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 SOOFILM


'관부재판'(關釜裁判)을 소재로 한 '허스토리'(HERSTORY)가 지난 27일 개봉한 가운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관부재판이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등 10명이 일본정부를 피고로 1992년 12월 25일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부에 제소한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공식 명칭은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소송'이다.  

비록 최종 패소하고 말았지만, '관부재판'은 1심에서나마 일본정부의 반인륜범죄에 대해 최초로 법적 책임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 운동사에 길이 남은 역사적 사건이다. 특히, 재판부마저 숙연하게 만든 피해 할머니들의 자기고백과 당당한 투쟁,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원고들의 재판투쟁을 뒷받침해 온 실존인물들의 헌신과 투혼은 지금까지 일본군 성노예를 소재로 한 어떤 영화보다도 큰 울림과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다.

다만, 예술작품임을 감안하더라도 구성상 일부 결함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에서 상대적으로 근로정신대 문제가 소홀히 다뤄진 것은 영화적 구성상 이해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일부 사실을 왜곡한 부분이 있어 좀 아쉬웠다.

근로정신대 동원됐다가 '성노예' 동원... 사실과 달라

영화에서는 도야마(富山)에 위치한 후지코시(不二越) 회사에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한 원고서귀순 역의 법정진술을 통해, 후지코시 회사에서 근로정신대로 강제노역 중 일행 15명이 외출 중 트럭에 실려가 군인에 성폭행을 당한 뒤 결국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것으로 표현돼 있다.

이는 실제 후지코시로 동원됐다가 나중에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가 된 강덕경(姜德景) 할머니의 경우에서 모티브를 삼은 것으로 보이지만, 경우가 좀 다르다.

당시 일제는 '위안부' 동원을 위해 감언이설이나 좋은 조건을 내세운 취업사기 등을 많이 저질렀지만, 일본 군수공장에 근로정신대로 동원됐다가 일본군 성노예로 이중 동원된 사례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 없다. 위 사례로 든 강덕경 할머니의 경우 역시, 배가 고파 밤중에 후지코시 공장에서 도망을 쳤다가 군인들에게 붙잡혀 나중에 성노예로 동원된 특별한 경우여서, 영화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상황 자체가 다르다.

영화만 보면, 마치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피해자들이 나중에 대부분 성노예로 다시 끌려가 성노예생활을 해야 했던 것으로 누구라도 오인할 수밖에 없다. 물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례가 있을 수는 있다. 만약 현재까지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239명 중, 강덕경 할머니 이외에 근로정신대로 동원됐다가 '성노예' 피해를 입은 사례가 또 있는지, 있다면 그 사례가 어떤 것인지 추후에라도 밝혀졌으면 좋겠다. 

설령, 강덕경 할머니 이외에 사례가 더 있다고 하더라도, 영화에서처럼 마치 일반적인 형태였던 것으로 오해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광복 후 구사일생으로 고향에 돌아와서도 편견의 시선에 시달리며 또 다른 아픔을 겪어야 했다. 물론 영화 <허스토리> 제작사측이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이는 '여자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에게 또 한 번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영화가 갖는 대중성과 사회적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그 파장이 만만치 않다. 결과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알려져 겪게 된 피해를 구제받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싸워 온 피해자들의 오랜 노력을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어서 안타깝다.

원고 양금덕 할머니 생존...20년 넘는 명예회복 노력에 찬물

 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 SOOFILM


또 영화 <허스토리> 엔딩컷 장면은 사실과 다르다. 이 장면엔 '지난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 할머니가 별세함으로써, 현재 관부재판에 참여했던 원고가 모두 숨졌다'고 나온다. 하지만 원고 중 한 명이었던 양금덕(梁金德. 광주) 할머니는 아직 생존해 계신다. 양금덕 할머니는 관부재판 원고로 참여한 뒤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법정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일찍이 관부재판 원고로 참여했던 양금덕 할머니는 패소 후, 1999년 미쓰비시중공업을 피고로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다시 소송을 제기했으며, 2008년 일본 소송에서 최종 패소 후, 2012년 다시 한국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현재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상대적으로 근로정신대 문제보다는 위안부 피해자에 초점을 둔 것을 감안한다 해도, 이 부분은 당사자들에 대한 중대한 결례가 될 수 있다. 또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어 우려된다. 단순 실수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여자 근로정신대 사건에 대한 근본적인 사회적 인식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일본 사법부가 관부재판 1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주장에 일부 손을 들어주는 대신 근로정신대 원고들의 주장을 기각한 것은 상대적으로 그 상처를 가볍게 취급했던 데 있다.

그러나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인류양심에 비춰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 근로정신대 문제 역시 용납될 수 없는 범죄다. 성적 학대가 없었다고 해서 위법사실이나 그 무게가 달라질 이유 역시 전혀 없다.

이런 상황에서, 1심 결과가 달랐다고 해서 우리마저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상처를 등한시 취급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법원 판결을 문제 삼기는커녕 오히려 일본 사법부 입장에 동조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 무관심은 그렇다 치더라도, 역사적인 대일투쟁에 나선 원고 이름에서조차 망각되는 것은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회복 투쟁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굳이 이 문제를 짚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조차 '정신대'라고 하면, 백사람이면 백사람 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여자근로정신대'에 대해 그 존재조차 모르고, 쉽게 망각하면서, 일본정부에 역사책임을 소리높여 강조하는 것은 얼마나 빈곤한 역사인식인가.

중요한 사실은, 관부재판에서 시작된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투쟁은 거듭된 패소에도 불구하고 20년 넘게 면면이 이어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덧붙이는 글 이국언 기자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상임대표입니다.
근로정신대 관부재판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