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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 가지 일을 오롯이 좋아하는 마음보다 신명나는 것은 없다.
▲ 막신일호(莫神日好)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오롯이 좋아하는 마음보다 신명나는 것은 없다.
ⓒ 이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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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즐기는 인문학적 붓장난'을 연재하면서 가끔 독자의 인터넷 쪽지나 이메일을 받고 있다. 도움이 되었다는 내용의 전언(傳言)을 읽으면 글쓰기의 노고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은 진정성이 물씬 느껴지는 독자의 이메일을 받고서 비망록에 "단 한 사람이 내 글을 좋아해도 정성껏 쓰겠다"라고 썼다.

지지난 주 한 청년의 이메일을 받았다. 지방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아르바이트하면서 계속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수십 번 입사 지원을 했지만, 번번이 떨어져 좌절을 겪고 있는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붓글씨 한 점을 써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라서 답장을 썼다. 원하는 글귀와 주소를 알려주면 붓글씨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겠노라고 했더니 곧바로 회신이 왔다. 글씨를 그냥 받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 식사 한 끼 정도는 꼭 대접하고 싶다면서 직접 찾아와 받아가겠다는 내용이었다. 힘이 드는 상황일 텐데도 격식을 차릴 줄 아는 정중함이 마음에 들었다.

약속 날짜와 장소를 정한 후 여러 날 동안 붓글씨로 쓸 적당한 문구를 생각했다. 숱한 생각 끝에 '막신일호(莫神一好)'로 결정했다.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오롯이 좋아하는 마음보다 신명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순자> '수신편'에 실려 있다.

누군가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자를 동양의 프로메테우스라고 일컬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지시를 어기고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주었다. 인간은 그 불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동물과 구분되기 시작했고, 자연을 극복할 수 있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한마디로 인류 문명의 근원을 의미하는데, 그 불로 인해 신(神)들이 주도하는 시대를 벗어나 인간의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순자 역시 동양에서 인간의 시대를 주창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들은 경천사상(敬天思想)에 바탕을 두고 '하늘(天)'이 천지자연의 법칙을 운행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며, 천벌을 내리는 절대 신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순자는 하늘이란 자연 현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하늘과 인간의 종속관계를 거부했다. 하늘의 뜻을 묻는 운명론에 정면으로 맞선 순자는 인간의 일을 중시했고 인본주의로 일관했다.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순자 사상의 핵심이다.

날다람쥐보다 지렁이가 더 낫다

<순자> 권학편에 '오서지기(鼯鼠之技)'라는 사자성어가 나온다. 날다람쥐의 재주라는 뜻으로 재주는 많지만 변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비유한다. 날다람쥐는 일반 다람쥐보다 몸집이 3배 정도 크고, 나무 사이를 날 수 있는 등 재주가 다섯 가지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곧잘 날지만 지붕 위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나무를 잘 타지만 꼭대기에는 이르지 못하며, 헤엄을 잘 쳐도 계곡을 건너지는 못한다. 또 구멍을 팔 수는 있지만 몸을 숨기지는 못하고, 달리기를 잘해도 사람보다 빠르지 못하다. 즉 날다람쥐가 이것저것 재주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전문성이 없기에 궁지에 빠지는 일이 많다. 이런 경우를 오서기궁(鼯鼠技窮)이라 한다. 날다람쥐처럼 여러 일을 얕게 하지 말고 한 가지라도 잘 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순자의 주장은 초지일관 매우 논리정연하며 현실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으며, 공부는 자신의 수양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선천적인 자질보다는 후천적인 배움을 중시했기에 권학편 곳곳에서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공부란 원래 하나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라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지렁이는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도 없고 강한 근육과 뼈도 없지만, 위로는 진흙을 먹고 아래로는 깊은 땅속의 물을 마실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마음이 한결같기 때문이다."

우리를 가장 큰 기쁨으로 몰아넣는 것이 몰두다.
 우리를 가장 큰 기쁨으로 몰아넣는 것이 몰두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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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속담과 맥이 닿는 말이다.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해야 성공한다는 가르침은 쉽게 접할 수 있다. 무쇠를 갈아 바늘을 만들 수 있고,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 처마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낙숫물은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돌에 구멍을 낼 수 있다. 꾸준함을 이기는 것은 없다.

가끔 TV 채널을 돌리다가 <생활의 달인>이란 프로그램에 눈길을 고정할 때가 있다. 수십 년간 한 분야에 종사하며 부단한 열정과 노력으로 달통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실력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정말 공감 100%이다. 조지 레오나르드의 <달인>이란 책을 참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그 책의 핵심 내용을 화면으로 보는 느낌을 받는다. 조지 레오나르드는 달인의 길을 이렇게 말했다.

"궁극적으로 연습은 달인의 길 자체다. 달인의 길에 오래 머물다 보면 그곳 역시 생기 넘치는 장소이며,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있으며, 도전과 안락함, 놀라움과 실망, 무조건적인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길을 여행하는 동안 충돌과 타박상-몸과 마음, 자아의 타박상-을 입어도, 그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믿을 만한 것임도 알게 된다. 그러면 마침내 그것이 그 사람을 그 영역의 승리자로 만들어줄 것이며, 그가 그것을 바란다면 사람들은 그를 달인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이든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전문가들을 보면 대체로 1만 시간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한다. 1만 시간은 매일 3시간씩 훈련할 경우 약 10년, 하루 10시간씩 투자할 경우 3년이 걸리는 지난한 노력이다. 조선 제일의 서예가 추사 김정희는 노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70 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우리를 가장 큰 기쁨으로 몰아넣는 것이 몰두다. 무엇인가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면 정말 미친 것이지만, 1만 시간 정도 지속해서 몰입하면 내공이 엄청난 고수가 된다. 모든 일의 성패는 얼마나 그 일에 열정적인가에 달려 있다. 나는 직업이나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자기 일을 즐기고, 그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순자가 말한 '막신일호'의 경지다.

현대는 전문가의 시대다. 재능이 특출한 극소수의 팔방미인은 여러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겠지만, 평범한 사람은 자신의 역량을 한 곳에 집중해야 결실을 볼 수 있다. 인류사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대부분 사람은 마니아적 성격을 지녔던 것 같다. 마니아(mania)란, 어떤 한 가지 일에 몹시 열중하는 사람을 뜻한다.

한자어로는 접사 '-광(狂)'과 유사한 뜻을 가지고 있다. 독서광, 영화광, 야구광 등을 생각해 보라. 무엇인가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열정은 놀랍도록 뜨겁다. 공부건 일이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하고 쉴 때 누군가는 아직도 연습장에서 피땀을 흘리고 있다. 하나에 몰두하다 보면 성취는 자연스럽게 따를 것이고, 한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면 삶의 참된 의미를 맛볼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내게 오다

청년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회사에 출근할 때 혹시 붓글씨가 비에 젖을세라 비닐로 여러 겹 감싸 양복 저고리 속주머니에 단단히 챙겼다. 누구가를 처음 만날 때 늘 떠오르는 시가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 현재와/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후략)"

사람의 소중함, 만남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이 시를 알고부터 사람 만나는 일이 많이 신중해졌다. 그전까지는 만남을 '어마어마한 일'로 생각하지 못했는데, 실로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하자고 마음을 다졌다. 시인의 말처럼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께 만난다는 것이고, 그 사람의 일생과 마음을 동시에 만난다는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청년과 만남은 실로 '어마어마한' 인연일 수도 있다.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청년과 만남은 실로 '어마어마한' 인연일 수도 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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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약속 장소로 가면서 나는 최대한 말을 적게 하리라고 생각했다. 말이 많으면, 가르치려고 한다는 느낌 때문에 효과가 반감될 수가 있다. 무슨 말을 할까를 생각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귀와 세심한 안목을 준비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커피숍에 들어서니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냐고 물었더니, 내가 연재하는 글 끝에 사진이 있어서 금방 알 수 있었다고 하였다. 아, 그렇게 간단한 것을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청년은 깔끔한 용모에 눈빛이 총명했다. 나는 사람을 처음 볼 때 나름대로 관찰하는 원칙이 3가지 있었다. 첫째는 관상이고, 둘째는 그 사람이 하는 말과 동작이고, 셋째는 직업이다. 여기에 사주명리(四柱命理)를 공부하면서부터는 공부 삼아 사주를 볼 때도 있다. 비율로 따지면 관상 20%, 언행 40%, 직업 20%, 명리 20% 정도이다. 사주팔자는 묻지 않으면 알 수 없기에 빼놓는 경우가 많지만, 3가지만 유심히 관찰하면 그 사람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20세기 가장 훌륭한 인도 철학자로 꼽히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평가가 들어가지 않은 관찰은 인간 지성의 최고 형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을 대할 때면 습관처럼 되뇌어 보는 말이다. 하지만 평가를 하지 않고 관찰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관찰만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어느 틈에 그 사람을 평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다. 내가 볼 때 청년은 아주 반듯했고, 자기 몫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인재로 보였다.

나는 의식적으로 청년에게 말을 시켰다. 고향을 묻고, 가족에 관하여 묻고, 고민을 묻고, 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런 후 그가 말을 할 때는 끝까지 들었다. 나는 상대방이 말할 때 끝까지 듣는 것을 철칙으로 정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육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경험으로 배운 교훈이다.

말을 할 때 중간에서 끊고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는 상당히 기분이 복잡해지는데, 마음이 상할 때가 더 많다. 그것과는 반대로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선배가 있는데, 그 선배와 대화만 해도 고민이 해소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해주면 그 사람도 나처럼 느낄 것으로 생각하고 끝까지 들어준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먹는 약 2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했다. 헤어질 때 청년은 "오늘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청년의 앞날이 잘 풀리기를 기원했다. 사람의 앞날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청년과 만남은 실로 '어마어마한' 인연일 수도 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축성여석의 방'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태그:#오서지기, #달인, #1만시간의 법칙, #청년, #인문학적붓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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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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