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

영화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 ⓒ 이정민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와 근로정신대 피해자를 다룬 영화 <허스토리>의 가장 큰 차별점은 단연 현재성이다. 영화는 과거의 비극을 드러내며 피해자들의 아픔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온 피해자들이 현재 시점에서 연대하며 일본 정부를 상대하는 과정을 그렸다. 평균 연령 60세 이상인 배우들이 전면에 섰다는 점도 기억할 지점이다.

영화를 연출한 민규동 감독은 "나만 잘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서"라며 마음 깊이 있던 부채감을 드러낸 바 있다. 그는 나름 노력해왔다. 그가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영화를 준비한다는 소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들렸던 터였다.

1944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와 반민특위 이야기를 준비하던 그는 '관부재판'(10명의 위안부 및 정신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낸 뒤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재판을 받은 사건 - 기자 말) 기록을 접한 후 방향을 급히 바꿔 지금의 <허스토리>를 내놓았다.

배우 김희애가 피해자들을 물심양면 지원한 여성사업가 문정숙 역을, 김해숙, 예수정, 이용녀, 문숙 등이 피해자 할머니들을 연기했다. 개봉을 일주일 앞둔 지난 21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민규동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첫 단편영화 제목을 따온 이유

 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 (주)NEW


제목부터 물어봐야 했다. <허스토리>는 민규동 감독의 첫 단편 영화, 그러니까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 직전 내놓은 첫 작품 < Her Story >의 제목을 가져온 것이었다. 두 여성의 동성애를 바라본 그의 시선은 장편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으로 확장됐다. 그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첫 단편 제목은 민 감독이 <제2의 성>을 읽고 든 생각, 즉 "여성 중심 사관이 필요하다며 당시 여성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제목을 따온 것"이었다.

"사실 히스토리(history)의 어원은 그리스어라 성별의 의미가 없지만 허스토리는 필요에 의해 생긴 단어다. 첫 단편은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다룬 것이라 그 단어를 제목으로 했고, 20여 년 만에 다시 소환했다. 2년 전 관부재판 기록을 뒤져보면서 피해자들 옆에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친, 지금도 바치고 있는 90대 할머니의 이야기가 새로운 시선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객관화 시킨 대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성장통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라면 위안부 피해자 분들에 대해 새로우면서 공감이 될 수 있다고 봤다. '허스토리'의 'Her'는 위안부 피해자일 수도 있고, 관부재판을 지원해 온 김문숙(문정숙의 실제 모델인 현 부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이사장) 단장일 수도 있다.

진정한 치유는 일본을 이겼느냐가 아닌 재판 과정 속에서 이 분들이 어떻게 친구가 됐느냐에 있다고 봤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일종의 성장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와 먼 이야기가 아닌 너와 나의 이야기라는 깨달음이 필요했다. 영화 보시면 문정숙 단장이 할머님들에게 오히려 선물을 받았다고 말하잖나. 그 이후 그 분들은 어떻게 살았을지 여운이 남게 이야기를 구성했다."


동시에 지금의 제목은 민규동 감독에겐 초심을 돌아본다는 의미기도 했다. "스태프들에겐 내 새로운 데뷔작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곤 했다"며 그는 "지금까지 제 작품들을 보면 한 감독이 찍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일관성이 있지 않은데 이번에야 말로 자의식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소재 특성상) 투자가 어려웠다. 제가 여태껏 했던 작품 중 가장 짧은 기간 내에 찍어야 했다. 34회 차로 마무리했으니 데뷔작보다도 짧았다. 그만큼 어려운 조건이었다. 대부분 감독들이 지금 찍는 작품이 자신의 은퇴작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작업하는데 전 데뷔작을 찍는다는 설렘을 안고 나아가려 했다. 친구 감독에게 제목을 말하니까 '또 레즈비언 이야기야? 김희애와 김해숙 선생이 뽀뽀하는 거야?'라고 묻더라. 속으로 '그 제목을 이젠 다시 써도 되겠다' 싶었다.

영화에서 문정숙 단장과 문 단장의 친구(김선영)가 뽀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첫 단편의 시그니처라고 생각해주시길 바란다(웃음). < Her Stroy >가 사회와 시스템에 저항하는 이야기였다면 <허스토리>는 연대와 우정의 이야기다. 저에겐 옛 제목이 마치 열매 맺지 못한 씨앗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 영화에 쓰이려고 그때의 저와 인연이 시작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들은 신화 속 주인공이 아닌, '사람'

 영화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

영화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 ⓒ 이정민


실제 관부재판에 참여한 피해자는 10명. 위안부 피해자 3명과 정신대 근로자 피해자 7명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문정숙 단장을 포함해 할머니 캐릭터들은 모두 실제 할머니들의 이름이 아닌 가상의 이름을 사용했다. 위안부라는 단어보다 성노예 피해자로 표현하는 게 적절한 만큼 영화에선 인물의 대사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위안부라는 단어에 인용부호를 넣고, 근로정신대와 성노예 피해자를 구분해 사용하는 등 세심하게 현재 분위기를 반영했다. 민 감독은 "이번 영화로 관객 분들이 명확히 개념을 구분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실제 피해자 분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극화되고, 반영된 걸까. 민규동 감독은 김문숙 이사장의 책을 비롯해 피해자들의 증언집을 섭렵하면서 지금의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갔다.

"영화 속 문정숙 캐릭터는 김문숙 선생과 지금 정대협 3대 회장인 윤미향 대표의 성격이 함께 담겨 있다. 김문숙 선생은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하니 최대한 영화적으로 재밌게 구성해달라고도 하셨다. 역사적 실재성을 담보하면서 대중 영화 성격을 같이 가져가는 게 가장 어려운 지점이었다. 살아계신 분이라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지만 극화는 필요했다. 변호인단과 재판 전략의 차이로 갈등이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으로 문정숙 캐릭터를 만들어갔다.

할머님들도 실명을 쓰지 않고 각자의 작은 디테일을 살리려 했다. 김해숙 님이 맡은 배정길 캐릭터는 김학순 할머님보다 앞서 위안부 피해를 밝힌 것으로 알려진 배봉기 할머님의 이름과 제 어머니 성함을 합쳤다. 가와다 후미코라는 일본 르포 작가의 <빨간 기와집>이라는 책을 보면 배봉기 할머니의 일생이 좀 박복했던 것으로 나온다. 그 이미지를 기초로 삼았다. 이용녀 님이 맡은 이옥주 캐릭터에는 송신도 할머님이 들어가 있다. 심약해 보이지만 끈질김이 있는 지점을 반영했다.  

예수정 선생의 박순녀 캐릭터는 박두리 할머님이다. 그렇게 법정에서 욕설을 하셨던 분이다. 겉으론 담대하신데 일본행 배에선 과거 기억이 나 공포에 떨기도 하셨다더라. 배정길의 아들(최병모) 이야기는 아픔의 대물림을 모티브로 삼았다. 피해자들의 증언집 중 아들이 이상해서 병원에 데려갔는데 매독 판정을 받았고, 그것으로 본인이 위안부였음이 발견됐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일로 아들은 엄마를 때리게 되고, 그렇게 이중고를 겪는 할머님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이외에도 민규동 감독은 "영화에서 정신대 지원을 독려한 일본인 선생 캐릭터가 실제로 두 일본인 선생님을 합친 것"이고, "같은 민족이자 여성 위에 군림한 위안소 주인 홍 여사 캐릭터도 실제로 존재한 할머님을 모티브로 했다"며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만큼 다양한 군상이 <허스토리>에 압축적으로 담겨 있었다. 민 감독은 "우리가 알고 있는 피해자 분들의 모습은 사실 박제돼 있는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이 문제의 본질은 폭압과 인권 유린인데 사람들은 기억하기 쉬운 쪽으로 피해자 분들을 생각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인간은 다양하고 다변적일 수밖에 없다. 그 분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일단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자료와 기록의 틈까지 영화에 반영하려 했다. 제 관심은 투사로서의 할머니들이 아닌 그 분들이 장애물을 넘고 방해를 뚫고 나가는 방식에 있었다."

정면 승부

 영화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

영화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 ⓒ 이정민


그래서였을까. 촬영 막바지 민규동 감독은 탈진까지 했다. 그만큼 이번 작업이 그에겐 무거운 숙제처럼 다가왔을 터. "텍스트적 한계에 갇힐까봐 걱정이 컸고, 그만큼 배우들도 기교가 아닌 진심으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는 "그 베테랑 배우들이 오히려 주눅이 드셔서 겸허하게 캐릭터에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100프로 할머님들을 구현하진 못해도 진심만은 관객들에게 전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여전히 우린 이 사건을 다룰 때 엄숙주의에 빠져있다. 그래서 제겐 김선영 님이 맡은 캐릭터가 중요했다. 여성사업가로서 자신이 필요하면 기부하고 어려워지면 발을 빼는 속물적 캐릭터다. 문정숙에게 잘난 척 말라고 손가락질도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쉽게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지. <허스토리>가 어떤 계몽 영화가 아니길 원했다.

사람들은 할머님들 아픔을 다들 안다고 하지만 그 분들의 증언집은 안 산다. 증언집들이 다 초판이고, 절판됐다. 물론 들여다보기 쉽진 않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처럼 소재를 숨기고 다른 이야기인 것처럼 해야 보러 오시니까. <허스토리>는 정면승부라고 생각했다. 정면승부를 걸어도 과연 관객들을 만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만들었다."


남은 질문들

가장 예민할 수 있는 질문이 남았다. 바로 김문숙 이사장에 대한 세간의 엇갈리는 평가다. 관부재판을 이끌며 사비 20억 원을 쾌척했고, 관련 사업에 열정을 보이는 등 공이 크지만 동시에 아시아여성평화기금에 대해 "과거에 기금에 반대했지만 지금은 그때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발언해 논란을 빚었다. 또 부산 지역 사업에서 다소 일방적 행보를 보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영화로 다루기 매우 어려운 주제"라며 민규동 감독이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론 그 평화기금에 대한 말은 '그 돈을 받았더라면 지금 할머니들이 그렇게 가난하고 힘들게 살진 않았을 텐데' 정도로 회한의 맥락으로 느꼈지 마치 전략을 수정해 '일본 정부의 정치적 사죄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걸로 보이진 않았다. 그 말로 인해 인생을 바쳐서 피해자 할머님들의 치유와 삶의 복권을 위해 노력한 그의 진정성이 훼손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정대협은 훨씬 더 국제적으로 많은 분들의 지지를 받으며 훌륭한 일을 하셨다. 제 입장에선 부산의 작은 지역에서 어떤 네트워크도 없이 홀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모습이 더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분명 이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또 다른 주장을 할 것이다. 전 모든 주장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으면 한다. 그것이 틀리든 맞든 테이블에 올려놓고 검증받도록 하는 게 건강한 사회라고 본다."


최근 김문숙 이사장은 노구를 이끌고 <허스토리> 시사회에 참석해 남다른 감회를 밝혔다. "선생께선 영화화엔 흔쾌히 동의하셨지만, 가정사 등은 깊이 들어가길 원하지 않으셨다"고 제작 초기 당시 일화를 전하며 민 감독은 "아마도 그간 다큐멘터리를 찍겠다는 사람도 많았고, 영화 자체에 반신반의 하셨을 것"이라 말했다.

"아까 말씀드린 그 회한이 느껴졌다. 30년을 버텼고,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 박근혜가 일본에게 100억 원을 받고 끝낸다고? 그렇게 싸웠는데 왜 위안부 문제는 제자리일까 생각하실 것 같았다. 그래서 영화에 '세상은 바뀌지 않았지만 우리(할머니들)는 바뀌었다. 우리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 것'이라는 메시지를 넣은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문정숙이 자신의 삶을 후회하려는 순간에 딸이 '후회하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말한다. 제가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었다. 영화 속에서 문정숙의 딸(이설)이 수요집회 무대에 서는 장면이 있다. 할머니 세대에서 엄마 세대로 그리고 다시 딸의 세대로 (문제의식이) 전달되는 걸 보이는 장면이다. 영화화에 대해 반신반의하셨던 것에 대한 화답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

영화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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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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