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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좋은 직장을 갖고 싶어한다. '좋은 직장'의 의미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으나, 대체로 정당한 급여, 인간적 대우, 고용주 기분에 따라 목이 왔다갔다 하지 않는 안정적 일자리일 것이다.

세 가지 모두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나는 특히 세 번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제 끊길지 모르는 보수를 '정당한 급여'로 생각하기 어렵고, 문자로 해고통지를 날리는 직장이 '인간적 대우'를 갖췄다고 볼 수도 없는 탓이다('존경하는 직원님께, 오늘부터 출근이 불필요함을 삼가 알려드립니다'?).

영국의 문학이론가 테리 이글튼은 해박한 지식만큼 뛰어난 재치로도 유명하다. 그는 재치를 발휘해 복잡한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데 탁월하다. 예컨대 이글튼이 제시한 '이데올로기'의 정의는 이렇다.

'입냄새처럼 오직 남들만 가지고 있는 것.'

'철밥통'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남이 가진 안정적 일자리.' 누군가 내게 없는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의 '철밥통', 깰까 말까

 누군가 내게 없는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누군가 내게 없는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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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가만히 있는 것이다. 가장 손쉬운 선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보다 훨씬 안정된 직업을 지닌 사람을 평온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주위에서 가만히 있지 않는다.

'생산성 바닥인데, 철밥통 지키는 귀족노조' 

이런 류의 기사 제목은 쉽게 분노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다. 여기서 분노의 화염이 극대화하려면 내가 받아본 보수보다 높되, 너무 높지는 말아야 한다. 예컨대 연봉 9천만 원이 90억 원이나 190억 원보다 훨씬 우리를 격분케 하는 것이다.

내가 언제부터 남의 회사 '생산성'을 챙겨왔다고, '철밥통' 이야기에 이토록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일까? 사실 생산성 계산하는 법도 잘 모르는데, 왜 머릿속에서는 빈둥거리며 놀다가 돈을 챙기는 밉상의 얼굴들이 이토록 생생히 떠오르는 것일까? 이러니 '밥통' 이야기가 보수언론이 의도적으로 조장하는 '질투의 정치'라는 생각을 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생산성 이야기는 뒤에서 더 하기로 하고, 철밥통에 대처하는 두 번째 방법을 보자. 두 번째 대안은 '철밥통 분쇄'를 외치며 달려드는 것이다. 밥통을 깨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일자리 자체를 없애려고 할 필요는 없다. '경쟁력 제고'나 '노동개혁' 같은 괜찮은 이름을 붙여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후 '전직 철밥통'이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걷듯 살아가거나 끝내 직장을 잃게 될 때,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난 것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런다고 내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겠으나, 상대적 박탈감만은 수백만(안정된 일자리 수) 분의 1만큼 줄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같이 불행해지기'의 한계는 마지막 남은 한 개까지 '밥통과의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철밥통 깨는 문화'가 팽배하면 내 밥통을 깨려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내 밥통은 철밥통이 아니'라고 강변해도 소용없다. 내가 남의 밥통을 향해 진격할 때 사정을 꼼꼼히 따져봤던가. 남의 밥통 깨는 사회에서는 내 밥통도 무사할 수 없다.

'생산성'의 폭력

'밥통'을 집중분석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앞서 제조업 노동에 관해 두 개의 글을 쓴 뒤, 수많은 반응이 쏟아졌다. 대표적인 비난은 '생산성 바닥인데 임금인상 요구가 웬 말이냐'였다. 기업주가 이런 주장을 한다면 약간 이해가 가지만, 같은 노동자 중에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 다수가 서비스업계의 사무직 노동자인 듯했는데, 이들이 자주 '나사나 조이면서'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으로 보아, 자동차 기술이나 생산노동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은 '같은 노동자'로 불리거나 심지어 '노동자'로 불리는 것조차 불쾌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이 '생산성'을 이유로 생산직 노동자의 임금인상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부당해 보였다. 한국 서비스업의 노동 생산성은 제조업의 40% 수준으로, 절반도 못 되기 때문이다. 만일 노동생산성으로 임금을 결정하는 게 정당하다면, 서비스 산업 종사자들의 임금은 꽤 오래 동결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한국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을 안다. 간단하다. 우선 목표치를 언론이 '바닥'이라고 주장하는 한국 제조업 수준으로 정하자. 다시 말해 현재 40%의 생산성을 100%로 높이는 것이다.

만일 직원이 100명이라면, 60명을 해고하고 40명만 남긴다. (항의하는 직원이 있으면 '생산성 바닥인데 철밥통 웬 말이냐'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40명에게 100명분의 일을 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월급을 올리지 않는 것이다. 임금이 상승하면 노동생산성 수치가 낮아기기 때문이다.

이제 '생산성'이 얼마나 폭력적인 개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성이 낮다고 노동자가 놀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서비스업 노동자가 제조업 노동자보다 60%를 더 노는 게 아니듯 말이다. 설비 투자나 연구개발(R&D) 등의 자본투자가 낮을수록 생산성이 떨어진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의 생산성이 낮은 경향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같은 회사의 공장이라도 시설이 낙후하거나 자동화율이 낮을수록 생산성은 낮아진다. 예컨대 같은 현대자동차의 공장이라도 낡은 울산의 공장과 최근 지어진 앨라배마나 조지아 공장은 생산성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 기업들이 해외로 공장을 옮기는 '아웃소싱'을 당연시 하면서 국내 생산설비에 투자를 게을리하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노동자들이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가도 중요하다. 일 년에 40일 유급휴가를 즐기는 독일 노동자와, 열흘 쉬기도 어려운 한국 노동자에게 같은 노동의 질을 기대하는 것은 몰염치한 일일 것이다. 심지어 임금이나 노동의 질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환율에 따라 생산성은 제멋대로 오르내린다. 생산성의 판단 기준이 미화(달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산성을 이유로 욕을 먹는 것은 늘 노동자다.

3만불 시대, 큰 꿈을 꾸자

 소득 3만불 시대, 당신은 1억 연봉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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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수긍할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비정규직 처우와 관련한 문제가 그렇다. 나 역시 노조가 비정규직 차별 해소를 넘어 비정규직 철폐에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믿는다.

비정규직 처우 문제로 노조를 비난해 온 이들은 민주노총이 주최한 6·30 전국노동자대회를 두 손 들어 환영했으리라 믿는다. '비정규직 철폐 전국노동자대회'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8만여 명이 모인 이 집회의 핵심 요구는 비정규직 철폐와 최저임금 개악 폐기였기 때문이다. 만일 비정규직을 이유로 노조를 비난하던 사람이 이 집회까지 비난한다면 합리성이 결여된 '노조혐오'로밖에 볼 수 없다.

게다가 비정규직을 이유로 노조를 증오하는 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이다. 정규직을 양산해 온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용자와 정부 당국이기 때문이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을 제대로 지목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첫 단계라는 점에서, 무분별한 노조 때리기는 비정규직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마지막으로 '철밥통'을 대하는 세 번째 자세에 대해 알아보자. 세 번째 대안은 '내게도 안정된 일자리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도 '철밥통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연봉 9천만 원 생산직'에 분개하는 주된 이유는 그만큼 받지 못해서 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나도 그만큼, 혹은 그 이상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터이다. 그렇다면 남이 받는 연봉을 트집잡을 게 아니라, 나도 더 달라고 요구할 일이다. 

한국은 올해로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열었다. 인구 5천만 명이 넘는 나라로 이 소득을 달성한 나라는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등 모두 여섯 나라 뿐이다. 한 나라의 평균소득이 3만 불이라는 말은 3인 가족에게는 1억, 4인 가족에게는 1억 3천 이상의 연평균 가계소득을 보장할 역량이 있다는 것이다.

당신 가족은 이만큼 받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일한만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누가 부당하게 남의 몫을 가져갔다는 뜻이다. 이게 누구일까? '귀족노조'?

노조는 노동자 뿐 아니라 경제성장의 벗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인이 벌어들인 총소득(GNI)은 전년에 비해 3.1% 증가했다. 하지만 노동소득분배율은 도리어 0.3%P 하락해 2014년 이후 최저치를 보였다. 급여가 기업의 이익 증가 폭만큼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업이 더 줄 수 있으면서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합법적 절차를 통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일 수 없다. 다만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노동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이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노조가 없거나 와해된 90%의 사업체일 가능성이 크다. 

오바마는 대통령 재임기간 중, 제조업 육성을 강조하며 '좋은 일자리를 원한다면 노조에 가입하라'고 말하고 다녔다. 노조가 소득을 안정시켜 중산층을 두텁게할 뿐 아니라,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보수정당과 언론은 물론,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서도 노조를 경제성장의 적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성장 정체의 원인을 노조의 쇠퇴에서 찾는다. 다음 글에서 이유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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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와 <미디어기호학>을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살고자 합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사회를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