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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틀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침대 속으로 들어갔지만 선득하고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디를 가야 온기를 느낄 수 있을까. 나는 훈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을 가만히 그려보기 시작했다.

절로 우리 집의 구들방이 생각났다. 한 아름 군불을 넣으면 얼마 안 가 아랫목이 따뜻해져 왔고 종일 훈기가 감돌던 그 구들방.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우면 온갖 잡다한 일들이 저만치 물러나고 이내 잠이 솔솔 왔다.

베트남에서 추위를 타다니...

그러나 여기는 우리나라에서 천리만리 떨어진 베트남의 달랏이고, 구들방은 고사하고 전기담요도 하나 없다.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에는 전기담요라도 깔고 한숨 푹 자고 나면 온몸의 근육이 놀놀하게 풀릴 텐데 말이다. 갑자기 두고 온 것들이 그리워졌다.

배낭을 매고 떠난 베트남 두달살이 여행, 쓰레빠(슬리퍼)와 운동화 둘 다 필요한 생활여행이었다.
 배낭을 매고 떠난 베트남 두달살이 여행, 쓰레빠(슬리퍼)와 운동화 둘 다 필요한 생활여행이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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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였지만 베트남의 달랏은 우리나라의 봄이나 가을 같은 기후였다. 사방에 꽃이 피어 있었고 반소매 차림으로도 지낼 수 있어 따뜻한 남쪽나라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연신 들었다. 그러나 비가 오자 추웠다. 1500미터 고원지대에 위치한 달랏은 일 년 내내 봄 날씨 같아 지내기가 좋지만 비가 오면 선득선득하니 춥다. 동남아에서는 비를 맞고 저체온증으로 죽는 사람도 있다더니, 거짓말 같은 그 말이 참말이겠다 싶었다.

베트남의 '달랏'에 도착한 우리는 며칠 동안 호텔에 머물렀다. 달랏으로 떠나기 전에 두 달 동안 지낼 집을 알아보기는 했다. 그러나 그곳의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덜컥 집부터 구하는 것은 아니다 싶어서 일단은 호텔에서 지내기로 했다. 며칠간의 여행이라면 호텔에서 지내는 것도 괜찮겠지만 두 달씩이나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호숫가에 있는 호텔에서 며칠 지내며 달랏을 파악해 나갔다.

살림에서 벗어나니 삶이 단순해졌다

호텔 방에서 지내려니 갑갑했다. 마치 우리에 갇혀 있는 짐승처럼 우리는 하릴없이 방안을 서성였다. 강화도 우리 집은 각자의 공간을 허용했다. 사랑채는 남편의 공간이었고 안채는 나의 생활무대였다. 안마당과 바깥마당이라는 놀이터도 있었으니 우리는 흩어졌다가 또 뭉치기도 하면서 부딪힐 일 없이 잘 살았다. 그런데 여행을 오니 방 한 칸뿐이었다.

집안일을 하지 않으니 생활은 너무나도 단순했다. 할 것도 챙길 것도 별로 없었다. 이렇게 단순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 한국에서의 삶은 그렇지를 못했다. 인연과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해야 할 일도 많고 신경 써야 할 것들도 많다.

늘 봄 날씨 같았던 달랏도 비가 오자 추웠다.
 늘 봄 날씨 같았던 달랏도 비가 오자 추웠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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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하는 주부들은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한다. 가사노동이라 불리는 그 끝없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남이 해주는 밥이다'라는 말이 다 있을까. 그런데 밥은 고사하고 아예 살림을 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단순하고 간결하냐 말이다.

그래도 방 한 칸에서 지내는 것은 전혀 흥미롭지가 않았다. 간결하고 단순한 삶은 좋지만 방이 아닌 집에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살 집을 구하러 나갔다. 우리는 밥도 해먹을 수 있고 거실도 있는 집을 원했다. 잠깐 머물 여행자라면 잠잘 방만 있으면 되겠지만 우리처럼 장기 여행자는 잠자리 이외에도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방'이 아니라 '집'이었다.

'방'이 아니라 '집'에서 살고 싶었다

'방'과 '집'은 다르다. 사람이 지내기 위하여 집 안에 만들어 놓은 공간이 방이라면 집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보금자리이다. 우리는 집을 얻고 싶었다. 남편과 나, 이렇게 둘만 다니는 여행이지만 각각의 공간을 가지고 싶었다. 부부라고 해서 늘 같이 붙어 있어야 할까. 때로는 따로 행동하고 싶을 때도 있지 않던가. 그것이 낯선 여행지라고 해서 다를 것인가. 생활 습관이 다른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것을 하며 때로는 같이 또 때로는 따로따로 놀고 싶었다.

치앙마이나 우붓처럼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유명 여행지들은 한 달 살이 집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달랏은 아직 그렇지가 못했다. 일 년짜리 집은 있었지만 한 달만 빌려주는 집은 찾기가 어려웠다. 살기에 편리하면서도 안전하고 또 사생활이 보장되는 그런 집을 찾았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손을 꼭 잡고 인생길을 걸어온 중년의 부부, 이제는 쉬엄쉬엄 살아갈 여유 있는 나이.
 손을 꼭 잡고 인생길을 걸어온 중년의 부부, 이제는 쉬엄쉬엄 살아갈 여유 있는 나이.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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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간판이 있어 무작정 들어가 본 식당에서 집을 소개받았다. 우리처럼 한 달 살이 집을 찾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면서 몇 군데를 물색해 주었다. 식당 사장님이 소개해준 곳은 주방이 있어 음식도 해먹을 수 있는 레지던스 호텔이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지역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지만 번잡하지 않아 지내기에는 오히려 더 좋을 것 같았다.

'함께' 하지만 때로는 '따로' 지내기

방이 두 개나 되고 큼직한 거실에 주방 설비 역시 잘 갖춰져 있는 집이었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 보송보송하게 말린 옷을 입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모든 것보다 더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은 거실이었다. 책을 보고 글을 쓸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집이라면 이래야 된다.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밥을 해 먹고 빨래를 해서 깨끗한 옷을 입을 수 있어야 한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보며 저녁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집이고, 우리는 그런 곳에서 일상을 보내고 싶었다.

밥을 해먹고 깨끗하게 옷을 빨아입으며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곳은 어디나 다 집이다.(베트남에서 보름동안 살았던 집 주방)
 밥을 해먹고 깨끗하게 옷을 빨아입으며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곳은 어디나 다 집이다.(베트남에서 보름동안 살았던 집 주방)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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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황제처럼 살아보자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주거비가 생활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생겼다. 하룻밤에 3만 원이나 하니 물가가 싼 베트남에서는 비싼 축에 든다. 하지만 삶의 질을 따진다면 의식주 중에서 집이 제일 중요할 것 같다. 먹는 것은 대충 먹어도 괜찮지만 집은 그렇지 않다.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살기, 이제부터 시작

나는 집만은 괜찮은 곳을 구하고 싶었다. 괜히 돈 좀 아껴보겠다고 좋지 않은 집을 얻으면 사는 내내 불만족스러울지도 모른다. 쾌적한 곳에서 지내야 기분도 좋아지는 법이다. 특히 우리처럼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은 푹 자고 일어나야 기운이 솟는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보름치 방세를 지불했다.

집도 구했겠다, 이제 우리의 달랏살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벌을 찾아 떠난 따뜻한 남쪽나라 이야기는 이제부터 출발이다.

밥도 해먹고 잠도 자고 거실에서 이야기도 하며 살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었다.
 밥도 해먹고 잠도 자고 거실에서 이야기도 하며 살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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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베트남여행 , #베트남달랏, #달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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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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