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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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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7일 '관부재판'(關釜裁判)을 소재로 한 영화 <허스토리>(HERSTORY)가 개봉한 가운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건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관부재판'이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등 10명이 일본정부를 피고로 1992년 12월 25일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부에 제소한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일명 '시모노세키 재판'이라고도 부른다. 공식 명칭은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소송'.

원고는 모두 10명(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명,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으로, 모두 3차에 걸쳐 소송에 참여했다. 1차로 1992년 12월 25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두리, 하순녀 할머니와 여자근로정신대 동원됐던 박소득, 유찬이 할머니 등 피해자 등 4명 시모노세키 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1년 뒤인 1993년 12월 13일에는 2차로 일본군 '위안부' 이순덕 할머니와 도쿄 아사이토(麻絲) 방적에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이영선, 강용주, 정수련 할머니, 도야마 후지코시(不二越) 회사에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박순복 할머니 등 5명이 소송에 합류했다.

이어 다음해인 1994년 3월 14일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양금덕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소송에 합류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가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에 나선 것은, 무엇보다 두 사건 모두 전시 여성에 가해진 반인륜 범죄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주목받는 이유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수많은 손해배상 소송 중, 최초로 1심에서나마 일부 승소판결을 얻어 냈다는 데 있다.

 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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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에서는 영화 <허스토리>에서 온갖 어려움을 뚫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소송에 이끌었던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이사장의 헌신적 활동 등을 근거로, 관부재판을 일본 정부와 당당히 맞선 부산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관부재판은 광주전남과도 매우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하순녀·이순덕 할머니 광주전남에 깊은 연고

우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명 중, 하순녀, 이순덕 할머니 2명은 광주전남과 깊은 연고를 갖고 있다. 피해자 하순녀(河順女, 1920~2000) 할머니는 진주에서 태어났으나 곧 목포로 이사했고, 그 뒤 아버지가 몸이 아파 친척들이 사는 영암으로 다시 이사해, 어린 시절을 줄곧 영암에서 생활했다.

어려운 집안 살림에 학비 낼 형편도 못 돼 입학을 미루다가 12세에 보통학교 입학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입학한 관계로 종종 주위로부터 놀림을 받다 보니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어느 날 무작정 광주로 나와 오랫동안 남의 집살이를 하게 됐다.

21세 무렵, 돈 벌 생각으로 양복을 입은 조선인 남자, 일본인 남자 말만 믿고 따라 나섰다가, 상해 군부대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시모노세키 소송 중인 2000년 5월 별세했다.

피해자 이순덕(李順德, 1918~2017) 할머니는 전북 익산이 고향으로, 19살이던 1937년께 끌려가 상해 인근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해방 후 구사일생으로 고향에 찾아왔으나, 부모님은 화병에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나중에 17살이나 많은 김제 출신 남자의 후처로 새로 가정을 꾸렸으나, 8년여 뒤 남편을 병으로 사별하고 말았다. 그 뒤 두 번째로 광주 출신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뤘지만 종내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병원을 찾아가서야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알았다.

할머니는 두 번째 남편과도 사별한 뒤, 광주시 서구 쌍촌동에서 오랫동안 혼자 지내왔다. 그러다 1992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회장 이금주, 아래 광주유족회)에 문을 두드렸고, 이금주 회장의 주선으로 2차로 관부재판에 합류했다. 지난해 4월 100세를 일기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이 유족회 사무실로 쓰고 있는 집 현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이 유족회 사무실로 쓰고 있는 집 현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국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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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이 관부재판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 12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 할머니, 1994년 3월 근로정신대 양금덕 할머니를 원고로 합류시키면서부터다.

사실 광주유족회는 관부재판 이전인 1992년 2월 17일 도쿄지방재판소에 군인·군속·노무자 등이 참여한 '천인소송'(원고 1273명)을 제기한 뒤, 이어 8월 24일 교토지방재판소에 '우키시마 마루호 폭침사건'(원고 81명) 소송을 제기하는 등 일본정부를 상대로 이미 본격적인 싸움에 뛰어 들었다.

일명 '천인소송'은 소송에 참여한 원고들이 1000명이 넘는다고 해서 불린 이름으로, 1992년 2월 17일 1차 원고 1089명, 1993년 6월 30일 2차 원고 184명 등 원고만 총 1273명에 이르는 집단 소송이다. 이는 당시까지 일본 사법사상 일본정부를 피고로 제기된 최대의 집단 소송으로 알려졌다.

이금주 회장 일기에 남겨진 그날의 기록들...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이 남긴 일기에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지금까지 펼쳐 온 명예회복 투쟁 30년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중에는 <허스토리>에서 다룬 관부재판 그날의 역사 현장도 포함돼 있다.

 1994년 3월 14일 관부재판 첫번째 당사자 본인 신문을 위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법원으로 향하는 원고들. 왼쪽부터 양금덕 할머니, 고 이순덕할머니,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
 1994년 3월 14일 관부재판 첫번째 당사자 본인 신문을 위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법원으로 향하는 원고들. 왼쪽부터 양금덕 할머니, 고 이순덕할머니,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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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주 회장은 2차 원고 이순덕 할머니와 3차 원고 양금덕 할머니가 시모노세키 지방재판소에 소장을 접수할 때, 현수막을 함께 펼치며 원고들과 함께했다. 이후 재판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원고들에 대한 심문이 있을 때에도 같이 동행해, 그날의 기억을 짧게나마 일기에 남겼다.

특히, 1994년 9월 4일 민간기금을 통해 지원하겠다고 발언한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과 관련해 변호단 및 일본 소송 지원단체, 원고들이 함께 항의집회와 거리행진을 펼친 그날의 모습도 일기에 남겼다.

이날 집회에서는 ▲ 무라야마 총리 망언 취소 ▲ 태평양전쟁피해자들에 대한 전원 개인배상을 강하게 촉구했는데, 특히 이날 일기에는 이순덕 할머니가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 장면이 눈길을 끈다.

 관부재판 소송 원고들의 기자회견 모습
 관부재판 소송 원고들의 기자회견 모습
ⓒ 영화 '허스토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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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은 이날 집회에서 무라야마 총리가 밝힌 민간기금을 통한 해결 방식에 대해 이순덕 할머니의 입장을 물었는데, 평소 말수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던 할머니가 일본 기자들 앞에서 단호한 입장을 밝혔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일본인 기자 25명과 기자회견. 이순덕 할머니는 '나는 거지가 아니다. 이 집 저 집 모아서 주는 돈 안 받겠다'고 완강히 주장."(1994년 9월 4일)

특히 이날은 이순덕 할머니의 본인심문이 있었던 날이기도 한데, 일기에는 힘들게 법정심문을 마친 그날의 긴장감과 안도감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시모노세키 지방재판소에서 이순덕 본인 심문. 몹시 긴장상태로 나(이금주)와 순덕이는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떨었으나, 기도로서 잘 극복하여 제법 상상 외로 잘 됐다고 생각."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된 영화 <허스토리>에서 그려진 주요 장면도 일기 곳곳에 등장한다.

▲ 소송 변호단과 일본 지원단체 의뢰로 원고 할머니들이 병원에서 종합 진찰을 하는 장면(1995년 4월 13일, 2000년 1월 18일) ▲ 민간모금을 통해 해결 방법을 찾겠다는 발언에 항의해 일본대사관 앞에서 의 무라야마 총리 화형식을 갖는 장면(1995년 10월 30일), 특히 ▲한국에서 교사로 재직 당시에 제자를 후지코시로 보낸 일본인 교사가 법정에 나와 증언하는 장면(1997년 5월 30일) 등... 이제는 빛바랜 글씨체이지만 일기 곳곳에는 관부재판 과정에서 있었던 귀중한 역사적 장면들이 깨알 같은 메모로 남겨져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98년 4월 27일 일본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재판부는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고, 피해자에게 각 30만 엔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대신 '여자근로정신대'에 대해서는 기각 판결했다.

 관부재판 원고 승소 소식을 다룬 일본 신문 보도
 관부재판 원고 승소 소식을 다룬 일본 신문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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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1심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1998년 5월 8일 히로시마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1심에서 기각을 당한 근로정신대 원고들도 즉각 항소했다. 이후 1999년 2월 23일부터 2000년 12월 18일 결심까지 총 아홉 차례의 구두 변론이 진행됐다.

원고 하순녀 할머니는 소송 도중인 2000년 5월 끝내 한을 풀지 못한 채 사망하고 말았다. 이금주 회장은 이순덕 할머니의 관부재판 항소심 본인 심문에 동행했다가, 히로시마에서 비보를 전해 듣고 이렇게 심경을 밝혔다.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이 관부재판 도중 별세한 하순녀 할머니 소식을 듣고 남긴 추모의 글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이 관부재판 도중 별세한 하순녀 할머니 소식을 듣고 남긴 추모의 글
ⓒ 이국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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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을 풀지 못한 채 가신 하순녀님 고이 잠드소서.

조오련 수영 선수가 헤엄쳐 건너갔던 현해탄 그 역사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국과 일본은 수세기 동안 원한과 은원의 세월을 울어야 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울고 있습니다.

400여 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야망을 싣고 왔던 그 임진년
침략의 뱃길에서 끌려갔던 도공들의 피와 눈물이 흘렀고,

태평양 침략전쟁에 종군위안부로 끌려갈 때
그 통곡의 파도는 드높이 울었습니다.

순정을 빼앗기고 치욕의 상처투성이로 얼룩진 한을 풀고자 넘나들던 현해탄
종내 풀지 못한 채 떠나신 당신이여
당신들의 억울함 민족의 억울함은
하늘이 보고 신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영세에서 만날 그날 그때까지 고이고이 잠드소서.

2000년 5월 19일 히로시마에서
광주천인소송단.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2001년 3월 29일 히로시마 고등법원은 1심 판결을 뒤엎고 일본군 '위안부' 원고에 대해 역전 패소, '여자근로정신대' 원고에 대해 전면 기각 판결을 냈다. 피해자들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에 격하게 반발했다.

"1분 만에 기각 판결 내리고 도망치듯 사라져..."

이금주 회장은 그날의 참담하고 울분에 찬 법정 안팎 상황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담았다.

"1분 만에 기각 판결 내리고 재판장 도망치듯 사라짐. 원고들 '재판장, 당신 딸이 우리 같은 지경에 처했다면 아비로써 어떤 심정이겠냐'고 고함을 지르면서 재판소 복도와 밖에서 두 차례 집회소란. 결국 10년 가까이 협조해 준 지원단들과 논의 결과, 상고 준비하기로 하고 귀국."

 관부재판 1심 승소 소식을 보도한 아사히신문. 신문 속 사진은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할머니의 모습.
 관부재판 1심 승소 소식을 보도한 아사히신문. 신문 속 사진은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할머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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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부재판 1심 판결에서 근로정신대 사건이 기각되자 판결에 비통해 하는 아사히신문 보도 속의 양금덕 할머니 모습.
 관부재판 1심 판결에서 근로정신대 사건이 기각되자 판결에 비통해 하는 아사히신문 보도 속의 양금덕 할머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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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재판은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에 이어, 2003년 3월 25일 일본 최고재판소에서도 최종 패소함으로써, 11년에 걸친 법정투쟁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원고들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한 명, 두 명 생을 달리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명 중에서는 2000년 하순녀 할머니에 이어, 2006년 박두리 할머니가 83세를 일기로 별세했고, 2017년 4월에는 이순덕 할머니가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또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 중에서는 올해 1월 박순복 할머니, 2월 유찬이 할머니가 잇따라 별세하셨고, 현재 관부재판에 참여한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중 생존자는 미쓰비시중공업으로 동원된 양금덕 할머니, 도쿄 아사이토 방적공장으로 동원된 이영선 할머니 등 2명으로 알려졌다.    

'관부재판'의 대일 과거청산 불씨, 다시 한국 소송으로...

한편,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관부재판 패소에 이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다시 소송을 제기했고, 이에 실패하자 2012년부터 한국에서 다시 법정투쟁을 이어갔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동원된 양금덕 할머니는 관부재판 1심 패소 뒤인 1999년 3월 피해자 및 유족 8명과 함께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또 한 번의 소송에 나섰다.

도야마 후지코시 회사에 동원된 관부재판 원고 3명(박소득, 유찬이, 박순복)도 최고재판소 패소 직후인 2003년 4월 1일 도야마 지방재판소에 후지코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미쓰비시중공업 소송은 2008년 11월, 후지코시 소송은 2011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각각 최종 패소함으로서, 일본 소송은 연거푸 좌절을 겪었다.

이후 2012년 5월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동원 소송과 관련해 배상의 길이 열리게 되자, 이번에는 한국 사법부를 통한 권리회복 투쟁에 나섰다.

2012년 10월 24일 양금덕 할머니 등 일본 소송에 참여한 원고 5명이 광주지방법원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이 사건은 2013년 11월 광주지방법원 승소, 2015년 6월 광주고등법원 승소에 이어, 현재 대법원의 마지막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양금덕 할머니, 세 번의 소송에 24년째 법정투쟁 중

일본 소송에서 거듭 패소한 후지코시 동원 근로정신대 유찬이, 박순복 할머니도 2013년 2월 동료 피해자들과 함께 서울중앙지법에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14년 10월 30일 마침내 승소해 현재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승소의 기쁨도 누릴 새도 없이, 박순복 할머니가 올해 1월, 유찬이 할머니가 올해 2월 잇따라 별세해, 관부재판에서부터 시작한 길고 긴 법정투쟁은 최종 승소 소식을 듣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관부재판 원고로 참여해, 현재까지 법정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피해자는 이제 양금덕 할머니뿐이다. 개인으로서는 1994년 관부재판, 1999년 나고야 소송에 이은 세 번째 소송에 장장 24년째다.

관부재판에서 시작된 대일 명예회복 투쟁의 불씨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2013년 11월 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승소 소식을 듣고 감격에 겨워 환호하는 이금주 광주유족회 회장과 양금덕 할머니 모습.
 2013년 11월 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승소 소식을 듣고 감격에 겨워 환호하는 이금주 광주유족회 회장과 양금덕 할머니 모습.
ⓒ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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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어머니' 불렀더니 화병에 돌아가셨다고..." 이순덕(李順德)


1918년 전북 이리(현 익산의 옛 이름) 모현 출생. 평생 고단한 삶이었다. 어릴 적 기억이라고는 단칸방 초가집 한 채에 소작지 하나 없는 가난한 살림뿐. 남의 집 삯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시절, 감히 학교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19살 때인 1937년 경 연행. 상해 근처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 

"저녁이라도 준비한다고 혼자 논두렁에서 쑥을 캐고 있는데, 30, 40대가량 보이는 남자가 오더니 이런 고생하지 말고 배불리 먹을 것도 주고 좋은 신발도 주는 곳을 알아봐 준다고 자기만 따라오라는 거야. 철길을 따라 가던 중 문득 어머니라도 뵙고 가아겠다고 생각해 말 했더니, 여기까지 왔는데 안 된다는 거야. 그러더니 덥석 손목을 틀어잡더라고."

"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어. 한번은 어떤 놈이 술을 처먹고 와서 갑자기 같이 있던 어떤 친구의 목을 내리쳐 버렸어. 그 자리에서 목이 떨어져 나가더라고. 피가 얼마나 솟구치던지, 아휴~ 끔찍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지. 말도 못해 그 놈들."

"친구들을 전혀 만날 수 없었지. 군인들이 항상 문 밖에서 지키고 있었으니까. 우리들끼리 만나면 어디 도망가자고 모의할까봐, 식당에서 만나도 얘기도 못 붙이게 했어. 얘기 하다 걸리면 맞아 죽다시피 했지. 가막소도 그런 가막소가 없었어."

"처음에는 일본 말을 못한다고 맞기도 많이 맞았다. 1년쯤 지나자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해방 한 두 달 전 어느 날, 한 장교가 들어오더니 '왜 자기 이외에 딴 남자랑 잤느냐'며 군화발로 배를 걷어찼다. 그리고 갑자기 긴 칼을 꺼내더니 등을 그대로 내리쳤다. 그 자리에서 졸도해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바닥이 흥건하게 피에 젖어 있었다."

"해방이 됐어도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사람도 있었어. 내가 같이 가자고 해도 자기는 도저히 못 일어나겠다는 거야. 나보고 먼저 가라고 하더라고. 참 불쌍한 사람이었는데."

"집 문 앞에 들어서면서 '어머니' 하고 불렀더니, 어머니는 안 보이고 이모가 뛰어 나오더라고. 내가 없어진 후 찾아 헤매다 화병에 부모님 모두 다 돌아가셨다는 거야. '너 때문에 죽었다'고 그러더라고."

* 이국언  <빼앗긴 청춘 돌아오지 않는 원혼>, 시민의소리, 2007.


[증언] "죽어도 이 짓은 못하겠어" 하순녀(河順女)


1920년 진주에서 태어났으나 곧 목포로 이사. 그 뒤 아버지가 몸이 아파 친척들이 사는 영암으로 다시 이사해, 어린 시절을 보냄. 집안 살림은 어려웠음.

학비 낼 형편도 못 돼 입학을 미루다가 12세에 보통학교 입학. 늦은 나이에 입학해 놀림을 받다 보니 학교에 가기 싫어 집을 나와 버림. 무작정 광주로 나와 오랫동안 남의 집 살이를 하다, 21살 무렵 연행. 상해 군부대에서 위안부 생활.

"나하고 같이 간 처녀들이 8명이었다. 광주 아이도 있고, 장성 아이도 있었다. 나는 소매가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봄으로 기억한다. 광주에서 오후 2시경 그 남자들을 따라 기차로 여수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일본 가는 배를 탔다. 다음 날 오전 11시경 오사카에 내려 일본인 남자의 집으로 갔다. 다시 상해로 간다고 했다.

왜 오사카에 온다더니 상해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일본인 남자는 자기가 상해에서 큰 장사를 시작하는데, 거기 가서 심부름을 하면 된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 집에서 하루 밤을 자고 난 다음날 배를 타고 상해로 갔다."

"그 집은 부대 바로 옆에 있었다. 우리를 데리고 간 남자가 그 집 주인이었다. 같이 온 8명의 여자들은 전부 뿔뿔이 흩어졌다. 나만 그 집에 있게 되었다. 그 집에 도착한 뒤 주인이 여자들을 계속 데리고 와서 30명 정도가 되었다."

"그 집 입구에 간판이 있었는데 글자를 잘 몰라서 읽지 못했다. 그 집은 상해의 복판에 있었고, 그 일대가 블란서 조계라고 들었다. 거기에는 일본군 부대가 여러 개 있었고, 여자 장사를 하는 집도 많았다."

"처음 보름 동안은 하루에 군인이 하나둘씩 들어왔는데, 나중에는 무리로 달려들어 '아이고 죽으면 죽었지 이 짓은 못 하겠다'고 주인에게 말했다. 군인들에게 술을 팔기도 했는데, 술을 마신 군인들은 더 못살게 굴었다." 

"일본이 패망하자 주인이 먼저 도망가서 돈은 하나도 못 받았다. 집에서 밥하던 중국사람 집에 가서 한 동안 얻어먹고 살았다. 포항여자, 광주여자 등 여자 5명이 함께 있었는데, 그 주국 사람이 조선에 가는 배가 들어왔다고 알려줘서 배를 타러 나갔다. 돈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중국 사람이 따라와서 뱃사람에게 말을 잘 해줘서 제일 마지막 배를 타고 나왔다."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이었다. 부산에 내려서 영암의 집으로 찾아갔다. 아버지는 상해에서 온 내 편지를 받고 홧병으로 돌아가셨고, 14살 먹은 여동생이 언니 왔다고 좋아했다."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집Ⅰ, 한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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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상임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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