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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 비 사흘째. 낮술과 함께 체 게바라의 삶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다. 아르헨티나 사람이면서 여행 중 부조리한 현실을 목도하고 결국 쿠바를 위한 혁명가로 분해 전 생을 바친. 그가 여행 중 어머니께 보낸 편지 일부가 가슴에 와닿는다.

'한 국가에 도착하면 박물관이나 유적지를 보고 여행만 즐길 것이 아니라 제가 언제나 관심을 갖고 있는 민중의 투쟁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남긴 편지 역시.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대로 충실하게 생각하고 행동한 사람이었다. 부디 훌륭한 혁명가로 성장하길 바란다... 무엇보다도 세계 어디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행해질 불의를 마음 속 깊이 깨달을 수 있길 바란다.'


나의 여행도, 나의 삶도 이러했으면 좋겠다. 전화 통화로 "사흘째 비가 온다" 하니 "다니지도 못하는데 취소하고 오라"는 어머니. 착잡함과 죄송스러움, 서운함, 체념...인 감정들에 불씨가 붙은 듯 마음이 화끈거렸다.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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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5일. 나흘 만에 나온 해가 반가워 근처 지미 오름으로. 내려오면 금세 선착장으로 갈 수 있을 만큼 바다와 가까워 여느 오름과 확연히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한 눈에, 지붕이 알록달록한 낮은 집들, 초록과 갈색, 황색과 노란색의 뚜렷한 논밭의 경계가 정성스레 이어 붙인 예쁜 누비 같다. 

여느 도시처럼 콘크리트 높은 건물이 빼곡히 채워지면 다시 못 볼 자연의 풍경. 제주 안에서도 이미 많은 곳들이 판에 박힌 도시화의 전처를 밟고 있다. 그런 곳은 이정표나 지명을 딴 간판이 아니면 제주인지 알 길이 없을 정도. 제주가 정말 가치 있고 멋질 때는 '제주다움'을 발견할 때. 부디 너무 늦기 전에 더 잃지 말고 잘 보존해주시길.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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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한 달 사는 집 주인의 반려견 코코와의 산책. 이 녀석과도 제법 친해졌다. 처음엔 가까이 가기가 무섭게 날뛰고 옷을 물면 안 놓는 개구쟁이 아기개였는데. 그새 머리 하나 만큼 자라선 요즘은 부쩍 의젓해 보인다.

이 동네 일대엔 무밭이 참 많다. 그런데 지난 번 북촌리를 다녀온 뒤부터 무가 그저 무로만 보이지 않는다. 너븐숭이4.3유적지에서 제주 4.3사건 당시 막무가내로 죽임 당한 사람들의 시신을 두고 다음과 같이 묘사한 글을 읽고서부터다.

'마치 무를 뽑아 널어 놓은 것 같이 널브러져 있었다.'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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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강호와 바닷가 산책. 갑작스런 낯선 이의 출현에 강호가 놀라지 않게 최대한 한적한 모래밭에 자리를 잡았다. 항상 만약의 상황을 대비, 강호에게 줄을 연결해 놀게 하고 나는 며칠째 흥미롭게 읽고 있는 소설책을 펼쳤다. 그런데 강호가 생각보다 깊은 바위 틈새로 들어가 그거 신경쓰랴, 또 우리에게 관심을 표하는 행인들 때문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돌아와 방 안에서 조촐한 파티. 강호에겐 캔생선을, 나는 치킨 반 마리에 맥주. 숙소 규정에 어긋나지만 오늘만은 누구와도 섞이지 않고 우리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주인에겐 미안하지만 몰래 마시는 술이 쾌감을 더했다.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첫 번째 제주. 이제 이틀 남았다.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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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 인터넷 생중계와 라디오 방송, 숙소 카페동의 텔레비전 다채널로 남북정상회담 순간을 지켜봤다. 막상 보고 있으니 소름이 돋을 만큼 흥분되고 또 한편으론 뿌듯하고 신기했다. 전쟁의 기억과 3.8선 너머에 그리운 이들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심정일지. 이 시작점에 머물거나 퇴보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면 좋겠다. 그래서 가고 싶은 땅, 만나고 싶은 누구라도 다 볼 수 있길 기도한다.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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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제주를 떠나기 전 마지막 하루. 우도를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선다. (계속)

덧붙이는 글 | 두 다리뿐인 강호가 좀 더 오래, 편히 걸을 수 있게 휠체어를, 여행하며 만나는 '1미터 지옥'에 묶인 동물들에겐 좀 더 길고 안전한 몸줄을, 밥이 필요하면 밥을, 약이 필요하면 약을 선물하고자 합니다. '원고료' 또는 직접 후원으로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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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제주 한달살기, #고양이 여행, #남북정상회담, #세화해수욕장, #지미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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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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