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뮤지컬 <해밀턴> 스틸 컷.

뮤지컬 <해밀턴> 스틸 컷. ⓒ HAMILTON WEST END


아마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미국 3대 부통령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살 당한 재무장관쯤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기껏 해봐야 10달러 지폐에 얼굴이 그려진 미국인 중 대통령이 아니었던 사람 정도 아닐까. 미국의 독립 운동이라고 하면 먼 나라 한국에서는 기껏 해야 워싱턴 정도가 곧바로 튀어나올 이름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겐 낯선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의 생애가, 저 먼 나라 미국에서는 뮤지컬로 제작 되었고 그 뮤지컬은 대단한 흥행 성적을 보이며 무려 '미국 독립'을 소재로 하면서 영국에서의 공연까지 시작했고 연일 매진을 이뤄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그의 삶을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의 오프닝 곡의 가사를 조금 차용해 설명해본다. 그는 사생아였고 고아였으며, 캐리비언 버려진 섬에 떨어져 성장했지만 미국의 영웅이 됐고 유명한 학자가 됐다.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10달러의 아버지가 됐고, 온 생애를 걸쳐 열심히 일했다. 다시 한 번, 그래서 그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뮤지컬로 다시 제작되며 자신의 이름을 더 드높이고 있을 그의 이름, 그는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삶을 토대로 한 뮤지컬 <해밀턴>은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를 거쳐 대단한 흥행 성적을 보이고 있다.

미국 발 '국뽕' 뮤지컬, 그 의의와 한계

 뮤지컬 <해밀턴> 스틸 컷.

뮤지컬 <해밀턴> 스틸 컷. ⓒ HAMILTON WEST END


해밀턴을 묘사하는 방법과 미국을 묘사하는 방법, 이 둘은 극의 전체적인 흐름에 있어서 함께 주목해볼 만 하다. 우선 긍정적인 부분부터 말하자면 이 극은 흔한 역사 속 인물을 소재로 하여 만드는 서사들의 실수를 완전히 답습하지는 않았다. 역사 속 인물, 특히 그 인물이 건국 초기나 전성기 때의 인물일 경우 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위인전' 식 서사는 흔했다. 그리고 결말은 위대한 인물이 만들어낸 위대한 '우리 나라', '우리 민족' 식의 것이었다. 해밀턴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현재 미국 내에서는 초기 미국을 보여주며 자신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법에 대해 제시한다는 평을 받는다.

알렉산더 해밀턴이라는 실존 인물이 저지른 실수들을 그대로 부각시키는 데서 어느 정도 그 방법이 유추된다. 보통 역사 속 실재했던 인물의 삶을 그대로 작품을 만들 경우 흔히 일어나는 실수는 그들을 영웅화 시키다 못해 신격화 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삶에서 숭고해보이는 요소, 위기라 할지라도 극복되어 그들의 업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는 것들만을 가져온다. 이 흔한 실수에서 흔히 벗어난 <해밀턴>은 그 자신으로서 의의를 보이는 데서 나아가, 앞으로 등장할 극들에 나름의 교훈을 주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브로드웨이의 흐름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봤을 때 아메리칸 드림의 허구를 비판하던 작품들이 올라오던 브로드웨이에 '건국의 아버지'의 이야기가 올라온다는 것은 기묘하다. 미국에선 이 극이 흥행할 이유가 명확했다. 물론 새로운 형식, 훌륭한 음악이 뒷받쳐주기는 했지만 역시 '건국의 아버지' 이야기라는 점이다.

"해밀턴이 누구야?" "미국 건국의 아버지. 미국 지폐에도 실린 인물이야." 이런 대화가 오가면, 우선 <해밀턴>이 흔한 미국식 '국뽕' 서사가 아니냐는 질문이 뒤따른다. 이는 합당한 물음이다. 미국발 '국뽕'이 얼마나 심한지,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예찬은 익히 알려져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 해밀턴의 대표 넘버 'My shot'의 가사를 살펴본다. "나는 단지 내 나라처럼 어리고 산만하고 굶주렸어(I'm just like my country, I'm young, scrappy and hungry)." 해밀턴의 특색이기도 하지만, 직유를 통해서 미국 자체의 특색이 되기도 한다. 이는 흔히 미국인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지는 미국 그 자체다. 하지만 미국은 더 이상 굶주린 국가가 아니다.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어린' 국가는 맞다치자, 그러나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패권 1위의 국가다. 그런 미국에서 이토록 흥행을 일으킨 작품에서 "우리나라는 굶주렸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미국식 국뽕 그 자체다.

미국 국뽕은 한국 국뽕과 조금 다른 전개를 보인다. 애초에 스스로 부여하고 싶은 이미지, 그 환상의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 이 속에서 미국이 스스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는, 전형적인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예찬이고 미국발 국뽕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수많은 영화 드라마에서 이미 봤던, 굶주리고 가난한 '젊은' 사람이 (서구 국가 치고는 유럽 나라에 비해 그 '서양식' 역사가 짧은 미국이 가지는 컴플렉스에 대한 극복인가보다) 미국에 가서 혹은 미국에서 성공을 한다. 이 성공은 미국 본토, 미국의 정신이라는 상징적 맥락에서 이뤄지며 동시에 그들의 성공은 일종의 미국의 성공과 평행선을 이룬다. 동시에 위대한 그들은 위대한 미국과 상응하는 구조다.

더 나아가 미국 내에서도 비판을 받는 해밀턴 내 뉴욕에 대한 묘사를 본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The greatest city in the world)"라고 해밀턴은 예찬한다. 물론 극 내에서 뉴욕에 대한 가사는 그 당시 뉴욕이 독립 운동에 대한 열망이 한참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하지만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현재의 관객들이다. 자본주의 그 자체의 상징이 된 뉴욕, 그 뉴욕에 대한 "가장 위대한 도시"라는 수식어. 마찬가지로 미국식 국뽕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 캐릭터, 안젤리카

 뮤지컬 <해밀턴> 스틸 컷.

뮤지컬 <해밀턴> 스틸 컷. ⓒ HAMILTON WEST END


남성 인물의 서사를 중심으로 한 <해밀턴>에 안젤리카 같은 인물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안젤리카는 당시 미국 독립에 앞서 미국인들의 인식적 변화를 촉구한 토마스 페인의 저서 '커먼 센스'를 읽고 그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을 정확히 안다. 자신이 아주 강건하거나, 미쳤다고 생각한다고 말이다. 그녀는 미국의 독립에 관심이 있지만 동시에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의 향상을 바란다.(너는 혁명을 원하니? 나는 폭로를 원해 You want a revolution? I want a revelation),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의 선언을 인용하며, 'Men'에 'Women'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녀는 역사가 이뤄지고 있는 맨하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에, 그 혁명에 대해 스스로의 살아있음을 느낀다. 혁명의 순간에서 생동감을 느끼는 여성, 우리가 자주 접하지 못했던 인물이다.

또한 능력은 있지만 현재로는 가난하고 가문도 없는 해밀턴을 상류 사회로 진입 시켜준 것도 안젤리카의 공이 컸다. 무도회에서 다가온 해밀턴의 총명한 두 눈을 기억하고 반하면서도, 그를 귀엽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고작 2~3분에 가까운 대화였지만, 자신의 레벨에 맞는 사람은 처음이었고 그러기에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안젤리카는 자신의 동생에게 해밀턴을 양보한다. 보통 여성 인물들의 사랑은 다른 여성을 질투하는 식으로 폄하되거나, '남성'의 행복을 위해 양보하는 성녀의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허나 안젤리카는 다르다. 안젤리카가 해밀턴을 양보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동생의 행복 때문이다. 이는 그녀의 노래 'satisfied'에서 서술된다.

더 나아가 "항상 너의 편 (always by your side)"이라고 노래하는 안젤리카의 모습도 인상 깊다. 그녀의 해밀턴에 대한 사랑은 동생에 대한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 해밀턴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해밀턴이 아닌 동생을 보러 왔다고 선언하는 장면에서 이는 부각된다. 그들의 자매애는 기존의 서사에서 흔히 보지 못했던 양상이다. 더 나아가, 안젤리카가 해밀턴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엘라이자에게 넘겨주는 것은 미국의 '통합'과 '혁명'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미국의 독립은 어찌 됐을지 모른다, 해밀턴이 있기 위해 엘라이자의 공이 컸다.'라는 감상과 상상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엘라이자의 이야기, 그러나 엘라이자는 없다

물론 해밀턴의 아내 엘라이자의 존재감도 나쁘지는 않았다. 엘라이자는 남성 주인공의 아내 캐릭터 류 치고는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인간으로 더 느껴질 수 있었다. 이는 엘라이자가 해밀턴의 스캔들을 보고 반응하는 방식 덕분이었다. 해밀턴의 스캔들을 보고 엘라이자는 참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들을 지우고, 해밀턴의 '내러티브'에서 자신을 스스로 지우기를 선언한다. 그렇게 둘은 거진 결별하여 살다, 해밀턴의 아들이 죽었을 때를 기점으로 관계를 지속하기는 한다. 그리고 해밀턴이 죽은 뒤, 엘라이자는 마지막 엔딩 넘버 'who lives, who dies, who tells your story'에서 자신 스스로 이야기에 개입되기로 했다 노래한다.

해당 곡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결국 하나의 뮤지컬로 만들어질 정도로 신격화 된 한 인간(해밀턴)의 삶이 결국은 다른 인간에 의해 기록됐기에 전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엘라이자는 말한다. 자신이 50년을 더 살았고, 함께 싸웠던 군인들을 모두 인터뷰 했으며, 그 후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한다. 해밀턴의 인생은, 엘라이자가 존재했기에 있었다. 약 3시간 동안 진행된, 철저히 해밀턴 중심적인 서사는 이렇게 바뀐다. 엘라이자는 질문한다. "그들이 나의 이야기를 전할까?" 라고. 우리는 안다. 엘라이자의 인생은 전해지지 않았다고.

이는 일차적으로 남성 중심적 역사에 대해 씁쓸함을 가져다준다. 해밀턴이라는 남성 정치인이 영웅이 되어가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해밀턴의 인생과 비교하여 엘라이자의 인생은 전혀 전수되지 않았다. 그녀가 고아원을 설립했던, 뭘 했던 말이다. 이 때 안젤리카의 질문과 함께 앙상블이 함께 던지는 질문 "누가 살고, 누가 죽고, 누가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는가?"는 어울러져 객석의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그리하여 <해밀턴>이라는 극이 엘라이자의 인생은 과연 기록 되었는가, 하고 관객들에게 질문의 기회를 던진 것은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고 칭찬하기에 <해밀턴>은, 그 스스로도 엘라이자를 기록하지 않는 수많은 남성 중심적 서사의 일부라는 점에서 한계를 마주한다.

그 누가 엘라이자의 인생을 우리에게 말해줬는가, 만약 그녀의 인생이 해밀턴이라는 (불륜을 행했던, 그다지 좋지 못한 남편으로서의) 남성으로 이야기 될 수 있는 것인가. 엘라이자의 인생은 무엇이었는가.

단순히 엘라이자의 인생뿐 아니다. <해밀턴>은 백인 중심의 미국사를 비백인 배우들의 무대로 재구성 하면서 역사적 인식에 새로운 반향을 더한 극이었다. 그렇다면 왜 비-남성 배우들이 정치인을 연기하는 것은 안 되는가. 여전히 알렉산더 해밀턴은, 애런 버는, 조지 워싱턴은, 라파예트는, 그 외의 수많은 인물들은 죄다 남성 배우들이 연기하는데 말이다. 한편으론 인종 차별보다 성 차별이 더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현실적 좌절이 남는다.

극 중의 여성 인물들을 다시 돌이켜보면, 물론 안젤리카는 굉장히 멋진 활약을 보여줬고 극 중 중요한 전개를 이끌어 내긴 했지만 다른 남성 인물들에 비해서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준다. 스카일러 자매의 막내 페기는 뭘 하는지도 모르겠고,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마리아 레이놀드는 스캔들이라는 해밀턴의 정치적 '실수'를 보여주기 위한 인물에 불과하다. 푸른 색 옷을 주로 입고 나타나는 엘라이자와 대조되어 레드 드레스와 짙은 레드 립스틱을 바른 그녀는 함께 보았을 때 각각 성녀/창녀 이분법으로 나뉘는 것이 아닌가 의혹이 든다. 아무리 남성 주인공의 서사라지만 안타깝다.

한국의 관객으로서


 뮤지컬 <해밀턴> 스틸 컷.

뮤지컬 <해밀턴> 스틸 컷. ⓒ HAMILTON WEST END


무엇보다 한국의 관객으로서 <해밀턴>이 묘하게 와닿지 않는 것은 해밀턴 삶과 미국 건국 초기에 대한 무지 때문일 것이다. 미국이 어떻게 독립했는지 개괄적인 흐름은 알아도, 자국민만큼 잘 알지는 못했고 해밀턴이라는 인물은 이 극을 보기 위해 조금 조사한 것이 전부였다. 문화적인 코드 차이에서 만들어지는 갭이다. 역으로 한국에서 만든 세종대왕의 인생과 업적 전체에 대한 뮤지컬을 미국인들이 보면 갸우뚱 하는 것과 비슷하다. 영국 무대에 진출이 가능했고, 영미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은 영미권 자체에 공유되는 코드가 많을 뿐 아니라, 영국사와 겹쳐지는 부분이 상당하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이건 미국의, 미국을 위한, 미국에 대한 이야기다. 백인 남성으로 표상되는. '미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시한다는 극찬을 받지만 그것이 와닿지는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밀턴>이 가져온 이 센세이셔널은 한편으로 부럽다가도 이런 작품이 한국에서 나온다면 더 나은 버전으로 나오길 바란다는 갈증을 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해밀턴>이 보여준 태도, '그들이 이렇게 위대 했으니 우리도 그 위대함을 현재에 적용하자'는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 최고 우리 나라'보다는 나은, 우리가 현대 시대에 과거에 대해 배워야 하는 이유와도 맞물린다. 과거를 통하여 현재를 재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 그리고 미래를 준비할 것. 이는 앞으로 한국 창작 뮤지컬에서 혹여 한국의 인물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거든 장착해야 할 태도 중 하나일지 모른다. 여기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가 빠진다면, <해밀턴>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양상일 테고 말이다.

그렇게 바라면서도, 국가주의나 국뽕 서사는 워낙 인기이니 분명 또 등장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좋다. 잘 팔리는 이야기니 만들어질 수는 있다. 그렇다면 <해밀턴>의 한계를 극복하여 만들자. 미국인들이 <해밀턴>을 보고 느꼈을 그 전율만큼 대단하게, 하지만 그 단점들은 극복하여. 그리하여 우리가 현재를 재인식하고, 더 나아가 과거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도 불어넣을 수 있도록.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이 어딨냐고는 하지만, 역사도 선별된 기록일 뿐더러 이건 픽션의 세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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