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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에서 시민혁명이 성공한 사례는 세 차례다. 1960년 4월혁명, 1987년 6월항쟁, 2016년 촛불혁명이 바로 그것. 이중 집권당이 수성(守城)에 성공한 사례는 단 한 차례, 6월항쟁뿐이다.

4월혁명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은 10년 뒤인 1970년까지 존속했지만, 실질적 수명은 1960년 하반기에 소멸됐다. 그해 7월 제5대 총선에서 전체 233석 중 2석밖에 건지지 못하면서, 단번에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1963년 제6대 총선에서는 6석을 건졌지만, 유력 정당의 위상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촛불혁명 때의 집권당인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꿔 존속하고 있지만, 2017년 5월 대통령선거에 이어 2018년 6월 지방선거에서까지 참패를 기록함에 따라 앞날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정책실장과 부총리 등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해 당내 개혁을 모색하고 있고, 또 총선이 2년이나 남아 있어 재기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상황을 놓고 보면 머지않아 자유당처럼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고 말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자유한국당이 그나마 연명하고 있는 것은 2016년 20대 총선 결과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당이 시민혁명 직후에 몰락했고, 새누리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이 위태위태한 반면, 6월항쟁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주정의당(민정당)은 상당히 질긴 생명력을 발휘했다. 그해 12월 제13대 대선에서 승리했을 뿐 아니라 민주자유당(1990년) → 신한국당(1995년) → 한나라당(1997년)으로 간판을 바꿔가며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민정당의 질긴 생명력, 그 비결

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
 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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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당은 1990년 통일민주당 및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을 만들면서, 당내 최대 계파인 민정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1979년 12·12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를 주축으로 하는 민정계는 그후 상당기간 유력 정치세력의 힘을 발휘하다가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인위적인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이다.

2006년 6월 26일 치 <동아일보>는 '추억 속의 민정계··· 한나라, 민정당 출신 거의 사라져'라는 기사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기사는 "당내에서 민정계, 민정계라고 하는데, 지금 민정계가 어디 있느냐? 나와 박희태, 이상득 의원이 전부다"라는 강재섭 의원의 말을 전하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현재 한나라당 소속 의원 127명 중 민정당 경력이 있는 사람은 강 의원이 말한 3명이 전부. 이들 외에 5, 6공에서 정부 고위직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이상배, 김기춘, 김용갑 의원 등 5, 6명 정도 있지만, 정치 입문 시점과 과정이 달라 민정계로는 분류되지 않는다."

6월항쟁 20주년이 다 돼 가던 2006년까지도 민정계가 사라졌는지 여부를 두고 이렇게 모호한 보도를 해야 했다. 자유당이나 자유한국당과 달리 민정당 혹은 민정계가 시민혁명 후폭풍을 견뎌가며 상당한 생존력을 발휘했기에 이런 보도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 역사가 앞으로도 똑같이 재현되리란 보장은 없지만, 자유한국당이 꼭 살아남고자 한다면 민정계의 역사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민정계가 갖고 있었던 생존 비결이 자신들한테도 있는지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김대중-김영삼 분열을 노린 민정당

민정계의 생존 비결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세 가지다. 첫째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전략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1987년 대선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승리하기는 힘들었다. 6월항쟁 때의 분위기로 보나, 대선에서 정통 야당을 지지한 표가 55.1%나 됐다는 사실로 보나, 정상적인 경우라면 노태우는 힘들었다.

이렇게 불리한 구도 속에서 민정당은 자기 힘이 아닌 야권의 힘을 극대화시켜주는 전략을 선택했다. 자기 힘을 끌어올리기 어려운 구도였기에 상대의 힘을 강화시켜 역이용하는 전략을 택했던 것이다.

그해 7월 11일 민정당은 김대중 사면·복권 조치를 단행했다. 분명히 김대중을 돕고 야권을 강화시키는 조치였지만, 이것은 두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김영삼 분열을 유도해 양쪽이 55.1%를 나눠 갖도록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가 28.03%를 가지고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27.04%를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노태후 후보는 36.6%의 지지율로도 당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서 찍은 사진.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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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당이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전략을 구사한 데 비해, 촛불혁명 이후의 자유한국당은 정반대 모습을 보였다. 자기 힘을 늘릴 수 없는 불리한 구도 속에서도, 자기 힘을 늘리고 상대 힘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홍준표 전 대표가 남북정상회담 같은 한반도 평화 국면에 편승하지 못하고 일관되게 이를 거스르며 민주당 지지도를 떨어트리려는 전략을 택한 사실에서도 민정당과의 차이가 드러난다.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자유한국당에서는 민정당식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힘이 발견되지 않는다.

둘째는 시민혁명의 주제가 민정당한테 비교적 유리했다는 점이다. 4월혁명 때는 국민들이 3·15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촛불혁명 때는 국민들이 국정농단을 규탄했다. 두 주제의 공통점은 현직 대통령의 부정행위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에 비해 6월항쟁 때는 국민들이 직선제 개헌을 외쳤다. 현직 대통령의 부정행위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주제였다.

이는 전두환 대통령이 이승만·박근혜 대통령과 달리 임기를 무사히 마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만 내주고 권력은 내주지 않았다. 이렇게 전 대통령이 무사했기에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전략'을 구사하면서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두환은 그후로도 한동안 정치적 실력을 유지하며 노태우 정권을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자유한국당이 촛불혁명으로 지도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상대를 아예 통째로 영입... 민정당의 전략

셋째는 과감한 외부수혈로 당내 쇄신을 도모했다는 점이다. 이번에 자유한국당도 친노 출신인 김병준 명예교수를 지도자로 영입했지만, 민정당의 외부수혈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민정당은 1987년 12월 대선에서는 승리했지만, 이듬해 4월 제13대 총선에서는 패배했다. 그래서 여소야대 국면을 맞이했다. 이를 타개하고자 민정당은 외부수혈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처럼 상대 진영 출신 지도자를 영입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상대 진영 일부를 통째로 영입하는 과감한 전략을 선택했다.

3당 합당은 한국 민주화에 역행하는 사건이지만, 민정당 입장에서는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한테 기득권을 떼어주는 모험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만약 야당 출신 거물급 지도자를 영입하는 수준에서 그쳤다면, 기존의 민정당 사람들이 그 지도자의 말을 잘 듣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그나마도 당내 쇄신이 힘들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민정당은 국민의 외면 속에 훨씬 빨리 소멸했을 것이다. 6월항쟁 20주년이 다 되도록 "추억 속의 민정계"라는 말이 나오며 민정계 소멸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김종필 전 총리(맨 오른쪽)가 민자당 최고위원이였던 1991년 서울 가락동 정치연수원에서 열린 민자당 창당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모습. 왼쪽부터 박태준 최고위원,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최고위원.
 김종필 전 총리(맨 오른쪽)가 민자당 최고위원이였던 1991년 서울 가락동 정치연수원에서 열린 민자당 창당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모습. 왼쪽부터 박태준 최고위원,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최고위원.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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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한 명을 영입해 조직 쇄신을 해서 성공을 거두려면, 전제조건에 유의해야 한다. 외부에서 들어와 당내 기반이 없는 그 한 명한테 힘을 실어줄 강력한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무명의 승려 신돈이 갑자기 나타나 구세력인 권문세족을 숙청할 수 있었던 것은 공민왕이 배후에서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에 갓 급제한 청년 관료 조광조가 구세력인 훈구파를 상당부분 약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중종 임금이 뒤에서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아무리 덕망이 있고 학식이 있고 정치 경험이 있다 해도, 외부 출신 지도자 한 사람이 정당을 개조하기란 쉽지 않다. 당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그 지도자의 말에 순종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 그 지도자한테 힘을 실어주지 않는 한 그렇게 되기가 쉽다.

하지만 지금 자유한국당은...

지금의 자유한국당에는 외부 출신 지도자에게 힘을 실어줄 강력한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유한국당이 택할 수 있는 대안은, 민정당처럼 외부 지도자 한 사람이 아닌 외부 세력을 통째로 영입하는 것이다. 외부세력이 통째로 들어와 당내 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민정당 사람들이 군말 없이 기득권 일부를 양보하고 당내 쇄신에 어느 정도 호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3당 합당 뒤에 치러진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민정계는 공천권 상당 부분을 민주계·공화계에 양보했다.

"공천자를 계파별로 보면, 민정계 148명, 민주계 52명, 공화계 57명으로 분류됐으며..." - 1992년 2월 2일자 <경향신문>.

만약 강력한 외부세력이 통째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민정당 사람들이 109개(52+57)가 되는 후보 자리를 쉽게 포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민정계가 기득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민자당과 그 후신인 신한국당·한나라당을 매몰차게 밀어내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민정계는 인위적 죽임을 당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사라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유한국당은 민정당식 외부수혈을 하기도 쉽지 않다. 민정당은 13대 대선에서 승리해 정권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 힘을 빌려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지금의 자유한국당한테는 그런 힘이 없다. 그래서 외부 지도자나 외부 세력에 의한 충격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존 구성원들 스스로의 각성을 통해서 당내 개혁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게 자유한국당의 처지다.

민정당은 '성공한 쿠데타'의 결과로 정권을 잡았을 뿐 아니라 '성공한 시민혁명'으로부터도 자신들을 지켜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 정도로 생존력 강한 정치 집단은 드물다. 그들에게는 위와 같은 3대 비결이 있었다. 이들과 비교해서 자신들의 생존력은 과연 어떤지, 또 지금의 자구책으로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는지, 자유한국당은 한번쯤 진지하게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태그:#자유한국당, #김병준, #민정당, #3당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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