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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연일 폭염이 계속되고 절기상 대서인 23일 서울 남대문시장 거리에 찾는 사람들이 줄어 한산하다. 2018.7.23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연일 폭염이 계속되고 절기상 대서인 23일 서울 남대문시장 거리에 찾는 사람들이 줄어 한산하다. 2018.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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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팬 위의 연기처럼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올라온다. 머리에서부터 겨드랑이 발끝까지 땀이 흐르고 습기로 가득 찬다. 버스에서 내뿜는 뜨거운 증기에 화들짝 놀라 버스 사이를 요리조리 지나간다. 순간 헬멧 안으로 들어온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덮쳐 숨이 막힌다. 저 앞에 신호등 색깔이 노란색으로 바뀌고, 내 머리도 노랗게 변한다. 도로 한복판에서 신호에 걸리면 무방비다. 하늘 위의 태양, 땅위의 에어컨 실외기가 내뿜는 열기, 그 열기를 감싸는 도시의 건물과 이산화탄소가 어우러져 찜통 속 만두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뜨거워진 핸드폰에 문자가 울린다.

"전국에 폭염특보 발효 중, 논밭 작업, 건설현장 등 야외활동 자제, 충분한 물 마시기 등 건강에 유의바랍니다."

행정안전부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문자로 보내는 이유는 뭘까. 낮 최고기온 37도, 체감온도 40도. 자외선은 매우 높은 9, 미세먼지 나쁨. 이 무시무시한 자연의 섭리를 피하기 위해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신호를 대기하면서 길가 상가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목을 보호하기 위해 유니폼 상의의 옷깃을 세우고, 선크림은 하얀 자국이 남을 정도로 덕지덕지 바른다. 그 위를 마스크로 덮는다. 아재다. 아재 패션의 완성은 싸구려 선글라스. 멋을 버리고 몸을 지키는 걸 택했건만 태양은 선글라스를 뚫고, 선크림마저 녹일 기세다. 얼굴과 손은 따갑고, 머리는 어지럽다. 집중력을 잃으면 사고다.

22일 낮최고기온 37도, 자외선지수 9를 기록했다.
▲ 체감온도 40도 22일 낮최고기온 37도, 자외선지수 9를 기록했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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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보다 시원한 손님의 한마디

집에 에어컨이 있다면, 한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은 날씨다. 주문이 폭주한다. 배달주소에 옥탑방과 4층이 뜨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오지만, 얼마나 나가기 싫을지를 상상하면 이해가 간다. 밖이 워낙 더우니 계단을 오르는 것은 오히려 할 만하다. 그늘이 있기 때문. 사실 날씨나 계단보다 힘든 것은 손님의 말 한마디다.

주문이 밀리다 보면, 정신이 없다. 와중에 매장에 전화가 왔다. 워낙 바빠서 내가 받았다. 도대체 언제 출발하느냐는 불평이다. 배달이 밀려서 이제 출발한다고 설명드렸다. 이 이상의 설명을 할 수 없으니 '죄송합니다'만 반복한다. 10분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코 앞인데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는 항의다. 일단 죄송하다고 하고, 곧 도착할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점장님이 배달가신 분 어딨는지 확인하시고 연락주세요."

전화는 끊겼다. 덕분에 라이더에서 점장으로 승진했다. 얼마 후 동료가 씩씩 거리며 들어왔다. 손님이 다짜고짜 짜증을 내면서 점장과 이야기됐으니 100원 깎아 달라고 우겼다는 것이다. 손님에게 점장은 난데,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동료는 그런 말 들은 적 없다고 대꾸했다가 '늦었으면 사과부터 해야지, 기본이 안돼 있네'라며 모욕적인 말을 들어야 했다.

"아니, 사과할 틈도 안주고 보자마자 다다다다다 짜증부터 내는데 어떻게 사과를 해."

이야기를 듣고만 있어도 불쾌함과 짜증이 올라왔다. 배달이 늦은 것은 회사의 잘못이고 사과를 해야 할 일이지만, 노동자가 인격모독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

여름철, 우리가 목격하는 또 다른 진상은 동료들끼리 '팬티충'이라고 부르는 존재다. 팬티만 입고 배달음식을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인데, 상의까지 탈의한 분도 있다. 10대부터 50대까지 노소를 불문한 남성들이다. 여성 손님들 중 일부는 배달노동자와 마주치는 게 불편해서 좁은 문 틈으로 손만 내미는 경우도 있는데, 남성들은 문을 벌컥벌컥 열면서 맨몸으로 활개를 친다. 여성 라이더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편견과 같은 남자들끼리 뭐 어때라는 강력한 남성연대가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하지만 라이더들 사이에서는 '극혐'으로 통한다. 불쾌하다.

물론, 이런 손님들은 극히 소수다. 시대가 변하고 갑질이 우리사회의 문제가 되면서 배달 노동자에 대해 배려를 해주는 손님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배달 특이사항에 '조심히 안전운전하세여'라는 메모를 남긴 분이 있었다. 이런 손님에게 음식을 전달할 때는 폭염의 날씨도 높은 계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적지 않은 손님들이 '감사하다', '고생많습니다'라는 말을 건네 줬다. 이런 분들을 만나면 보람도 생기고 힘이 난다.

조심히 안전운전하세요, 라고 배달메모를 남긴 손님
▲ 손님의 품격 조심히 안전운전하세요, 라고 배달메모를 남긴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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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와 국회, 정부는 폭염 대책을 내놓아야

하지만, 이런 정과 공감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지난 16일에는 세종시에서 보도블록 작업을 하던 30대가 사망했다. 이번 달에만 9명이 폭염으로 사망했고, 7월 20일 기준, 올해 온열 질환자는 956명이다. 재난적인 상황 속에서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 고용노동부가 1시간에 10분씩의 휴식시간과 근로자 쉼터 설치, 오후 1시부터 3시까지의 외부작업 지양 등을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했지만, 가이드라인을 지키는 사업장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 고용노동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정부가 나서야 한다.

라이더들이 헬멧을 쓰지 않으면 사업주가 처벌받기 때문에, 매니저와 점장이 항상 라이더의 헬멧과 안전장비를 챙긴다. 이걸 규정한 것이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32조다. 여기에 보면 재미있는 조항이 있다. 영하 18도 이하의 급냉동어창고에서 일할 경우 방한모자, 방한옷, 방한신발, 장갑 등을 지급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겨울철엔 영하 18도로 내려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영하 18도의 거리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 배달노동자 등은 냉동어창고에서 일하는 것과 다름없지만, 안전장비를 보장받지 못한다.

같은 조항에서 선창 등에서 먼지가 심하게 발생하는 하역작업에는 방진마스크를 지급하게 되어 있는데, 미세먼지와 황사에 시달리는 도시 노동자들에게 마스크가 지급되지는 않는다. 이 규칙을 확대하고, 새로운 조항을 추가해서, 폭염, 혹한, 폭설, 폭우, 미세먼지, 황사 등의 기후변화에 대한 보호 장구를 지급하는 의무를 지우는 건 어떨가?

배달노동자의 경우에는 직사광선과 비를 막을 수 있는 캐노피 오토바이로 교체하고, 냉풍조끼를 유니폼으로 지급하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다. 맥도날드는 하의 유니폼을 청바지로 규정하고 있는데, 의지만 있다면, 여름용 쿨 바지로 교체해서 지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연을 파괴하면서 성장한 기업들이 부담해야 할 일종의 환경세이기도 하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을 기후 변화에도 적용해 보자.
▲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을 기후 변화에도 적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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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과 노동자의 연대

흔히 기후 변화하면, 녹아내린 빙판 위에 올라간 북극곰을 떠올린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북극곰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처럼 그린다. 하지만, 삶이 위태로운 건 북극곰만이 아니다.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터전 역시 녹아내리고 있다. 자연에 대한 개발과 착취로 이윤을 얻은 소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기후 변화에 따른 피해를 덜 입는다. 이제, 북극곰과 노동자들이 함께 손을 잡고 기후변화에 항의하는 이미지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아스팔트 위에 아지랑이 대신, 노동과 녹색의 연대가 피어나길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박정훈 기자는 맥도날드 라이더로, 최저임금1만원(박종철출판사)의 저자입니다.



태그:#박정훈, #라이더, #기후변화, #폭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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