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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아이를 휴전선 가까운 부대에 남겨두고 돌아올 때, 난 구순을 앞둔 아버지와 뵌 적 없는 내 할머니 생각이 났다.

집안의 첫째인 아버지는 열아홉에 홀로 월남했다. 할머니는 길 떠나는 아버지에게 주먹밥을 싸주었고 아버지는 도지사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아버지는 삼팔선 아래 세상을 호락호락하게 생각할 만큼 철이 없었다. 고향을 떠난 아버지는 지구가 태양을 일흔 바퀴 돌며 긴 여행을 하는 동안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25일 북한 금강산 면회소에서 열린 2014 설 계기 2차 이산가족상봉 작별상봉에서 상봉단이 꼭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다.
 25일 북한 금강산 면회소에서 열린 2014 설 계기 2차 이산가족상봉 작별상봉에서 상봉단이 꼭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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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그 긴 기간 느꼈을 고통을 난, 빡빡 민 첫째의 뒷덜미를 보고 잠시 잠깐 섬광처럼 느꼈다. 그 막막한 두려움의 동굴을 잠시 엿보았을 뿐인데도 서늘했다. 이대로 다시 저 아이를 못 본다면 내 인생은 어떨까?

올 2월, 우연히 오두산 전망대를 가게 되었다. 북녘땅이 그렇게 손이 닿을 듯이 있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400m 강 넘어 북녘 땅이 보였고 마을엔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사람도 보였다. 어떤 굴뚝엔 연기가 올라왔다.

북한 땅이 이렇게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는 게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이렇게 빤히 보이는 고향 땅을 오도 가도 못하게 70년을 막고 있다는 게 기가 찼다. 진짜 저기 보이는 곳이 고향인 사람들은 고향의 모습을 보면서도 가지 못한 채로 어떻게 맨 정신에 살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전망대에 다녀온 뒤, 글쓰기 강의를 듣게 되었다. 3월 마지막 주 강사님은 '가, 나, 다...'로 시작하는 문장을 써서 한편의 글을 지어 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나는 오두산 전망대에 다녀온 걸 소재로 숙제를 했다.

가보고 싶은,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아버지의 고향 땅.
나는 얼마 전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아이들과 갔다.
다른 관람객은 멀쩡한데 나는 월남자들의 목소리 증언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라디오 스피커처럼 생긴 기계에서 고향의 냄새에 대한 증언이 흘러나온다.
마음이 아려온 나는 2층 전망대로 올라갔다.
바람이 쌩쌩 불어오는 곳에 망원경 다섯 대가 나란히 서 있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강 건너 북녘땅엔 낡은 건물들이 간간히 서 있다.
아마 아버지도 이곳에서 고향 땅을 보셨을 거다.
자꾸 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셨을지 궁금해진다.
차라리 고향 땅이 안 보이면 마음은 편했을 텐데...
카메라를 꺼내 북녘의 모습을 담아 볼까?
타향살이 70년인 아버지는 번번이 이산가족 상봉단이 되지 못했다.
파란 하늘을 나는 새는 남녘이든 북녘이든 경계 없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데...
하늘 아래 최고로 어리석은 우리들은 땅에 함부로 그은 이 선을 70년이 다 되도록 넘지 못하고 있다.
 
그 뒤 남북 관계가 급진전 되어서 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날 역시 글쓰기 수업이 있었다. 선생님은 '감사 카드'를 한 장씩 주면서 고마운 사람에게 글을 쓰라고 하셨다.

그날의 빅 뉴스는 '판문점 회담'이라 나는 친정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얼마나 좋으실까? 이제 곧 고향을 가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아버지가 허벅지를 꼬집으며 뉴스를 보고 계실 거 같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감사카드'를 썼다.

"소중한 아버지 감사합니다. 열아홉에 고향 떠나온 아버지 꿋꿋하게 그 힘겨움 버티고 남북평화회담 열리는 오늘까지 잘 살아오신 것 감사합니다. 고향 땅 밟는 날까지 건강하시길. - 2018년 4월 27일 정민."
 

글쓰기 수업에 아버지에게 보낸 '감사카드' 남북 판문점 회담이 열리던 날 아버지에게 쓴 감사카드
▲ 글쓰기 수업에 아버지에게 보낸 '감사카드' 남북 판문점 회담이 열리던 날 아버지에게 쓴 감사카드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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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다 쓰니 선생님이 발표를 하란다. 읽는데 울컥하니 눈물이 나왔다. 울음을 꾹꾹 누르며 다 읽었더니 선생님이 예상치 못한 주문을 한다.

"지금 쓰신 걸 사진으로 찍어서 카톡이나 문자로 고마운 분께 넣어 드리세요."

아버지는 내가 문자 넣어도 모르실 텐데...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쑥스럽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걸 알았으면 아마 이렇게 솔직하게 쓰진 못했을 거다. 어쩌겠나? 이미 글을 썼고 나는 문자를 보냈다. 이제 쑥스러움은 아버지의 몫이다. 난 모르겠다. 그렇게 수업이 끝이 나고 나는 그 문자를 잊었다. 다음 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너 문자 잘 받았다."
"아, 네."

그렇게 문자에 대한 대화는 어색하게 끝나 버렸다.

"어제 남북회담 해서 좋으셨죠?"
"그럼. 좋다마다."
"아버지 고향 갈 수 있는 날까지. 오래오래 사세요."

그리고 사나흘 뒤, 우리 집 첫째를 신병교육대에 입소를 시키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내내 70년 전 헤어진 내 아버지와 할머니가 자꾸 생각이 났다.

열아홉 그 어린 나이에 부모와 친지 그리고 고향을 떠나 남한 땅에서 뿌리내리느라 아버지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그 어린 첫째를 삼팔선 이남 땅으로 주먹밥 하나 쥐여 주고 떠나보낸 나보다 한참 어렸던 우리 할머니는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아내셨을까? 내 아들과 아버지와 할머니 생각에 돌아오는 길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2014 설 계기 남북 이산가족상봉 행사 첫날째인 20일 북한 고성 금강산 호텔에서 열린 단체상봉행사에서 남측의 민재각(95. 오른쪽)씨가 북측의 며느리를 만나고 있다.
 2014 설 계기 남북 이산가족상봉 행사 첫날째인 20일 북한 고성 금강산 호텔에서 열린 단체상봉행사에서 남측의 민재각(95. 오른쪽)씨가 북측의 며느리를 만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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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기대했던 남북이산가족 상봉 회담이 열렸다. 결과는 중단했던 상봉을 재개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솔직히 실망스럽다. 남쪽의 이산가족만 5만7천명이다. 이들 대부분은 아버지처럼 나이가 많다. 이분들이 언제까지 남북 각각 100명씩 선별하는 만남을 기다려야 하나? 기다리다가 돌아가시게 생겼다.

남북의 판문점 회담으로 평화체제를 수립하고 추가로 경제 협력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우선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이산가족 상봉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산가족 상봉을 제일 꼴찌에 둔 기분이다. 남북한 이산가족상봉 회의를 책임지는 분들과 그 윗분들께 간곡히 부탁드린다.

우리 아버지는 구순을 바라본다. 열아홉에 집을 떠나 한 번도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70년이 지나도록 동생들의 생사도 모른다. 세상천지에 어느 나라에 이런 이산 가족이 있겠나?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남한에만 5만7천명이다.

생사라도 알자. 편지 왕래라도 하자. 어려운 일 아니지 않은가? 어떤 문제보다 시급하다. 우리 아버지는 오늘도 내일도 가족을 만나는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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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출판 담당 기자로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 ohmybook201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