곡절 끝에 엄마 공룡의 병을 낫게 한다.

책을 읽던 중 아이가 물었다.

"엄마, 그런데 무지개는 어디에서 볼 수 있어?"
"무지개는 비가 온 후에 볼 수 있지. "
"그런데 비가 온 후에도 없던데. 도대체 언제 하늘에 나오는 거야?"


그러고 보니 곧 만으로 다섯 번째 생일을 앞둔 아들 녀석은 단 한 번도 무지개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기껏 해봐야 책이나 공원 분수에 어렴풋이 드러난 무지갯빛을 보았을 뿐, 아들에게 무지개는 비가 온 후에도 단 한 번 나타난 적 없는 신기루 그 자체였다. 현재 우리 가족이 체류 중인 중국에서도 무지개를 만난 적이 없었다.

여섯 살 아이의 그림 속을 가득 채운 미세먼지
 여섯 살 아이의 그림 속을 가득 채운 미세먼지
ⓒ 강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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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주말 점심, 설거지를 하는 내내 아들 녀석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살금살금 아들이 있는 방으로 가보니 혼자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엄마, 아빠와 살고 싶은 커다란 집을 그렸단다. 그런데 집 주변에 거뭇거뭇 점들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들이 그려져 있다.

"여기 숫자하고 점들은 뭐야? 비가 오는 건가?"
"아니, 이건 미세먼지야. 미세먼지가 50이야. 비가 오면 나가서 놀 수 없잖아. 그런데 미세먼지가 50이니까 오늘은 나가서 놀아도 돼."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그 무렵 아이는 유치원에서 날씨와 관련된 표현을 한창 배우고 있었다. 매일 아침 휴대폰을 열어 날씨와 미세먼지를 확인하던 나의 모습도 얼핏 스쳤다.

나는 어릴 때 유독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새하얀 도화지에 알록달록 예쁜 색깔의 크레파스만 있으면 탁 트인 하늘과 바다, 드넓은 초원과 싱그러운 나무와 꽃을 원 없이 그릴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실생활의 그것과는 다를지라도 도화지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세상은 상상 속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자연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마법의 종이 그 자체였다.

그런데 미세먼지라니.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미세먼지 수치가 50인 날'은 그래도 밖에 나가 뛰어놀 수 있는, 그럭저럭 운이 좋은 날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안함과 슬픔이 차올랐다.

비가 그친 주말 오후. 카메라 앵글에 다 담을 수 없을만큼 커다란 무지개가 걸렸다. 잠깐 사이 흐려졌지만,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커다랗고 또렷한 쌍무지개였다.
 비가 그친 주말 오후. 카메라 앵글에 다 담을 수 없을만큼 커다란 무지개가 걸렸다. 잠깐 사이 흐려졌지만,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커다랗고 또렷한 쌍무지개였다.
ⓒ 강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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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지난 주말. 며칠째 큰비를 퍼붓던 비구름이 잠시 숨을 고르며 쉬엄쉬엄 서산으로 흘러가던 이른 저녁이었다.

"엄마, 저기 좀 봐! 무지개야! 무지개!"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깡충깡충 뛰어대며 창가에서 소리를 지르는 아이의 소리에 놀라 창밖을 내다보니, 어마어마하게 커다랗고 진한 무지개가 하늘에 걸려있었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아들과 나는 허둥지둥 카메라를 챙겨 들고, 신발을 어떻게 신었는지 기억도 없이 서둘러 아파트 옥상으로 내달렸다.

"와, 정말 무지개다!"

물 넘고, 산을 건너 무지개를 만난 아기 공룡의 마음이 이와 같았을까? 아이와 나는 한동안 아파트 옥상 이곳저곳을 방방 뛰어다니며 무지개를 마음껏 눈에 담았다.

"잘 기억해! 이게 무지개야. 오래오래 기억해야 해!"


아이 못지 않게 흥분한 내가 아이에게 계속 소리쳤다. 아이에게 무지개는 더는 책 안에만 존재하는 상상 속의 무엇이 아니라 또렷한 기억 속의 추억으로 자리 잡기를 원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무지개에게 부채를 빌려 놓았다가 미세먼지 가득한 날 미세먼지를 훨훨 날려보내면 어떨까?

한 기사에 실린 실험 결과에 따르면,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질수록 무지개의 선명도가 그만큼 떨어진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하늘에 잿빛 미세먼지가 아닌, 오렌지빛 노을과 오색찬란한 석양의 운무, 선명한 무지개가 더 자주 떠오르는 그런 세상을 선물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잠시 잠깐 하늘에 걸쳤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무지개일지라도 찰나의 아름다움이 선물한 기적같은 석양이 아이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기억되길 바란다.


태그:#무지개, #미세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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