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미국월드컵,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려 보자. 조별리그 3경기를 모두 마친 후 한국의 축구팬들은 16강 진출이 좌절됐다는 아쉬움보다 지난 대회 우승팀 독일을 상대로 전반 0-3 열세를 극복하고 후반 2-3까지 추격하며 선전했다는 기쁨이 더 컸다. 어쩌면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선 지는 경기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배우게 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로부터 24년의 세월이 흘러 한국은 다시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지난 대회 우승팀 독일을 만났다. 경우의 수는 남아 있었지만 그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미했고 그나마도 후반 5분 스웨덴이 멕시코에게 골을 넣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한 골만 넣어도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던 독일을 끝까지 몰아 붙였고 후반 추가시간 두 골을 넣으면서 16강 진출 만큼 짜릿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을 승리로 이끈 극적인 골의 주인공은 절묘한 위치 선정을 보여준 중앙 수비수 김영권(광저우 헝다)과 폭풍질주를 보여준 한국 축구의 자랑 손흥민(토트넘)이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후 러시아월드컵 공식 홈페이지에서 선정한 수훈선수(맨 오브 더 매치)는 김영권도, 손흥민도 아니었다. 바로 이번 월드컵을 통해 한국 대표팀 최고의 라이징스타로 떠오른 '팔공산 데헤아' 조현우 골키퍼(대구FC)였다.

3년 연속 베스트 일레븐에 이름을 올렸던 K리그 최고의 수문장

조현우, 러시아월드컵 한국팀 최고의 스타 골키퍼 조현우가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독일과의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하며 첫 월드컵 데뷔 무대를 마친 뒤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조현우, 러시아월드컵 한국팀 최고의 스타 골키퍼 조현우가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독일과의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하며 첫 월드컵 데뷔 무대를 마친 뒤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서울에서 태어난 조현우는 학창 시절부터 소문난 '연습벌레'였고 중대부고를 졸업할 당시에는 여러 명문 대학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인정 받았다. 하지만 조현우는 고교 시절부터 자신을 지도해 준 브라질 출신 골키퍼 코치가 부임한 충남 아산의 선문대학교로 진학했고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을 춘계연맹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조현우는 연령별 대표팀을 거치며 미래의 골키퍼 유망주로 순조롭게 성장했다.

조현우는 K리그에 진출할 때도 구단의 명성보다는 자신이 최대한 많은 경기에 뛸 수 있는 시민구단 대구 FC에 입단했다. 조현우는 프로 첫 시즌이었던 2013년 13경기에 출전해 22실점을 기록했고 소속팀 대구FC 역시 38경기에서 단 6승 만을 기록하는 부진 끝에 K리그 챌린지로 강등됐다. 설상가상으로 조현우는 2014년 무릎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 수술대에 올랐다.

하지만 조현우는 부상을 극복하고 철치부심한 2015년 K리그 챌린지 전 경기(41경기)에 출전하며 대구FC를 K리그 챌린지 2위로 이끌었다. 조현우는 연말에 열린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도 K리그 챌린지 골키퍼 부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됐다. 조현우는 189cm 75kg의 마른 체형이 스페인 대표팀과 맨유의 세계적인 골키퍼 다비드 데헤아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대구FC팬들로부터 '조헤아', '팔공산 데헤아' 같은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위협적인 헤딩슛 막아내는 조현우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 한국 골키퍼 조현우가 독일 레온 고레츠카의 헤딩슛을 막아내고 있다.

▲ 위협적인 헤딩슛 막아내는 조현우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 한국 골키퍼 조현우가 독일 레온 고레츠카의 헤딩슛을 막아내고 있다. ⓒ 연합뉴스


조현우는 2016년에도 대구의 골문을 지키며 팀을 3년 만에 K리그 클래식으로 승격시켰다. 어느덧 대구의 간판스타가 된 조현우는 K리그 챌린지 MVP 투표에서도 득점왕 김동찬(대전 시티즌)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조현우는 2017년 팀이 치른 38경기 중 35경기에 출전해 48실점을 기록했다. 얼핏 보면 많은 골을 내준 거 같지만 하위권을 전전했던 대구의 성적을 고려하면 결코 나쁜 활약이 아니었다.

실제로 조현우는 작년 시즌 유효슈팅선방 1위, 클린시트(무실점 경기) 2위를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치며 대구FC의 K리그 클래식 잔류에 결정적인 활약을 했다. 2015, 2016년 K리그 챌린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됐던 조현우는 2017년에도 K리그 클래식 골키퍼 부문 베스트 일레븐에 이름을 올렸다. 명실상부한 K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인정 받은 것이다.

주전으로 나선 첫 국제대회가 월드컵, 노이어마저 압도한 선방쇼

2015년 울리 슈틸리케 감독에 의해 처음 A대표팀에 선발된 조현우는 이후에도 몇 차례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정작 경기 출전 기회는 쉽게 얻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 대표팀은 김진현(세레소 오사카)과 김승규(빗셀 고베)가 대표팀의 골키퍼를 양분하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국제대회 경험이 부족한 조현우는 주요 경기에서 제외된 채 권순태(가시마 앤틀러스)와 3번째 골키퍼를 두고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다.

조현우는 이번 러시아월드컵에서도 김승규, 김진현과 함께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지만 한국의 주전 골키퍼는 사실상 김승규로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흔히 월드컵에서는 부상이나 퇴장 같은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명의 골키퍼가 대회 전체를 소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조현우에게 기회가 갈 일은 없을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조현우는 대회 내내 한국의 주전 골키퍼로 중용됐고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했다.

[월드컵] 조현우, 나이스 캐치 (니즈니노브고로드=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골키퍼 조현우(23)가 18일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김신욱이 스웨덴 폰투스 얀손과 몸싸움하는 동안 공을 잡아내고 있다. 2018.6.18

▲ 조현우, 나이스 캐치 골키퍼 조현우(23)가 지난 18일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김신욱이 스웨덴 폰투스 얀손과 몸싸움하는 동안 공을 잡아내고 있다. ⓒ 연합뉴스


조현우는 스웨덴과의 첫 경기에서 수 차례 감각적인 선방을 통해 실점 위기를 막아내며 페널티킥으로만 한 점을 내줬다. 영국 언론 BBC에서는 경기 수훈선수로 승리팀 스웨덴 선수가 아닌 한국의 조현우를 선정했을 정도. 심지어 일부 리버풀 팬들은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한 로리스 카리우스 골키퍼 대신 조현우를 영입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SNS에 올리기도 했다.

멕시코전에서도 두 골을 내주는 와중에도 미겔 라윤(세비야)과 안드레스 과르다도(레알 베티스)의 결정적인 슛을 막아내며 선방쇼를 이어간 조현우는 독일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자신의 이름을 세계 축구팬들에게 각인시켰다. 조현우는 70%의 볼 점유율을 가지고 일방적인 공격을 펼치는 독일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며 6개의 유효 슈팅을 모두 세이브했다. 이번엔 일개 언론사가 아닌 월드컵 공식 홈페이지의 수훈선수로 선정되며 활약을 인정 받았다.

몸 놀림이 가볍고 반사신경이 좋은 조현우는 풍부한 K리그 경험을 통해 수비 포메이션을 이끄는 능력도 매우 탁월하다. 골킥에서의 빠르기와 정확도만 보완된다면 빅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기량을 갖췄다는 평가다. 무엇보다 이운재 이후 마땅한 주인이 없었던 한국 축구에 듬직한 수문장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조현우는 이번 월드컵에서 축구팬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줬다.

조현우 '어림 없지' 28일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축구국가대표팀 대한민국-온두라스 친선경기에서 한국 골키퍼 조현우가 온두라스 로만 카스티요의 슛을 잡아내고 있다.

▲ 조현우 '어림 없지' 지난 5월 28일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축구국가대표팀 대한민국-온두라스 친선경기에서 한국 골키퍼 조현우가 온두라스 로만 카스티요의 슛을 잡아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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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러시아 월드컵 독일전 조현우 골키퍼 대구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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