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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스카 캐넌의 기암절벽의 아름다움으로 '동화나라' 계곡이란 이름을 얻었다.
▲ 스카스카 캐넌 스카스카 캐넌의 기암절벽의 아름다움으로 '동화나라' 계곡이란 이름을 얻었다.
ⓒ 조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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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을 오랫동안 함께 해온 L선생님이 키르기스스탄 여행을 제안한 것은 두 달쯤 전이었다. 그는 과학기술 기업체 대표이사인데, 전부터 지인들과 부탄이나 베트남 같은 곳을 종종 다녔다. 소규모 그룹 여행으로 '찍고 그리고 쓰다'를 슬로건 삼아 다니신다. 이제는 내가 고3 학부모 처지를 벗어서 한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트레킹 여행을 제안하신 것이다. 나는 두말 없이 흔쾌히 승낙했다.

키르기스스탄. 전에 국제NGO에서 근무할 때 외국에서 열린 회의에서 키르기스 여자를 딱 한 번 만난 것이 이 나라에 대해 아는 게 전부였다. 킴이라고 불리던 그 여자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작은 눈을 가졌는데, 고려인 3세라고 했다. 킴은 회의 기간에 나의 룸메이트였는데, 밤에 술을 마시러 나가서는 늦도록 들어오지 않아 내가 먼저 까무룩 잠들곤 했다.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키르기스스탄은 1991년에 소련에서 독립한 나라로 한반도 면적보다 조금 작은 면적에 600만 가까운 인구가 산다.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지만 큰 이식쿨 호수가 있고, 수자원이 풍부하다. 아직 1인당 연소득이 천 달러 정도인 가난한 나라. 농업이 대부분이지만 천연 자원이나 관광 자원의 잠재력이 큰 나라다.

출발 전날 가방을 싸는 동안 고양이 마루가 옆에서 물끄러미 본다. 가방을 싸느라 트렁크를 펼쳐놓을 때면 그 안에 얌전히 들어가 웅크리는 마루. 하루의 일상을 함께 시작하고 나를 졸졸 따라 다니는 마루. 새벽 5시에 알람이 울리면 옆에 와서 어서 일어나라고 툭툭 꼬리로 치거나 얼굴을 비벼대는 마루.

마루에게 아침밥을 챙겨주고 카페라떼를 만들어 한잔 마시고 시작하는 하루. 라디오를 켜고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이른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배웅해주고 설거지하는 하루. 댄스 수업을 듣고 땀을 흠뻑 흘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 점심 때쯤이면 다시 슬그머니 다가와 간식을 달라는 마루.

쓰기 위해 떠나다

나는 왜 이런 평온한 일상을 두고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일까. 게다가 남편은 마루를 고양이로 보지 않고, 혼자 척척 알아서 하는 사람쯤으로 여긴다. 즉 잘 돌봐주지 않아 나를 염려하게 한다.

나는 2년여 전부터 글을 쓰는 삶을 살기로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끝없이 낯선 시간과 공간 속으로 나를 부려놓아야 한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보고 느끼고 싶다. 키르기스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도 설레지만, 함께 여행길에 오를 분들도 궁금했다. 나를 포함해서 여섯 명. 여행을 기획한 L선생님과 그의 친구들인 벤처 기업 사장, 교수 두 분, 그리고 NGO 일을 오래 하신 K 선생님이다.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거쳐 비슈케크에 도착하여 현지 여행사 대표와 가이드들을 만났다. 다들 젊고 인상이 좋다. 여행사 대표는 키르기스에 온지 9년째라는 39세의 남자. 여정 동안 가이드를 해 줄 20대 중반의 주마벡, 그리고 막내 아지즈는 23살이다.

"키르기스 사람들은 정말 선해요." 여행사 대표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그런 인상을 풍긴다. 그들은 잘 대접하려는 마음에 우리를 한국 식당으로 안내했다. (막 한국에서 왔는데, 한국 음식이 벌써 그리울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나는 키르기스 현지 음식이 궁금한데...) 소고기가 싸고 흔한 나라여서, 얼큰한 육개장으로 키르기스 첫 식사를 했다.

이튿날 우리는 이식쿨 호수의 남단에서 동쪽으로 달렸다. 폭염의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날이 덥기는 매한가지다. 그래도 가는 길에 왼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호수의 파란 빛이 마음을 시원하게 식혀준다.

푸짐하고 맛있는 키르기스의 과일들. 체리와 참외를 실컷 먹었다.
▲ 과일 시장 푸짐하고 맛있는 키르기스의 과일들. 체리와 참외를 실컷 먹었다.
ⓒ 조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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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서 찐 옥수수를 샀더니, 옆에 아주머니가 부아가 났다.
▲ 찐 옥수수도 사고 한 곳에서 찐 옥수수를 샀더니, 옆에 아주머니가 부아가 났다.
ⓒ 조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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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는 과일이 풍부하고 아주 싸다. 체리를 예로 들자면 1킬로에 우리 돈으로 2천 원 정도. 가는 길에 과일 파는 노점에 들러 체리, 복숭아, 커다란 참외, 수박, 살구 등 온갖 과일을 샀다. 조금 더 가서는 가마솥에 찐 옥수수도 넉넉히 샀다. 옥수수 파는 가마솥은 두 개였는데, 우리가 한 곳에서 많이 사니까, 옆 가마솥을 지키던 아주머니가 부아가 났다. 차를 빨리 빼라고 기사에게 소리를 질렀다.

바이칼의 절반쯤 된다는 바다 같은 이식쿨 호수. 호숫가에는 수영하러 나온 사람들이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우리는 발을 담가보고 거닐다가 스카스카 캐넌으로 이동했다. '동화' 나라 같다고 해서 이름지어진 스카스카 계곡. 3시간 남짓 걸어 돌아보았다. 각양각색의 바위들과 계곡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아라콜 호수로 올라갈수록 끝없이 비경이 펼쳐진다.
▲ 아라콜 가는 길의 비경 아라콜 호수로 올라갈수록 끝없이 비경이 펼쳐진다.
ⓒ 조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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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스케치북을 몸에 지니고 다니시는 예술가의 모습
▲ 스카스카 캐넌에서 그림을 그리는 L화가 언제나 스케치북을 몸에 지니고 다니시는 예술가의 모습
ⓒ 조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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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 중 L화가는 어딜 가든 스케치북과 간이 의자를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한다. 이번 여행 내내 그가 스케치북과 접이 의자를 들고 다니며, 풍광이 멋진 곳이 나타나면 얼른 자리를 잡고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그늘 하나 없이 뜨거운 태양 아래 바위 위에서도, 숨이 가빠지는 고도 3900 미터 아라콜 패스의 정상에서도,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미루나무 아래서도, 그는 스케치북을 펼쳤다. 글을 쓰는 삶을 살겠다고 하고서도, 일상의 편안함에 매몰되어 겨우 가끔 끄적거리는 나. 자신의 몸의 일부처럼 화구를 지니고 다니는 그의 열정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맑은 것들로 근심을 씻어낸 여행

천산산맥에 끝없이 펼쳐지는 가문비나무 숲
▲ 가문비나무 숲 천산산맥에 끝없이 펼쳐지는 가문비나무 숲
ⓒ 조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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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은 알틴아라샨 산장으로 이동했다. 울퉁불퉁한 길을 넘어 우리를 산장으로 데려다 줄 차는 러시아 군용 트럭이다. 엉덩이를 탕탕 의자에 부딪치고, 어깨가 이리저리 쏠리면서 두 시간여 달려 산장 근처까지 이동했다. 길이 고르지 않은 나머지 구간은 도보로 갔다. 가는 길에 산을 빼곡하게 덮은 가문비나무, 시원한 물줄기, 그리고 색다른 종류의 엉겅퀴를 포함한 여러 야생화들을 보았다. 언덕을 올라가며 풀을 뜯는 양떼, 망아지를 거느린 어미 말, 양치기 소년과 개. 유목민의 나라 키르기스의 흔한 풍경이었다.

산장에 도착하고 점심을 먹고는 주변 산책을 몇 시간 했다. 고소 적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최근에 산림 치유 지도사 과정을 배우신다는 L선생님이 나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올라가는 길에 고고한 자태로 외따로 서 있는 가문비나무를 보더니, 자기 나무라고 정했다. 그는 나무에게로 가서 두 팔을 벌리고 오래 안고 있었다. 나무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는데 뭐라고 말을 건넸을까 궁금했다. 저녁에는 노천 온천으로 몸의 피로를 풀고 일찍 잤다.

높고 힘들지만 친구들이 있으니 넘을 수 있었던 천산산맥 아라콜 패스.
▲ 아라콜 패스 가는 길 높고 힘들지만 친구들이 있으니 넘을 수 있었던 천산산맥 아라콜 패스.
ⓒ 조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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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이틀 일정이 이 아라콜 패스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화요일은 고도 3300미터 정도의 유르타 캠프지에 도착하고, 수요일은 3900 미터를 넘어 아라콜 호수를 보고 내려오는 것이다. L선생님이 같이 가자고 할 때만 해도, 나는 이 여정을 만만하게 생각했다. 가시는 분들이 대개 60대 초반인데, 아직 40대 후반인 내가 뒤쳐질 일이 있겠나 싶어 별 준비 없이 온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전부 나보다 체력과 정신력이 뛰어났다. 나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대며 죽을 둥 살 둥 올랐는데, 그들은 조용히 너끈히 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과거 젊은 시절에 산악 대장 같은 걸 하신 분이 두 분. 우리 일행의 왕언니 노릇을 한 K선생님은 최근에도 지리산 종주를 했다나...)

고도가 높아 조금만 올라가도 숨이 찼다. 자주 쉬고 심호흡을 했다. 휴식을 취할 때는 주위 풍광을 하나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해 부지런히 휘둘러 봤다. 맑고, 푸르고, 높고, 고운 자연. 그 신령한 정기가 내 몸을 채워주었다. 나는 일상의 사념들을, 근심들을, 찌든 것들 것 조금씩 씻어내고 오직 푸르고 맑은 것들로 채워나갔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우박으로 변한다. 얼른 배낭을 방수 커버로 감싸고 걸어가는데 우박비로 눈이 떠지질 않는다. 허벅지와 얼굴을 때리는 우박이 아팠고, 손은 시렸다. 가야 하니까, 끝없이 발을 내디뎠다. 옆에서 L화가가 애정 어린 잔소리로 이런저런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면 힘들었을 것이다.

유르타에서 먹은 큼직한 양꼬치 구이
▲ 양꼬치 구이 유르타에서 먹은 큼직한 양꼬치 구이
ⓒ 조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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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타 캠프지에 무사히 도착하니 비가 돌풍을 동반한 폭우로 변했다. 우리는 폭우를 피할 수 있어서 안도했다. 캠프에서 양꼬치 구이와 감자를 넣은 양갈비로 푸짐한 저녁을 준비해주었다. 멀리 산꼭대기에 밀려오는 구름을 보며, 맥주와 와인을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유르타에서 일찍 잠을 청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 우리들은 천일야화처럼 서로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며 밤 시간을 채웠다. 어릴 적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그런 것들을 두런두런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구름이 많아 별을 보러 나가지는 않았다.

고도 3900 미터를 넘을 때, 마지막 흙 산 구간이 있는데 경사가 아주 가파르고 힘들다. 혼자라면 도저히 엄두도 나지 않고, 불가능했을 길. 앞서 가는 일행이 자기 발만 보고 따라 짚으라고 했다. 목표 지점을 멀리 보지 말라고 했다. 그의 발만 따라가며 간신히 정상을 넘었다. 넘자 마자 펼쳐지는 신비로운 에메랄드 빛 호수!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느끼며 거대한 장관 앞에서 감사하고 감사했다. 경이롭고 아름다운 자연에게, 험한 산길을 같이 넘어준 여행 친구들에게, 그리고 오늘까지 내 삶을 무사히 이끌어준 그 모든 사람들과 유형 무형의 존재들에게.

고도 3,900 미터를 넘자 펼쳐지는 신비로운 아라콜 호수
▲ 아라콜 호수 고도 3,900 미터를 넘자 펼쳐지는 신비로운 아라콜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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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름다운 자연과 그 안에 겸손하게 깃든 사람들. 그들이 있어서 내가 이만큼 살아왔구나 생각한다. 내려가는 길에 다리는 풀리고 시간이 7시간 정도로 오래 걸렸지만 마음만은 기쁨으로 벅차 올랐다.         


태그:#키르기스스탄, #천산산맥 아라콜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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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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