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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방 유해발굴지 현장 발굴 당시와 다르게 풀이 무성하게 자란 현장
▲ 배방 유해발굴지 현장 발굴 당시와 다르게 풀이 무성하게 자란 현장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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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오전 11시,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설화산 유해 발굴지를 오르는 길은 풀이 무성했다. 한동안 아무도 오지 않은 것처럼 길을 알아볼 수 없었다. 기온은 섭씨 39도를 육박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운 날씨였다. 김장호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장(아래 유족회장)은 고령임에도 길을 헤치며 일행을 안내했고 유해 발굴지를 찾아온 일행은 땀을 쏟으며 쉼 없이 언덕을 올라갔다.

일본 <아카하타신문>의 쿠리하라 치즈루 기자는 충남 아산의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지 현장을 취재했다. 그와 동행한 나는 그가 왜 이곳까지 방문 취재했는지 인터뷰했다. 그리고 유해 발굴지에서 다시 만난 김장호 유족회장의 못다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아산 민간인 학살'을 아십니까

유해발굴지1 발굴 당시 유해가 묻힌 현장. 발굴단은 사진 가운데 서 있는 밤나무 아래 뒤엉킨 유해가 너무 많아 별 수 없이 나무를 베어야 했다고 전했다.
▲ 유해발굴지1 발굴 당시 유해가 묻힌 현장. 발굴단은 사진 가운데 서 있는 밤나무 아래 뒤엉킨 유해가 너무 많아 별 수 없이 나무를 베어야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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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친일파를 옹호한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과 함께 남북 분단을 획책했다. 한국민은 크게 저항했다.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권은 저항하는 민간인을 '빨갱이 처벌'이라는 명목 아래 전국 곳곳에서 학살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학살을 자행한 주체는 주로 미군, 국방군, 경찰 등이었다. 빨갱이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씌운 학살은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절차 없이 '의심'만으로도 자행됐다. 부역자와 그 가족을 처단한다는 명분 아래 희생된 대상 중에는 나이 든 사람은 물론 부녀자,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민간인 학살 추정 장소는 전국 168곳. 그중 발굴이 이뤄진 곳은 단 13곳뿐이다. 아산에도 유해가 매장된 곳으로 10곳가량이 추정된다. 그나마 발굴이 이뤄진 배방읍 설화산 폐금광에서는 유해 200여 구가 넘게 나왔다. 발견된 여성용 비녀만 89개다.

유전자 감식 결과 배방읍 설화산에 묻힌 민간인은 주로 여성들과 노인, 어린아이들이었다. 특히 이곳 현장은 너무나도 참혹한 광경 때문에 발굴 작업이 중단되기도 했었다. 이렇게 희생된 민간인 수는 전국 1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지난 5월 14일, 200여 구의 유해를 세종시 추모의 집에 모시기 위해 열린 안치식에서 유족들은 설움을 삼키듯 울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부모 형제들의 넋을 보낸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랐다.

"두 살배기가 무슨 사상과 이념을 알았겠어요?"
유해발굴지2 발굴단은 배방 유해발굴지는 부녀자와 어린아이 노인의 유해가 특히 많았다며 그 참혹함에 종종 발굴을 멈춰야 했다고 전했다.
▲ 유해발굴지2 발굴단은 배방 유해발굴지는 부녀자와 어린아이 노인의 유해가 특히 많았다며 그 참혹함에 종종 발굴을 멈춰야 했다고 전했다.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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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호 유족회장은 유해발굴 현장에서 쿠리하라 기자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부역혐의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집단 학살당했어요. 국가가 국민을 무참히 학살했다는 사실은 국가의 수치예요. 사실 해외 언론에까지 (이런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이런 역사는 창피하잖아요."

김 회장이 가족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건 노무현 정부 때 일이다. 노무현 정부 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조직됐고 김 회장은 그때부터 유족회를 만들고 유해현장을 찾아 다녔다.

"아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실화해위 보고서가 가장 늦게 나왔어요. 근데 이명박 정부가 진실화해위를 없앴잖아요. 활동이 중단됐어요.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이 기회에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용기를 냈어요. 이대로 가면 내 가족과 후손이 똑같은 아픔을 겪을 거 아니에요."

김 회장과 같은 아픔을 겪은 유족들은 부역 혐의 말고도 평생 밝히지 못할 또 다른 아픔을 안고 살았다. 설명을 이어가던 김 회장은 눈시울을 붉히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가족을 죽이고 일부 남은 가족에게 국가는 철퇴를 가했어요. 마음대로 해외를 못 나가게 하고, 공무원도 될 수 없었고, 심지어 군 장교로 갈 수 없게 하고... '연좌제'라는 철퇴로 가둬놨어요. 유족은 신원 조회하면 다 걸렸어요."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연좌제를 폐지했다고 하지만 유족들은 그 서류가 아직도 어딘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승만이 6.25를 막지 못하고 총소리가 나니 자기만 살겠다고 대전으로 도망갔어요. 민간인들이 살기 위해서는 부역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근데 두 살짜리가 어찌 사상을 알고 이념을 알았겠어요. 말도 안 되는 거죠. 사실을 정확히 알면 빨갱이 소리 못합니다."

전쟁통은 국민 서로를 반목케 했다. 특히 이념과 사상의 대립은 형제 같은 이웃을 하루아침에 적으로 만들었다. 한번 적으로 간주하면 아이도 노인도 이유가 되질 않았다. 그저 무참히 죽여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지옥 같은 이념전쟁의 잔혹함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었다.

"국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유족에게 진실한 사과를 하고 끝내야 해요. 단순한 희생자가 아닙니다. 학살당해 가족을 다 잃은 거예요. 그 철퇴 맡에서 60년 이상을 산 게 억울해요."

'전범국' 일본... 언론의 역사 바로잡기 노력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을 교과서에서 배운 적이 없는 세대는 알지 못했다. 이 사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또 얼마나 우리 민족을 오랫동안 아프게 만들었는지. 이제 서서히 그 어두운 역사가 드러나고 있고 해외언론에서도 관심 두고 조명하고 있다.

일본 언론과 기자가 동행한 부분은 일부분이다. 하지만 일본 언론이 한국전쟁의 비극이 빚어낸 아픈 역사의 현장을 찾으며 일본 식민지배로 인해 한국전쟁까지 이어졌다는 사실 인정과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는 분명히 밝혔다.

안치식에서 "유해발굴 내내 참혹한 현실에 가슴 먹먹했다, 뭐가 진실이고 정의인지 모르겠다"라고 흐느낀 박선주 공동조사단장의 위로. "다시는 이런 끔찍한 세상이 오지 않게 해달라"는 유가족의 아픈 당부를 전해 들었던 기자도 당시 울컥했던 감정이 다시 밀려 올라왔다.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지를 직접 찾은 일본 언론을 보며 우리의 반성은 어디까지 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유족들을 우리 역시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았는지,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는지 돌이켜볼 일이다.

[쿠리하라 기자 미니 인터뷰] "전쟁을 증오하는 마음은 똑같다"

쿠리하라상과 김장호 회장 배방 유해발굴 현장에 취재를 온 아카하타 신문의 쿠리하라 기자에게 부역혐의에 대해 설명하는 김장호 유족회장.
▲ 쿠리하라상과 김장호 회장 배방 유해발굴 현장에 취재를 온 아카하타 신문의 쿠리하라 기자에게 부역혐의에 대해 설명하는 김장호 유족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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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하타 신문>의 쿠리하라 치즈루 기자는 촛불집회 때도, 위안부 문제 때도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의 정치·사회 문제 취재를 주로 담당한다. 쿠리하라 기자는 "7월 말 또는 8월 초 <아카하타 신문>에 이번 취재 내용이 연재기사 혹은 특집판의 형태로 보도될 예정"이라고 알렸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

- <아카하타 신문>을 소개해달라.
"1928년 일본 공산당이 창간한 <아카하타 신문>은 올해로 90주년을 맞는다. 창간 이후 줄곧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해왔으며 일제 식민지배를 비판해온 언론이다. 1931년 3월 1일 발행 신문에서는 3.1운동을 지원하며 식민정책을 취하는 일본 정부에 이의를 제기한 역사가 있다. 일간신문이면서 매주 일요일 특집판을 발행하며 113만 명에 이르는 유료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 이곳까지 취재를 온 이유는?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등 한국전쟁 종전에 대한 일본 내 관심이 높다. 그러나 한국이 휴전 상태인 줄 모르는 일본인도 많다. 민간인 학살 이외에 한국전쟁 전반의 이야기를 일본인에게 알리고 싶다."

- 민간인학살에 왜 관심이 많나.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한반도 분단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취재는 한국전쟁 종전 관련 취재다. 한국전쟁이 민간인에게 준 영향과 종전에 대한 한국인들이 종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끼는지 알고 싶었고 더 좋은 한국을 만들려는 사람들과 연계하기 위해서다."

- <아카하타 신문>은 일본이 전쟁 중 가해 행위를 한 부분에 대해 취재를 많이 한다고 들었다. 왜인가.
"일본이 침략전쟁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을 죽인 부분을 직면해야지 정말로 아시아 나라들의 신뢰를 받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 내에서도 원폭과 공습 피해 희생자들을 알리며 전쟁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 <아카하타 신문>이 <우리는 가해자입니다>라는 책을 펴냈던데.
"한일간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해 바른 역사를 알리는 작업의 일환으로 펴낸 책이다. <우리는 가해자입니다>는 아카하타 산하 신일본출판사가 기록한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의 잔혹사를 엮었다. 내가 취재한 내용도 들어있다."

- 아산 민간인 학살 현장 취재를 마친 소감은?
"용기를 내 사건을 고발한 김장호 유족회장과 유족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발을 통해 다음 세대가 같은 경험을 하는 걸 막고 싶었다는 김장호 회장의 말에 감동했다. 어느 나라 전쟁도 피해를 본 건 일반 시민과 아이들, 여성, 노인이었다. 전쟁을 싫어하며 증오하는 마음은 똑같다는 것을 실감했다. 많은 분과 협조해 전쟁을 없앨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천안아산신문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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