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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1년 기자와 '뿌리의집'에서 인터뷰 중인 김수자씨(우측)
 지난 2011년 기자와 '뿌리의집'에서 인터뷰 중인 김수자씨(우측)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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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나는 친모를 찾기 위해 52년 만에 모국을 방문한 혼혈 미국 입양인 김수자씨를 '뿌리의집'에서 만났다(관련 기사 : "아이들은 나를 '쪽발이 깜둥이'라 불렀다").

그는 지난 1958년 9월 6일 인천에서 한국인 엄마와 흑인 미군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후 할머니가 임시로 그를 키웠다. 그러나 당시 생활고와 우리 사회의 편견으로 고생하던 친모는 다음해인 1959년 5월 25일 그를 고아원에 맡겼다. 두 달 뒤인 7월 31일, 그는 홀트에 의해 미국으로 입양 보내졌다.

김씨의 미국 양부모는 흑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흑인 지역에서 자라고 학교를 다녔는데 흑인 아이들로부터 '쪽발이 깜둥이'라고 수없이 괴롭힘을 당했다. 당시 그의 사연에 가슴이 많이 아팠던 기억이 새롭다. 지난 1987년부터 그는 한국에서 친모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가 친모 찾기를 거의 포기할 즈음인 2016년 그의 지인들은 유전자(DNA) 검사를 통해 한국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친모를 찾도록 해보라고 권유했다. 친모가 미국에 살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이유였다.

그래서 김수자씨는 한국에 있는 비영리단체 '325갈마'(http://325kamra.org/)에 도움을 요청했다. '325갈마' 한국팀은 해외입양인들을 위해 무료로 친생 가족의 유전자 검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뒤 김수자씨는 325갈마를 통해 미국에 있는 비영리단체 '조상'(https://www.ancestry.com/)을 알게 됐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는 두 단체의 유전자검사를 통해 지난해 11월 한국에서 미국으로 해외입양 보내진 지 58년 만에 친부를 찾았다. 이어서 올해 2월에는 59년 만에 친모를 찾아 감격적으로 상봉까지 했다.

나는 올해 3월 김수자씨에게 그 기적 같은 사연에 대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친부가 3월 6일 갑자기 사망했고, 김수자씨는 친부가 사망한 지 3일 뒤인 3월 9일 다리가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해서 입원해야 했다. 그리고 지난 4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친부의 장례식에 목발을 짚고 다녀왔다.

지난 5월 그는 큰 교통사고를 당해 또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최근에야 병원에서 막 퇴원한 그는 아직도 안정을 요하는 상태다. 지난 3월부터 6월 13일까지 3개월간 김수자씨와 이메일 및 페이스북 메신저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 먼저, 58, 59년 만에 친부와 친모를 찾은 걸 축하드린다. 어떻게 친부모를 찾았나.
"나는 지난 1987년부터 한국에서 친모를 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는데 전부 허사였다. 그래서 혹시 친모가 미국에 살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2년 전에 '조상'(https://www.ancestry.com/) 미국 사이트를 통해 DNA 검사를 했다. 그러던 중 나와 DNA가 일치하는 친부모님이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지난해 11월엔 친부 그리고 올해 2월엔 친모와 58, 59년 만에 직접 전화로 통화할 수 있었다. 물론 너무 기뻤다!"

60년 가까이 걸려 친부모 찾은 사연

 지난 2월 59년만에 친모와 재회한 김수자씨
 지난 2월 59년만에 친모와 재회한 김수자씨
ⓒ 김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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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통화까지 했는데 왜 못 만났는가. 또 그로부터 4개월 뒤인 올해 3월 6일 친부는 어떻게 갑자기 돌아가셨나.
"친부는 미국 중서부 미주리주 캔사스시에 살고 계셨고, 나는 서부 캘리포니아주 남쪽 샌디에고에 살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11월 친부와 58년 만에 첫 통화를 하면서 당장 비행기를 타고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아빠는 지금 캔사스는 폭설과 추위로 날씨와 교통이 너무 나쁘다면서 날씨가 풀리는 올해 4월에 오라고 하셨다. 그후 아빠와 수 차례 전화 통화했는데 너무 추운 날씨 때문인지, 올해 3월 6일 아빠와 58년 만에 첫 통화를 한 뒤 넉 달도 안 돼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통화만 하고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너무나 안타깝다."

- 올해 2월에는 59년 만에 친모를 만났다. 친모는 잘 계신가. 1987년부터 31년간 친모 찾기를 시도했고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은 게 놀랍다. 포기하지 않았던 끈기의 비결은 무엇인가.
"매순간 친모를 생각했고 친모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래서 31년 만에 엄마를 찾았을 때, 엄마와 나는 전화통화를 하면서 '당장 만나자'고 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통화를 한 날은 '사랑의 날'인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였다. '사랑의 날'에 친모와 처음으로 통화할 수 있게 도와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이날 첫 통화를 하면서 엄마와 나는 둘 다 너무 행복해서 전화하는 내내 펑펑 울었다.

엄마는 '내가 수자를 찾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를 연발하셨다. 엄마는 나를 너무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엄마가 살고 있는 플로리다주로 당장 오라고 하셨다. 나는 당장 비행기를 타고 플로리다주로 날아가 엄마를 만났다. 엄마의 건강은 대체로 좋은 편이었는데 약간의 치매가 있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엄마와 나는 서로 끌어 앉고 한동안 떨어질 줄 몰랐다. 그후 우리는 의자에 앉아서 손을 잡고 서로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봤다. 우리는 너무나 닮았다. 심지어 손도 너무 비슷했다. 단지 다른 건 내 피부색이 엄마 피부색보다 짙은 것뿐이었다."

 지난 2월 59년만에 친모와 재회한 김수자씨
 지난 2월 59년만에 친모와 재회한 김수자씨
ⓒ 김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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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59년 만에 친모를 직접 만났을 때 그리고 지난해 58년 만에 친부와 처음 전화 통화했을 때 감회가 남 달리 컸을 것 같은데? 
"엄마를 만났을 때 나는 아주 큰 행복감과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엄마는 왜 59년 전에 나를 스스로 키우지 못하고 입양을 보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쩌면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다.

내가 이미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엄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가 나를 쳐다보는 모습만 봐도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고 행복해하신 다는 걸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둘 사이는 아무런 말이 필요 없었다. 나는 엄마를 찾았고 결국 만나서 너무 기쁘다. 엄마를 찾은 지 벌써 넉 달이 되지만 지금도 나는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할 때가 많다.

그렇게 2월 엄마를 만났는데, 3월에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 죽음에 놀라서 그랬는지 3일 뒤에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 입원해야 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4월엔 평생 만나보지 못했던, 전화통화만 몇 번 해봤던 아빠의 장례식장에 목발을 짚고 다녀왔다.

부러진 다리가 완쾌되는가 싶었는데... 그동안 무리를 해서 그랬는지 지난 5월엔 큰 교통사고가 났다. 다시 몇 주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당분간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오는 7월엔 다시 플로리다로 가 엄마를 만나고자 한다. 7월이 무척 기다려진다."

- 친부모를 찾은 뒤 생활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 친모는 어떠신가. 또, 지금까지 친부모는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가.
"친부모를 찾은 '충격'에서 난 지금도 제정신이 아니다. 친모와 친부에 각각 여러 자녀가 있어서 현재 그 의붓형제들과 사귀고 서로 알아가느라 정신 없고 바쁘다. 친부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뒤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는 잘 모른다. 친부는 미국에서 2남 4녀를 두셨다.

친모는 친부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나를 입양 보낸 뒤 미국 선원과 결혼하고 미국에 이민 오셨다. 친모는 지금 약간의 치매가 있으셔서 그런지 당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친모의 자녀들인 나의 의붓형제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이자 내 친모의 남편이 직업상 배를 타고 해외에 많이 나가 있어서 이국땅에서 친모 혼자 자녀를 키우느라 젊어서 고생이 많았다고 전했다.

친모는 미국에서 3남 3녀를 뒀는데, 친모의 장남은 2000년대 초반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친모는 자식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는 큰 슬픔도 맛보셨다. 친모는 타향에서 참 어려운 세월을 꿋꿋하게 사신 것 같다.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셔서 그런지 친모는 참 강인한 분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소중한 친모를 내가 포기하지 않고 31년간 끊임없이 찾을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죽는 순간까지 친부모를 찾아라"

 지난 2월 59년만에 친모와 재회한 김수자씨
 지난 2월 59년만에 친모와 재회한 김수자씨
ⓒ 김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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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59년만에 친모와 재회한 김수자씨
 지난 2월 59년만에 친모와 재회한 김수자씨
ⓒ 김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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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친부모를 찾고 있는 입양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나는 입양인들이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죽는 순간까지 친부모를 찾으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러나 친부모를 간난신고 끝에 설사 찾아도 우리는 그 후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 찾은 친부모가 나를 만나고 싶어할지, 아니면 말 못 할 사정으로 날 만나는 걸 꺼려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과를 겸허하고 차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친부모가 나를 만나기를 거부해도, 그들의 결정을 존중해줘야 한다.그럼에도 친부모 찾기를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친부모를 찾기 위한 노력은 눈덩이가 쌓이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쉬워진다.

특히 DNA 조사는 큰 도움이 된다. 나의 경우, 그동안 친모가 한국에 계시는 줄만 알고 지난 몇십 년간 한국에서 친모를 한국 이름으로 수소문했다. 그러나 최근에야 친모가 미국에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국에서도 수소문했고 그래서 결국 극적 상봉도 할 수 있었다. 친모가 그동안 미국에서 내가 모르는 미국 이름으로 살아서, 미국에서의 DNA 조사가 없었다면 친모 찾기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

또 친부모 찾기를 삶의 목표보다는 삶의 과정으로 생각하길 권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친부모를 찾는 여정에서 나는 아주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분들의 삶의 모습은 내 삶에 많은 자양분이 됐다.

나는 지금도 7년 전 '뿌리의집'에서 기자님(인터뷰어)을 처음 만났던 보석 같은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당시 나는 해외입양인들이 친부모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노력하는 기자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중한 추억과 기억들이 친부모를 찾는 과정에서 큰 힘과 용기가 된다.

특히 당시 기자님은 당신의 혼혈 자녀들이 한국에서 겪은 가슴 아픈 '왕따'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런 일화도 내가 혼혈아로서 한국에서 겪은 뿌리 깊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래서 내게 그런 힘과 용기를 준 기자님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싱글맘에 대한 차별 없애야"

- 한국에서 DNA 검사로 친부모를 찾을 때 비영리단체 '325갈마'(http://325kamra.org/)에서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 정부는 친부모 찾기에 별로 도움을 못 준 것으로 들었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해외입양인들이 친부모를 찾고자 할 때 어떤 도움이 절실하다고 보는가.
"한국 정부는 입양인들이 친부모를 찾고자 할 때 무료로 DNA 검사를 해줘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입양 보낸 친모들에게 입양 보내진 아이들이 그후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해줘야 한다.

아울러 해외입양인들이 이중국적을 쉽게 취득할 수 있도록 지원해줘야 한다. 또 싱글맘에 대한 차별을 없애 생활고로 자녀를 입양 보낸 싱글맘들이 나중에라도 친자녀를 찾고자 할때 사회적 낙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DNA 검사를 할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미국 정부는 한국에서 근무한 미군 중 한국 여성을 통해 자녀를 낳은 미국 아빠들에 대한 DNA 검사를 무료로 하게 해주고, 그 자료를 입양인들이 요청할 때 제공해줘야 한다."

- 해외입양인으로 살면서 가장 슬프고 어려운 순간은 언제였나.
"31년 전 내가 처음 친부모를 찾고자 했을 때 별로 도움을 요청 할 곳이 없어서 아주 슬프고 힘들었다. 또 친부모들이 아이들을 입양 보내고 결혼해 새 인생을 살면서 훗날 입양 보내진 아이들이 돌아와 친부모를 찾을 때 두려워서 피한다는 다른 입양인들의 사연을 듣고 너무 슬펐다(관련 기사 :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사랑해요... 아빠").

지금 70대 이상의 한국인들은 한국전쟁 후 생활고나 사회적 차별로 많은 여성들이 자녀 양육을 포기하고 해외입양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비극을 알고 있지 않나. 그럼 이제라도 그런 비극에 찬 삶을 평생 살았던 어머니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친자녀를 찾을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포용해주는 한국이 돼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를 찾기 위해 큰 용기를 내준 내 친어머니가 너무 자랑스럽다."

- 향후 친모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건강 등 사정이 허락하는 한 엄마를 자주 만나고 싶다. 그러나 계획은 어떤 면에서는 참 무의미하다. 친부를 난생처음 만나기로 했지만, 갑자기 돌아가시지 않았나. 그래서 나는 엄마와 내가 살아있고,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 가능한 자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서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고... 세상에 가족보다 소중한 것이 없지 않은가? 늦게나마 엄마를 만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많은 분들과 하느님께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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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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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