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가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 AFC 가맹국을 대표하여 출전한 아시아 5개국(호주 포함)의 성적합산은 2승 5패다. 2연패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사우디를 비롯하여 한국, 호주가 각각 패배의 쓴맛을 봤다. 반면 이란(1승 1패)과 일본(1승)은 나란히 첫 경기에서 승점 3점씩을 따내며 아시아 축구의 체면을 세웠다.

4년 전 브라질 월드컵에는 총 4팀의 아시아 국가가 출전했지만 단 1승도 따내지 못하고 조별리그에서 전멸했다. 그에 비하면 이번 대회는 아시아팀들이 벌써 2승이나 따냈으니 선방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아시아 축구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꼽히던 이란과 일본이 먼저 첫 승을 따내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란-일본, 한국 축구의 라이벌이었는데...

 2018 러시아 월드컵 H조 일본과 콜롬비아의 경기. 이날 일본은 콜롬비아 선수 1명이 퇴장한 가운데 2-1로 콜롬비아를 누르고 1승을 올렸다.

2018 러시아 월드컵 H조 일본과 콜롬비아의 경기. 이날 일본은 콜롬비아 선수 1명이 퇴장한 가운데 2-1로 콜롬비아를 누르고 1승을 올렸다. ⓒ AP-연합뉴스


이란과 일본은 설명이 필요없는 한국 축구의 오래된 앙숙이다. 두 팀은 월드컵 예선-아시안컵 등 굵직한 무대에서 고비 때마다 여러 번 한국 대표팀과 충돌하며 물고 물리는 악연을 이어왔다. 월드컵에서 직접 맞붙을 일은 없어도 서로 '너보다는 잘해야 한다'는 은근한 경쟁심리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국내 팬들은 '월드컵에서의 업적만 놓고 보면 여전히 한국 축구가 가장 앞선다'는 자부심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런 자부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국은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2회 연속 한조에 편성됐던 이란을 상대로 A매치 5경기 연속 무승(1무 4패)에 시달리며 2011년 아시안컵 승리 이후 7년째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역대 상대전적에서도 9승 8무 13패로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이란은 포르투갈 출신의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이후 아시아 최강팀이자 '한국의 천적'으로 자리매김했다. 케이로스 감독은 2013년 손가락으로 비속어를 표시해 논란을 일으키는 등 한국 축구에 수많은 굴욕을 안겨줬다. 탄탄한 수비조직력을 앞세운 이란의 '늪 축구' 앞에 아시아 팀들은 물론이고 월드컵 본선무대에서 만난 아르헨티나-스페인같은 세계적인 강호들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일본의 반전은 더욱 놀랍다. 일본은 월드컵 개막을 불과 두 달 앞두고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을 경질하는 초강수를 뒀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감독의 임기를 보장하던 일본축구계로서는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자국에서도 무리수였다는 비판이 나올만큼 평가는 좋지 않았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월드컵 본선에 대한 전망 여론도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한국과 일본이 최근 20년간 월드컵 본선 성적의 사이클이 비슷했다는 역사와 더불어 일본도 이번 월드컵에서 고전하리라는 게 국내 팬들의 예상 혹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첫 경기에서 강호 콜롬비아를 2-1로 제압하는 이변을 연출하며 부정적인 전망을 보기좋게 뒤집었다. 콜롬비아는 4년 전 브라질 대회에서도 같은 조에 편성되어 1.5군으로 일본을 4-1로 완파하는 굴욕을 안겼던 팀이기도 하다. 고령화된 선수단으로 '아저씨 재팬'이라는 놀림을 받았던 일본 대표팀은 이후 단숨에 반전된 여론을 얻었다. 월드컵에 대한 응원 열기와 기대감도 상승했다.

반면 한국은 첫 경기인 스웨덴전에서 졸전 끝에 0-1로 패했다. 더구나 전력이 더 강한 멕시코-독일과의 경기가 남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망은 비관적이다. 1990년 이탈리아 대회 이후 28년 만에 3전 전패라는 최악의 결과로 월드컵을 마감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도 높아지고 있다. 월드컵 직전부터 심상치 않았던 대표팀 선수와 감독을 향한 비난 여론이 스웨덴전 이후 절정에 달했다. 여기에 아시아의 라이벌들은 오히려 한국보다 더 잘 나가고 있으니 팬들의 심기는 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다.

악조건을 실력으로 극복한 이란, 탄탄한 수비 빛났다

그런데 이란-일본의 선전을 바라볼 때 단순한 부러움의 감정을 넘어 좀 더 객관적으로 봐야할 필요도 있다. 일단 두 팀의 첫 승은 운이 따라준 측면이 크다. 이란은 모로코전에서 경기 막판 상대의 자책골 덕에 승리를 거머쥐었으며 스스로 기록한 필드골은 아직 전무하다. 일본도 콜롬비아전에서 전반 3분 만에 상대 선수의 핸드볼 파울로 인한 페널티킥과 퇴장으로 인한 수적우위까지 거머쥐는 뜻밖의 행운을 누렸다.

이란은 스페인전 패배로 조 3위로 밀린 데다 최종전도 강호 포르투갈전이라 조별리그 탈락 가능성 더 높다. 일본도 남은 폴란드-세네갈이 모두 만만치 않은 팀이라 16강행은 아직 낙관하기 힘들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점은 단지 승점 3점이 아닌, 두 팀이 추구하고 있는 '과정의 차이'다. 이란은 케이로스 감독이 무려 7년째 장기집권하며 강력한 수비와 역습으로 요약되는 끈끈한 팀컬러를 구축했다. 세계적인 스타가 없는 이란의 선수층은 아시아의 라이벌인 한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그리 낫다고 할 수 없다. 열악한 인프라로 인해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평가전 상대를 구하는 일이나 선수들에게 지급되는 축구 용품 지원조차 원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란은 이 모든 악조건을 오로지 실력으로 극복하며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발휘했다.

이란은 우리나라 축구 팬들에게 중동 특유의 침대축구나 '안티풋볼'로 인한 부정적인 인상이 강하다. 하지만 스페인전에서 보여준 모습은 이란에 대한 선입견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강력한 우승후보인 스페인을 상대로 이란은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디에고 코스타의 행운의 골이 터지기 전까지는 탄탄한 수비를 선보였다. 또한 실점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공세로 전환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스페인을 끝까지 괴롭히며 분전했다. 후반 18분 세트피스 상황에서 에자톨리히의 슈팅이 VAR 판독 끝에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뒤집히지 않았다면 경기의 향방은 알 수 없었다. 이란이 충분히 월드컵 본선에 출전할 만한 자격이 있는 팀이라는 것을 증명한 경기였다.

일본은 콜롬비아전에서 특유의 패싱축구로 4년 전의 패배를 설욕했다.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운이 따라줬다고는 하지만 상대의 실수를 유발하는 것도 엄연히 능력이다. 비록 할릴호지치 감독의 경질 과정은 비록 깔끔하지 못했지만 일본은 특유의 패싱축구로 회귀하며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플레이로 승리를 따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색깔을 잃은 한국 축구

[월드컵] 작전 지시하는 신태용 감독 (니즈니노브고로드=연합뉴스) 한종찬 기자 = 18일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대한민국 대 스웨덴의 경기에서 한국 신태용 감독이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2018.6.18

▲ [월드컵] 작전 지시하는 신태용 감독 (니즈니노브고로드=연합뉴스) 한종찬 기자 = 18일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대한민국 대 스웨덴의 경기에서 한국 신태용 감독이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2018.6.18 ⓒ 연합뉴스


이란과 일본보다 한국은 못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한국 축구가 나아가고자 하는 확실한 방향성과 색깔이다. 2002년 히딩크호의 한일월드컵 4강 신화부터 2010 허정무호의 남아공대회 원정 16강에 이르기까지, 한국 축구는 '압박-체력-투지'라는 확실한 색깔이 있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4명의 국내파 감독(조광래-최강희-홍명보-신태용)과 1명의 외국인 감독(슈틸리케)를 거치면서 연속성은 단절됐고 한국 축구만의 확실한 개성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케이로스처럼 수년간 한 팀에서 머물며 성과를 인정받은 장수 감독도 없다. 일본처럼 기술과 패싱력이 과거보다 좋아진 것도 아니다. 10년 전이면 몰라도 체력과 투지도 더 이상 한국 축구의 장점이 아니다.

스웨덴전에서 축구 팬들이 신태용호의 플레이에 실망한 것은 단순히 결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스웨덴을 상대로 무색무취 하고 소극적인 경기운영을 하다가 '우리가 할 수 있는 플레이' 혹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플레이'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이란처럼 작정하고 수비를 하려면 제대로 하려는 집중력도, 일본처럼 아예 월드컵을 앞두고 모든 것을 뒤엎고 새 판을 짜려는 모험정신도 보여주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한국 축구가 지금 이란과 일본을 부러워 하는 처지가 된 것은 그만큼 여전히 발전하지 못한 한국 축구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은 멕시코와 독일전에서도 비록 승리는 어렵다고 해도 최소한 한국축구가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만은 다시 보여줘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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